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7월9일 서울에서 영결식을 한 뒤 고향 광주로 내려간 이한열 열사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릴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이날 장례행렬을 따라 내려간 필자는 수십만이 운집한 금남로의 인파 속에서 추모와 시위를 함께 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8
1987년의 잊을 수 없는 사건, 곧 6월항쟁이다.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죽은 사건이 폭로됐다. 1월20일 서울대 영결식에 이어 2월27일 박군의 고향 부산에서 추도식이 열리며 전국이 들끓었다. 집회에 운집한 민주시민과 학생들은 직선제 개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전두환은 4월13일 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떠벌렸다. 이에 민주인사들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학생 조직과 연대해 총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쓰러진 뒤 7월5일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숨졌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민정당은 6월10일 전두환의 지지를 받은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고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한층 거센 시위가 일어났다.
6월10일, 그날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시위대를 따라다녔다. 시민들과 함께 물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때로는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만들어 시위 학생들에게 공급했다. 거리와 골목마다 전투경찰의 ‘닭장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또 경찰차마다 최루탄을 가득 싣고 있었다. 이한열군 추도식과 규탄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러자 최루탄·사과탄·지랄탄이 연달아 날아왔다. 연도의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잠시 흩어지면 성공회 교회를 중심으로 종소리가 울렸고 남대문과 종로 쪽의 교회에서도 종소리가 들렸다. 또 지나가던 버스·택시·승용차들도 일제히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다. 곧 저항의 함성이었다.
나는 최루탄 세례를 피해 남대문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같이 있던 임헌영 선생이나 최장집 교수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도 없었다. 시장 상인들은 마스크를 하고 물안경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학생인 줄 알고 먹을 물과 사이다를 따라주었다. 상인들은 학생들에게 김밥·과자·수박 같은 먹을거리도 아낌없이 던져주었다. 골목에서 다시 남대문 쪽으로 나오니 파출소가 보였다. 파출소 안을 기웃거려 보니 경찰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문은 잠겨 있었다. 몇몇 시민들이 벽돌을 들어 유리창을 깨뜨리려 하자 나는 애써 말렸다.
저녁이 되자 나는 시위대를 따라 동대문 쪽으로 갔다. 밤늦은 시간까지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는데 나는 골목에서 몸을 숨긴 채 계속 동정을 살폈다. 새벽 무렵에야 택시를 타고 아치울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나를 보고도 안심하는 듯했다. 이튿날 들으니, 학생과 시민들 1만여명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벌였다. 나만 그 정보를 몰라서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때도 나 혼자 겉돌고 있었던 셈이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다. 6월26일에는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절정에 이르러 민정당 당사 등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경찰도 부상자를 많이 냈다. 마침내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안을 비롯한 이른바 시국수습방안을 제시했다. 백기항복을 한 셈이어서 우리는 승리자처럼 환호했다.
이렇게 6월항쟁은 마무리되었지만 모든 사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해 7월9일 연세대에서 이한열군 장례식이 열렸다. 단상에서는 문익환·백기완 등 지도부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연달아 들렸고 이한열군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의 울부짖음은 우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장례식이 끝날 무렵 재빨리 교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문 앞에서는 이애주 교수가 구슬픈 표정으로 넋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애주의 춤을 여러 현장에서 보아왔지만 그날은 유달리 신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설호정·김철 부부 그리고 <샘이 깊은 물>의 기자 몇 명과 장례행렬을 따라 광주까지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행렬을 따라 시청 앞으로 왔더니 백만을 헤아리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승용차로 어렵게 장례행렬을 따라 광주 금남로까지 따라갔다. 도청 앞 금남로에서 벌어진 노제 때 나는 압사할 뻔했다. 기운이 모자란 나는 인파를 벗어나 광주일보사 건물 벽에 붙어 있었다. 밀고 밀리는 속에서 용케 버티던 나는 망월동 묘지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숙소를 정한 뒤 시내 동정을 살폈다.
밤까지 학생 시위가 이어져서 경찰과 밀고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혼자서 금남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위를 지켜보았다. 곤봉을 든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몰아가다가 나를 보고 손으로 밀치면서 “할아버지는 들어가세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참고 참았던 분노를 토해내듯 “네놈들은 애비도 없냐, 이렇게 때리다니!”라고 소리쳤다. 경찰이 지나가고 난 뒤 나는 혼자서 싱겁게 웃었다. 사실 때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밤까지 학생 시위가 이어져서 경찰과 밀고 밀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는 혼자서 금남로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서 시위를 지켜보았다. 곤봉을 든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몰아가다가 나를 보고 손으로 밀치면서 “할아버지는 들어가세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참고 참았던 분노를 토해내듯 “네놈들은 애비도 없냐, 이렇게 때리다니!”라고 소리쳤다. 경찰이 지나가고 난 뒤 나는 혼자서 싱겁게 웃었다. 사실 때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이화 역사학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