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7월24일 첫번째 ‘역사강좌’가 열린 서울 안암동 한길사 사옥 강의실에 수강생들이 꽉 들어찼다. 이때 대표 강사로 활약한 필자의 단골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훗날 역사문제연구소가 꾸려졌다. 한길사 제공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2
한길사에서는 역사기행에 한달 앞선 1985년 7월부터 역사강좌를 운영했다. 나는 민중의식이나 민중봉기와 같은 주제를 내걸고 이 강좌에 나섰다. 서울 안암동 한길사 사옥의 좁은 강의실에는 늘 30~40명 정도의 청중이 꽉 들어찼다. 당시 시대를 고민하는 인사들이 몰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윤영전(소설가·민주운동가)을 비롯한 청년층과 조한혜정(연세대 교수) 같은 소장 학자들이 단골 청중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버릇처럼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하며 떠들어댔다. 모두 정열이 넘쳤던 시절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86년 역사문제연구소가 발족한 뒤에는 자연스레 그 중심이 옮겨갔다.
그러는 사이 제법 책도 활발하게 펴냈다. 첫 책인 <허균의 생각>으로 유명세를 탄 덕분에 <월간중앙>에 연재한 ‘한국의 파벌’도 83년 어문각에서 출간했다. 월간지 <한국인> 등에 쓴 글을 모아 <역사와 민중>(1984·어문각), <한국민중의 삶과 저항의 역사>(1986·한길사)도 냈다. 또 <삶과 꿈> 등에 연재한 인물 약전을 모아 <한국 근대인물의 해명>(1985·학민사), <인물 한국사>(1988·한길사), <역사인물 이야기>(1989·역사비평사) 등을 연달아 냈다. <한문 1>이 고교 검인정 교과서로 채택된 뒤 우리식 한문 문법책을 내라는 요청을 받고 <한문강좌>(1988·한길사>도 냈다. 이 책은 한문 문법을 영어와 비교해 놓았고 예문으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등 논설과 <춘향전> 등 한국의 작품을 인용했다. 그런 아이디어 덕분인지 80년대까지 내 저술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많았다. 여러 매체에 쓴 글을 책을 내기 위해 모으다 보니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고 흐름도 일관되지 못했다. 분량도 별 기준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 저술에는 발굴의 성격이 강한 주제와 내용이 많았다. 이미 알려진 역사 사건이라도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가했다. 특히 지리산이나 구월산 일대에서 활동한 변혁세력의 활동을 새롭게 조명했다. 또 인물사에서는 흔히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들을 재평가했는데, 광해군·강홍립·정여립·정인홍 등 임금이나 벼슬아치들,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 의적 또는 이필제·전봉준 등 동학세력들, 신돌석·장지필 등 평민 의병장이나 백정 인권운동을 벌인 기층민중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이전까지 한국사에 ‘아웃사이더’로 다루어져 왔었다.
사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자기네 조상이든 사돈네 팔촌이든 인물에 관심이 많다. 잡지에서도 인물 얘기를 써달라는 청탁이 많았다. 나는 인물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또 기존의 서술들이 사실과 다른 사례가 많았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정여립과 정개청·정인홍만 해도, 민간 전설은 풍부하게 남아 있었으나 기록과 어긋난 사실이 많았다. 의병 활동을 가장 빛나게 전개한 신돌석에 대해서도 왜곡된 사실이 많았다. 기존의 기록에 “신돌석은 머슴 출신의 상놈 의병장”이라 했다. 아마도 이름이 그런 계층처럼 보였겠지만 신돌석의 본명은 ‘태호’로 평산 신씨의 중농집에서 태어나 글도 익힌 지사였다.
아무튼 인물 이야기를 잡지나 신문에 발표하면 뜨거운 반응이 날아왔다. 물론 오류를 지적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항의와 칭송이 엇갈려 있었다. 그래서 아내는 한때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전화받기를 꺼린 적도 있었다.
첫째 항의하는 부류는 당연히 부정적으로 그렸을 때였다. 내가 설명을 해줘도 역정을 내면서 “우리 집안에 검·판사가 몇 명인 줄 아느냐? 당신 정도는 명예훼손죄로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위협하는 유형이었다. 또 어린이운동가인 방정환에 대해 생활이나 옷차림이 사치스러웠다는 표현을 두고 “성인 같은 분을 모독했다”고 고발하겠다고 통고하기도 했다.
둘째는 자기 조상을 제대로 평가해준 데 대해 고마워하는 이들이다. 고려 때 원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선 장수 김방경의 후손들은 방학 때 수백명의 학생을 모아 그의 업적을 강의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나는 그를 원나라 간섭에서 고려의 백성과 조정을 지키려 노력한 인물로 그렸는데, 박정희 정권 때 이선근(초대 정신문화연구원장) 등은 원나라에 항거한 삼별초를 민족 주체로 미화하면서 그를 반역자 비슷하게 깎아내렸던 것이다. 아무튼 10여년에 걸쳐 낸 책들이 스테디셀러가 된 덕분에 일정한 인세 수입이 들어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서중석 교수(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역사 관련 글과 책을 써서 먹고산 사람은 이이화밖에 없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르겠지만….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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