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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짧았던 ‘서울의 봄’… 군홧발 전두환 시대 기록 결심 / 이이화

등록 2010-11-26 09:13수정 2010-11-27 11:51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마지막 시민군을 진압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한 직후 모든 인적과 차량이 끊긴 채 텅 빈 광주 금남로 전경. 필자는 그 한달 뒤쯤 광주에 내려가 ‘5·18 민중항쟁’의 현장을 홀로 답사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마지막 시민군을 진압하고 전남도청을 점령한 직후 모든 인적과 차량이 끊긴 채 텅 빈 광주 금남로 전경. 필자는 그 한달 뒤쯤 광주에 내려가 ‘5·18 민중항쟁’의 현장을 홀로 답사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3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관악산 기슭 서울대의 ‘아크로폴리스’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학생 시위가 벌어졌고 때로 학생들은 도서관을 차지하고 밤샘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5월2~3일 대규모 학내 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이원집정부제를 반대하는 구호를 내걸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이원집정부제를 구상한다고 공포했던 것이다. 나는 학생 시위대를 따라 영등포를 거쳐 서울역에 이르렀다. 규장각의 대학원생들도 모두 대열에 참여하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시위대들이 집결해 있을 때 이수성 당시 서울대 교무처장이 학생들의 뜻을 정부에 전달할 테니 이쯤에서 학교로 돌아가라고 간곡한 어투로 당부했다. 이 설득이 먹혀 시위대는 일단 해산했다.

하지만 나는 일부 학생들을 따라 시청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홍익대생 등 여러 대학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날 밤 내내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쓰면서 김밥이나 족발 따위를 들고서 시위대를 따라다녔다. 택시를 타고 동대문까지 따라갔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오자 아내는 온몸에서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와 전달하지 못해 남은 족발을 보고 사태를 짐작한 듯했다. 사실 이런 내 행동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시위대가 시내에 몰려 있다는 보도나 소문을 들으면 내 발길은 나로 모르게 광화문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어 5월15일에는 김용섭 등 교수를 포함한 지식인 134명 명의의 지식인 선언도 발표됐다. 나는 그 명단에 끼지 못했지만 뭔가 희망이 보였다. 또 한국기자협회에서는 보도 검열을 반대하는 결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계엄령 상태였지만 무교동의 낙지골목에는 자유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나는 신이 나서 곧잘 기자들과 이 친구 저 친구를 불러내 낙지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민주화’를 떠들어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월17일 이미 내려진 계엄령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확대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 방송을 듣자마자 나는 서울대로 달려갔다. 학교 정문 앞에는 이미 군인들이 지키고 서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직원이라 해서 들어가 보니 별별 소문이 다 들렸다. 어제저녁에 당직을 서는 사람, 연구실에서 공부하던 사람, 밤 작업을 하는 학생들을 군인들이 방망이로 마구 패고 구둣발로 짓밟아 쫓아냈다고 했다. 아하, ‘다시 캄캄한 밤이 다가오는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 뒤 며칠 동안 나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앓았다. 신문을 보니 ‘광주에 모종의 사태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어코 광주에서 일이 터졌구나 하고 직감했다. 광주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불통이었다. 미확인 보도를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내 그리운 마음의 고향 광주…, 하지만 내게 무슨 용기나 힘이 있는가. 다시 울분의 세월을 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현대사에서 전두환 시대를 기록하기로 다짐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광주민중항쟁이 진압되고 한달쯤 지나서야 나는 어렵사리 광주로 내려갈 수 있었다. 광주는 삭막했다. 광주 거리가 삭막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삭막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 곧 전남대 교수인 송기숙·김동원·이상식 등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모두 보안사에 끌려갔거나 도피중이었다. 그래서 당시 <전남일보>(지금의 <광주일보>)에 근무하는 후배 이훈과 김석학 등을 만났으나 별말을 나누지도 못했다. 그들은 한껏 위축되어 있었고 희망을 잃고 있었다.

나는 혼자서 전남도청과 금남로와 충장로 거리와 불로동 향락촌(이곳 여성들도 김밥을 싸서 시민군에게 돌렸다 했다) 그리고 전남대 정문 앞과 전남대병원을 돌아다녔다. 이를 현장 답사라고 해야 할지. 혼자서 목로주점에 앉아 외로움을 밤을 보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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