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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한겨레’ 창간 주주로 참여…‘동학 인물 열전’ 연재 / 이이화

등록 2010-12-22 09:57수정 2010-12-23 16:06

1988년 11월5일 서울 신촌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재경 당시 한겨레신문사 부사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대표한 필자도 최장집(왼쪽) 교수와 더불어 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1988년 11월5일 서울 신촌 이화여대에서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창립대회’에서 임재경 당시 한겨레신문사 부사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역사문제연구소를 대표한 필자도 최장집(왼쪽) 교수와 더불어 협의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51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하나 있다. 바로 자유언론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민주언론투쟁을 해오던 여러 해직기자들이 독자적으로 매체를 확보하려는 운동을 시작했다. 나 역시 그해 가을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의 움직임에 무척 고무되었다. 그래서 ‘새 신문’ 창간 발기인에 참여했고 제호를 정하는 설문조사에 응해 ‘한겨레신문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나는 친지들에게도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라고 권고하며 주주 모집 신청서를 건네주기도 했다. 신청서를 보더니 아내는 마침 집을 지으려고 사놓았던 쪼가리 땅을 판 돈이 있다면서 ‘내 앞으로 20만원, 응일과 응소 앞으로 5만원씩’ 주식을 샀다. <한겨레신문> 2만7000여명의 창간 주주, 50억원의 자본금 속에 우리 가족도 소액이나마 기여한 것이다. 그때 초등학생이었던 응일이와 유아였던 응소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준다는 생각에 뿌듯했고, 아이들 역시 지금도 한겨레 주주인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마침내 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받아보니 낯익은 이름들이 들어왔다. 송건호 사장, 장윤환 편집위원장을 비롯해 지인들인 조성숙·정동익·최학래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창간호가 나온 뒤 신문사 편집국에 가보았는데 대부분 안면이 있어서 고향 친구들을 만난 듯 정겨웠다. 세계 최초의 국민신문인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탄생했고 독재권력이나 거대자본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언론의 영역을 개척한 효시가 되었다.

한겨레 창간 초기부터 때때로 청탁을 받아 시론 같은 글을 썼던 나는 동학농민전쟁(1894년) 100돌을 앞두고 93년 1년 동안 ‘동학 인물 열전’을 연재했다. 주주로서 톡톡히 ‘본전’을 뽑은 셈이자 내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전북 장수의 산골에서 집필할 때도 우편으로 신문을 구독할 정도였다.

또 하나, 6월항쟁의 흐름을 이어 88년 11월 여러 연구단체를 망라한 학술단체협의회가 공식 발족했다. 역문연은 이들 단체와 약간의 차별성을 보였으나 서로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었다. 학단협은 84년 시작한 한국산업사회연구회를 비롯해 한국정치학회·한국농어촌사회연구회·여성사연구회 등 10개 단체가 협의회 체제로 연합을 이룬 것이다. 분산적 활동을 극복하고 공통분모를 모색하려는 의도였다. 나도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했고, 박호성 교수가 대표 간사를 맡았다.

공식 창립에 앞서 88년 6월3일 한양대에서 이균영·정현백 등이 간사를 맡아 첫 연합 심포지엄을 열었는데 시민·학생 수백명이 참가했다. 모두들 오랫동안 굶주렸던 지적 갈증을 풀고 싶은 열정에 가득 차 보였다. 주제 발표는 충북대 서관모 교수가 했는데 ‘변혁운동의 성격 규명’을 내걸고 새로운 방향 모색을 주장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한양대 언저리 식당에서 벌어진 뒤풀이 자리 역시 열기로 가득 찼다. 제각기 왁자지껄 떠들어댔고 너나없이 교수님, 박사님으로 불리며 흥분했다. 내 앞자리에는 마침 갓 결혼한 박호성(서강대)·윤덕희(명지대) 교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술잔을 연달아 들이켜던 나는 기어코 소동을 일으키고 말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바닥에 대고 오줌을 싸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이 흥건해진 것 같았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하필 신혼부부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이람…. 변영로의 <명정 40년>이 이 수준보다 더 화려했을까?


뒤에 박 교수에게 들으니 “분위기가 너무 좋아 약간 오버했다”고도 하고 “박사니 교수니 하는 따위가 듣기 싫어 우발로 욱해 나온 사태”라고도 했다. 내가 그랬을까? 아무튼 작은 소동으로 치부되었는지 스캔들로 퍼지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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