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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박완서 선생과 마을 친목회장…소소한 ‘공동체’ 생활 / 이이화

등록 2010-12-01 08:17

1998년께 아치울로 입주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과 함께 마을 친목회장으로 추대된 필자가 2006년 동네 어귀 벚꽃나무 아래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해마다 성황을 이룬 이 마을의 친목행사는 구리시에서 모범사례로 꼽혀 지원을 받기도 했다.
1998년께 아치울로 입주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과 함께 마을 친목회장으로 추대된 필자가 2006년 동네 어귀 벚꽃나무 아래서 잔치를 벌이고 있다. 해마다 성황을 이룬 이 마을의 친목행사는 구리시에서 모범사례로 꼽혀 지원을 받기도 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6
1982년 아치울에 정착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때리지 않겠다는 게 내 신조였다. 나의 아버지는 훈육의 한 방법으로 매를 들었지만 시대가 다르니 내 교육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들(응일)을 때린 적이 한번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더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왜 버스를 타지 않고 그 먼 거리를 걸어왔느냐고 묻자, 하굣길에 어떤 아이가 돈을 달라고 해서 버스삯을 털어주고 걸어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뺨을 때리고 “동무에게 빌리거나 집에 전화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융통성이 없다고 여겨 화가 났던 것이다.

두 아이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개울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볼 때면, 내 어릴 적 이리 묵동과 대둔산과 안면도에서 놀던 생각을 떠올리면서 ‘너네들이 크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두어 가지를 일러주었다. 동네 어른들을 보면 꼭 인사할 것, 휴지 따위는 길가에 버리지 말고 들고 와서 집이나 동네 쓰레기통에 버릴 것, 차를 타고 내릴 때나 길을 걸을 때 교통질서를 잘 지킬 것 등이다. 또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돌아갈 때에도 대문 앞까지 가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라고 일렀다.

아이들은 신통하게도 내 가르침을 잘 지켰다. 물론 훗날 더 얘기를 하겠지만, 애비를 닮아서인지 더러 가출을 해서 속을 끓이게 하기는 했다. 아무튼 그래서 제 엄마는 빨래를 하다가 주머니에서 휴짓조각을 찾아냈고 가끔 세탁기에 그대로 돌렸다가 휴지를 빼내느라 불평을 하기도 했다. 딸아이가 동네에 나가면 할머니들이 사탕이나 과자를 주면서 유달리 귀여워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동네는 자연 교육장이었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였던 셈이다.

장모님은 자연환경이 좋은 이곳 우리집에 오기를 즐기셨다. 나는 늙은 사위 노릇을 잘하려면 장모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게 ‘장땡’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사위 앞에서라도 편안하게 지내시라고 늘 당부를 했다. 장모님은 “자네 앞에서만 파자마를 입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마음을 놓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장모님은 유복하게 자란 덕분인지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다. 사람들이 식당을 차리면 손님이 들끓겠다고 농담을 걸면 웃곤 했다.

아무튼 각설하고, 아치울에 차츰 이주민이 늘어나자 아랫마을 원주민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작은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나는 ‘토박이’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틈이 나면 회갑잔치나 생일잔치에도 끼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뒤 98년에는 오래전부터 나한테 한문을 배우러 다니던 박완서 선생이 아예 이 마을 주민으로 합류했다. 우리집에서 몇 집 건너에 집을 마련했다. 박 선생이 들어오자 ‘문화마을’이란 소문이 더 널리 퍼져 여러 차례 신문과 방송에 ‘문화예술인 마을, 주거 환경이 좋은 마을’로 소개되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화목을 다지고자 ‘아치울친목회’를 만들고 박 선생과 나를 공동회장으로 추대했다. 회비를 모으고 찬조를 받아 마을 앞 흐드러지게 핀 벚꽃나무 아래서 동네잔치를 벌였다. 그야말로 동네 주민이 한마당을 이루었다. 이게 우리 전통의 ‘두레 공동체’ 삶이 아닐까? 나는 동네 주민 10~20명과 함께 휴일 아침이면 아차산 뒤편의 망우리 언덕에 있는 한용운·방정환·지석영 선생의 묘소를 답사하기도 하고 동구릉의 건원릉 등을 둘러보기도 하고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지를 찾기도 했다.

어쨌든 아치울의 생활은 나를 전두환 정권의 압박감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친구들도 가족을 데리고 자주 찾아왔다. <뿌리깊은나무>에서 근무하던 설호정·김철 부부와 김형윤 주간도 틈틈이 놀러 왔다. 원고를 청탁하러 오는 잡지사 기자와 프로그램 제작을 하려는 방송사 관계자들도 찾아왔다. 86년 내가 역사문제연구소 설립에 참여한 뒤로는 손님이 더 많아졌다. 아내는 밥을 하고 안주를 장만해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어느날 친구 황승우는 우리 집에 왔다가 타고 다니던 ‘브리사’ 승용차를 주고 갔다. 자신은 수도하러 산에 들어가니 차가 필요치 않다고 말하면서, 시내 나다닐 때나 아이들 학교 오갈 때 태워주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아내가 운전을 배워 교통의 불편을 덜게 되었다. 비록 전원생활이라기에는 번잡했지만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은가. 그래서 아치울에서 25년 동안 살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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