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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성심여대 강의하며 젊은 국사연구자들과 교류 / 이이화

등록 2010-12-02 08:51

경기도 구리 아치울의 집에 있던 필자의 서재. 공간이 좁아 ‘한국사’ 관련 책 1만여권을 도서관처럼 책꽂이를 줄로 세워 정리해 놓았다. 1980~90년대 인터넷이 없던 시절 필자가 성심여대 등에서 강사 노릇을 할 때 도서관에 가는 불편을 덜어준 소중한 자산들이다.
경기도 구리 아치울의 집에 있던 필자의 서재. 공간이 좁아 ‘한국사’ 관련 책 1만여권을 도서관처럼 책꽂이를 줄로 세워 정리해 놓았다. 1980~90년대 인터넷이 없던 시절 필자가 성심여대 등에서 강사 노릇을 할 때 도서관에 가는 불편을 덜어준 소중한 자산들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37
아치울에 정착한 1982년 가을 무렵 안병욱 교수가 성심여대 국사학과에 출강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한국사상사’ 과목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불편하겠지만 나와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내가 북벌론이나 척사위정론 등의 논문에서 유교사상과 관련되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 강좌를 맡긴 것이다. 나는 좋다고 동의했다. 강의를 하게 되면 무엇보다 젊은 국사 연구자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이 마음을 끌었다.

당시 아치울은 성심여대가 있는 역곡과는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치울에서 버스를 타고 강변역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신도림역에서 환승을 해 역곡역에 내려서 다시 택시를 타는 코스였다. 가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지만 아주 불편했다. 하지만 학교에 도착하면 즐거웠다. 마침 국사학과에는 선임자인 유승원·이순근 교수가 있었고 이어 안병욱·박종기 교수가 있었다.

나는 한국사상사를 강의하면서 흔히 하듯 유교 중심으로 하지 않고 불교, 도교 그리고 신흥종교의 사상까지 포괄했다. 청강생이 모두 3학년 이상 여학생이었는데 재미라고는 한푼 없는데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한 학기를 마치고 나면 최소한도 한국 사상의 기본 흐름을 일러준 정도는 되었다.

내 나름의 두어 가지 수업 원칙도 지켰다. 우선 출석을 철저하게 점검했다. 당시 교내에서 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것도 점검하는 꼴이 되었다. 다음으로 시험지를 철저하게 다루었다. 나는 절대평가를 선호했지만 학과에서는 상대평가를 하되, 에프 학점(낙제)만은 조심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일정 비율로 에프 학점을 주었다.

그때 학생회 간부 등 운동권 학생들은 강의에 출석도 거의 하지 않았고 시험도 보지 않았다. 나에게서 에프 학점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였다. 하나는 일정한 비율로 출석할 것과 시험을 일단 보고 답안지에 자기 감상 또는 왜 강의에 빠졌는지 정도만 적어 놓아도 에프 학점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험에 응시는 하면서 이름만 써놓을 때는 에프 학점을 주는 게 내 원칙이었다.

10여년 동안 이 원칙을 끝까지 지켜서 당사자인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교수들로부터는 너무 ‘까장’하다는 평판도 들었다. 그러면 내 대답은 ‘민주운동 하는 이름만으로도 영광스러운데 학교 성적도 좋다는 것이 오히려 명예가 되지 않는다. 성적이 나빠야 정상이다’라고 말해주었다. 이 변명이 옳을까?

또 한가지, 성심여대에서는 학생들에게 ‘교수님’ 대신 ‘선생님’으로 부르게 했다. 교수는 직책이지 스승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는 뜻에서 이렇게 부르게 한 것이다. 물론 교수들 중에는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내가 고등학교 선생이냐?’고 퉁명을 주며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학교수를 교수님이라 불러야 한다면 초등·중등 교사들에게는 ‘교사님’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바른 호칭이었다. 나는 이런 점에서도 호감이 갔다.

내 강의시간은 오후에 배정되어 있어서 강의가 끝나고 나면 바둑을 좋아하는 유 교수와 한판을 겨룬 다음 역곡역 근처로 나와 저녁밥과 술을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는 재미도 쏠쏠했다. 또 강사로 유홍준과 서중석 교수도 같은 날 강의를 나와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었다. 유 교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우리 늙은 강사들을 접대했다. 그래서 강사들 사이에서는 유 교수를 ‘전담 술상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사실, 저녁 술자리에서 환담이 벌어지면 나 혼자 떠들다시피 했다. 유 교수는 가끔 말을 했지만 과묵한 편이었다. 그런데 내게 견제구를 넣는 사람은 유일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늘 안 교수였다. 내가 얼큰해져서 떠들기 시작하면 안 교수가 곧 가로막고 나섰다. 한번은 안 교수가 다른 자리에서 “이이화를 견제하는 사람은 나뿐이다”라고 뽐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기분이 나쁘거나 화를 낼 수가 없어 웃어버렸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개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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