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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기금마련 서화전 열어 역문연 연구활동 ‘기름칠’ / 이이화

등록 2010-12-27 08:39수정 2010-12-28 09:02

1990년 3월 처음으로 열린 역사문제연구소의 기금 마련 시화전에서는 신학철·홍성담 화백 등 당대 민중문화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무렵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빚었던 신학철씨의 대형 걸개그림 <모내기>.
1990년 3월 처음으로 열린 역사문제연구소의 기금 마련 시화전에서는 신학철·홍성담 화백 등 당대 민중문화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무렵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을 빚었던 신학철씨의 대형 걸개그림 <모내기>.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54
1990년대 들어 역사문제연구소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전두환 정권이 ‘깡패집단’이었다면 노태우 정권은 ‘사기집단’이라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기집단’이 일단 주먹을 자주 휘두르지 않고 말로 어르기 일쑤니 상대하기는 조금 편한 셈이었다. 그래서 역문연은 노 정권 아래에서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역문연은 필동에 자체 건물을 마련한 뒤 새로운 모색을 하고 방향을 찾으려 했다. 먼저 ‘연구기금을 마련하는 서화전’을 기획했다. 그동안 대중 활동을 펴오면서 전문적 연구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러자면 기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동학농민전쟁 100돌 기념사업을 위해서도 기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화전’을 여는 방법을 찾았다. 박원순 변호사에게 계속 기대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고 이사들 회비만 바라볼 수도 없었다. 마침 박 변호사는 휴식기간으로 영국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민주항쟁의 열기를 타고 운동단체나 학술단체에서 너도나도 기금 마련을 위한 서화전을 벌이고 있어서 ‘남획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또 작품을 희사하는 마음으로 사주는 사람이 늘 사주는 꼴이었고 작품도 늘 내는 작가들이 단골로 내주는 모양새였다. 이들 단체에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정부가 보조금을 줄 턱이 없었다. 그러나저러나 마더 데레사 수녀도 ‘기금 마련이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89년 초부터 준비해온 서화전을 90년 3월 마침내 열었다. 준비는 이 방면에 남다른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유홍준 교수가 맡았고 실무는 윤해동·김경대(현재 판사)가 맡아 진행했다. 나는 부소장으로 총괄을 담당했다. 윤해동은 훗날 “이이화·서중석·유홍준 등 세 사람이 많은 기여를 했다”(역문연 회보 13호)고 기록했다.


역시 이적표현물 제작을 이유로 구속당한 홍성담씨의 <민족해방운동사> 연작 중 ‘광주민중항쟁도’
역시 이적표현물 제작을 이유로 구속당한 홍성담씨의 <민족해방운동사> 연작 중 ‘광주민중항쟁도’
유 교수는 선인들의 간찰과 그림을 모으는 일에 나섰다. 민미협 소속의 박재동·신학철·김정헌·여운·임옥상·강요배·홍성담·이철수·최병수 등 화백들의 한국화, 유화, 판화 그리고 장일순·김지하 두 선생의 난초 그림과 신영복 교수, 김성동 작가의 글씨를 모아들였다. 나는 내가 아는 인사들의 작품을 모았다. 곧 임창순 선생, 성균관대의 이우성·이지형 교수, 서울대 법대 박병호 교수, 조규용 선생(한문학자)과 그 제자인 정규철의 글씨 그리고 아치울 때부터 한문서당 제자인 김점선 화가의 그림을 받았다. 원경 스님도 글씨를 내주었다. 이우성 교수는 ‘역사문제연구소’의 한자를 머리글자로 넣은 자작시를 써서 주었다. 대부분 ‘문인 글씨’들이었는데, 프로든 아마추어든, 노장이든 소장이든 가릴 것 없이, 쟁쟁한 명사들이 서로 안면을 보고 작품을 기꺼이 내주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전시장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작가들을 접대하고 작품 파는 일에 나섰다. 내 조카를 비롯해 여러 지인들을 초청해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민중화가 신학철의 그림, 피를 흘리면서 목이 잘린 그림을 보고 외면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운동권 그림’이라는 것이다. 또 여운 화백은 전봉준의 초상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판 작품은 여럿이었으되 금액은 적은 ‘잔챙이들’이어서 들인 노력에 비해 별로 빛은 나지 못했다. 어느날 박 변호사는 후원자를 데리고 와서 한꺼번에 고가의 작품을 팔았고 유 교수는 화랑을 끼고 작품을 넘겨서 액수를 올렸다. 그런데 막상 결산을 해보니, 장두환 <역사비평> 사장과 원혜영 등 역문연 후원자들이 작품을 사주어, 결국은 제 살 깎아먹는 모양새가 되었다. 어찌어찌해서 판매대금은 1억원이 넘었고 작가들에게 작은 사례를 하고 경비를 떨자 8000만원 남짓 남았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 덕분에 연구 활동에 ‘기름’이 돌기 시작했고 다른 단체에서는 우리를 부러워하는 눈치도 보였다.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그런데 첫 전시회의 성공으로 내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 기금, 한국전쟁 희생자 사업기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작가와 지인들을 괴롭히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단골처럼 도와준 작가는 김정헌·여운·임옥상·강요배 등의 화가와 신영복 교수, 채의진 서각가 등이었다. 이분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민권운동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복을 받을진저. 물론 그럴 때마다 나도 아내를 ‘꼬드겨서’ 값이 적게 나가는 소품들을 구입하기도 했는데 오늘날에는 그 작가들이 유명해져서 제법 값이 나간다니 아내에게 조금은 덜 미안한 셈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돈을 가장 많이 모았다는 재벌들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이화 역사학자

※ ‘길을 찾아서’ 50회(12월21일치)에서 ‘내가 서울대 규장각에서 일할 때 강창일 교수는 서울대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아세아문화사에서 한국사 자료 정리를 맡고 있었다’는 내용은, ‘강창일 의원은 당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서울대에서 제적당한 상태로, 75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아세아문화사에서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다’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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