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9월 창간된 <역사비평>은 독자들의 큰 호응 속에 시사 계간지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해 열린 편집 보고회에 고문과 편집위원들이 함께했다. 왼쪽부터 김동춘 교수, 장두환 대표, 김진균 교수(2004년 작고), 필자, 김정기 교수, 조동걸 교수, 원혜영 의원 등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49
‘6월항쟁’의 열기 속에서 1987년 전반기를 보낸 역사문제연구소 사람들은 민주화의 희망으로 고무되어 또 일을 벌였다. ‘역문연’의 기관지 또는 표현지로 <역사비평>을 간행하기로 한 것이다. 서중석·방기중 등 연구자들 중심으로 학술논문만이 아니라 시사문제를 다룰 계간지를 간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경기도 안성 청룡사 등 여러 곳에서 회합을 하면서 목차와 내용을 구성했다. 자금원으로 당시 풀무원식품을 설립해 운영하던 원혜영(국회의원)을 영입했다. 그는 우리의 뜻에 전적으로 찬동해 기꺼이 ‘역사비평’의 대표를 맡았다.
‘역사비평’은 역문연 사무실이 있는 서울 사직동 체신노조회관 부근에 사무실을 별도로 내고 연구자인 한상구가 편집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 편집위원으로는 강만길·조동걸·김진균·이이화·서중석·이균영·김광식 등 중견과 소장을 섞어 짰다. 대부분 한국사 전공자였다. <역사비평> 창간호에서 표방한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제 사회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는 역사의 새로운 도정에서 더이상 한국 근현대사 연구는 고원한 상아탑에서만 머무를 수 없고 또한 교도적으로 대중에게 주입될 수만은 없다. 이제 한국 사회와 한국 역사의 주체인 민중은 자기 자신의 역사지식을 회복해야 될 때이다. 역사비평은 새로운 역사인식의 대중적 확립을 바라는 모든 이의 것이 되고자 한다”라고 했다. 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의지로 출발한 것이다.
창간호에는 미군정의 성격과 민족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고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운동사나 노동운동사나 민족해방운동사 등에 관련된 논문을 실었다. 불온하게 보려면 얼마든지 불온하게 볼 수 있는 주제들이었으나 민주화 열기를 타고 아무 탈 없이 넘어갔다.
나는 ‘역사소설의 반역사성’이란 글을 실어서 그동안 발표된 동학농민전쟁을 주제로 다룬 역사소설의 내용 오류와 한계를 지적했다. 마침 그 무렵 동학농민전쟁 관련 연구와 답사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있던 나는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이나 유현종의 <들불> 등 소설과 신동엽의 시인 <금강> 등을 분석했다.
사실 청소년 시절 소설가를 꿈꾸었던 나는 역사가로 방향을 바꾼 뒤에도 문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했다.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사실과 다른 오류를 발견할 때마다 안타까웠다. 그 보기를 몇가지만 들어보자.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임꺽정이 백두산에 들어가서 고구마를 재배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조선 전기에는 아직 고구마가 우리 땅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는 시대 배경이 조선 전기 연산군 시절이었는데 후기에 쓴 정철의 가사 <장진주사>가 나온다. 희곡 <맹진사댁의 경사>에는 양반 조상을 자랑하는 대목에 “예문관 대제학, 홍문관 대제학이요, 성균관 대제학이라”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성균관에는 대제학이란 직책이 없고 대사성이란 직책이 있었다. 또 이병주의 소설에서는 “허균은 서자여서 벼슬이 참찬에 이르러 더 올라가지 못했다”고 쓰고 있는데, 허균 자신은 서자가 아니었고 다만 서자들의 후원자였다. 게다가 참찬이란 벼슬은 품계로는 적어도 판서급 이상의 고위직에 해당한다.
앞서 나는 <뿌리깊은나무>에 황석영의 <장길산>에서 의적 장길산이 도시에 내려와 요릿집을 드나들면서 기생과 어울리고 요리를 시켜 먹는 장면을 두고, 설정의 무리함을 지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작가가 심하게 반격을 해서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그때만 해도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에는 이보다 더 심한 오류가 많았다. 조선 전기가 시대 배경인데 후기 또는 개항기에나 들어온 시뻘건 배추김치, 담뱃대, 호롱불 등을 등장시키는 식이었다. 내가 틈틈이 이런 현상을 지적한 까닭에 여러 매체에서 청탁도 많이 들어왔다.
독자들의 반응은 늘 엇갈렸다. 문학이고 예술작품이니까 관대하게 보아줄 수도 있다는 쪽과 작가들이 고증에 더 철저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히려 다수는 작가의 편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허구의 설정이라 해도 역사인식의 대중화를 위해 바로잡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흐름만은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독자들의 반응은 늘 엇갈렸다. 문학이고 예술작품이니까 관대하게 보아줄 수도 있다는 쪽과 작가들이 고증에 더 철저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오히려 다수는 작가의 편을 들어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허구의 설정이라 해도 역사인식의 대중화를 위해 바로잡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흐름만은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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