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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남의 땅 휘휘 돌아 백두산에 오르니…안타깝도다 / 이이화

등록 2011-01-03 09:15수정 2011-01-12 14:51

1990년 8월18일 마침내 백두산 천지에 오른 필자(오른쪽)가 중국 기행을 주선하고 동행한 여강출판사 이순동 사장(왼쪽)과 함께했다. 난생처음 한 외국여행이자 중국 답사에서 첫 시도 만에 백두산 북파에 올라서 맑은 천지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1990년 8월18일 마침내 백두산 천지에 오른 필자(오른쪽)가 중국 기행을 주선하고 동행한 여강출판사 이순동 사장(왼쪽)과 함께했다. 난생처음 한 외국여행이자 중국 답사에서 첫 시도 만에 백두산 북파에 올라서 맑은 천지를 본 것은 행운이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59
이번에도 내 주장에 따라 우리 일행 세 사람은 연변대 최정국 도서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훈춘을 거쳐 두만강변 도문(투먼)으로 향했다. 도문에는 당시 인구 7만여명 가운데 조선족이 70%나 살고 있어서 온통 ‘조선 냄새’가 풍겼다. 우리는 맨 먼저 도문의 해관 앞에 놓인 국경의 다리로 달려갔다. 해관 앞에는 푸른 제복에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 청년이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다고 하고 서로 반갑게 악수를 했다. 그는 통일을 빨리 해야 한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주면서 정표이니 받아달라고 말하자 그도 내게 만년필을 쑥 뽑아 주었다. 북쪽에서는 한달치 월급이나 한다는 ‘만경대’ 제품이었다.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다리 중간 북-중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 나는 슬쩍 북쪽 경계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경비병이 깜짝 놀라 제지했다. 그렇게나마 북녘 땅을 밟아본 셈이었다. 다리 건너편은 온성군 남양이었는데 김일성 초상이 큼직하게 보였다. 강변에 세워진 ‘조중변경’ 또는 ‘조중우의’라는 간판이며 두만강 누런 물을 보면서 눈물을 삼키기도 했다. 도대체 이따위 모순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점심때 최 관장은 ‘38주’를 주문하더니 “알코올 38도의 술로 38선을 무너뜨립시다”라고 건배사를 했다. 그는 밤에 마시고 실컷 울라며 38주 한 병도 챙겨 줬다. 우리는 해관초대소(호텔)에서 묵었는데 시내 구경을 하고 들어오니 북에서 몸 팔러 온 처녀애가 빨간 입술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는 듯 아팠다.

방으로 올라온 나는 혼자 38주를 연거푸 들이켜고는 컴컴한 북한 땅과 두만강 물을 바라보면서 실컷 울었다. 무산으로 달리는 숨가쁜 기적소리가 더욱 흐느낌처럼 들렸다. “네 두만강에 묻노라”고 외쳤던 연길의 시인 리욱(이학성)의 ‘옛말’을 따라 읽었다. 또 다른 조선족 시인 임효원이 도문역에서 읊었다는 한 구절에는 그만 목이 메었다. “산 설고 물 설은 타관 천리에 몸이 팔려 울고 가던 누님의 그 얼굴이 서럽게 서럽게 일어서는 산굽이 길”. 이튿날 아침, 옆방에서 잔 안대옥(고대 민족연구소 연구원)은 밤새 내가 한 짓을 눈치챘는지 거듭 말을 걸면서 위로하려 애썼다. 배려가 깊은 젊은이다.


이튿날 8월18일, 일행은 최종 목적지인 백두산으로 내달렸다. 산 넘고 물 건너 백두산 들머리인 이도백하에 이르니, 입구에 ‘장백산 간개(簡介)’라 쓴 안내판이 서 있었다. 그런데 안내글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만주 일대에서 살았던 여러 민족이 장백산을 신령스럽게 받들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조선족 얘기는 쏙 빠져 있었다. 더욱이 조선족 자치주 지역에 세운 것이 아닌가? 나는 씁쓸했다.(훗날 관할 주정부에 항의해 고치기는 했다.)

장백폭포로 향하는 입구로 들어서니 미인송이 빽빽하게 늘어선 속에서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가 탄 차는 스케이트장 앞에서 멈추었다가 풍구를 지나 기상참(특별기상대) 아래에서 멎었다. 여기서부터 10분 남짓 걸어 올라가면 백두산의 정상이요 천지라고 했다. 경사 45도가 넘는 가파른 언덕길을 뒤뚱거리면서 올라갔다.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마침내 천지였다.

“아, 눈이 탁 트인다. 천지, 이 물이 검은가, 푸른가? 크고도 신비롭다. 맑은 하늘, 검푸른 바위, 높고 웅장한 산과 짙고 깊은 물, 자연의 조화가 하나의 위대한 작품을 빚은 것이리라. 우리 일행은 천문봉 아래 약간 펑퍼짐한 곳에 우뚝 섰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를 타거나 걷기 20시간 남짓 만에 오른 산, 북녘 우리 땅을 밟아 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그때 돌아와서 쓴 백두산 감상문의 한 대목을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롭다. 서울에서 백두산까지 140㎞쯤 되는 거리를 제 나라 땅을 거치지 못해, 어림잡아 12배쯤 돌아서 갔으니 하나의 희화일 것이다. 이 무슨 민족사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이화 역사학자
이이화 역사학자

나는 서울에서 가져간 동해 고량주와 오징어를 펴놓고 잔을 올린 뒤 세 번 절을 했다. 술을 천지로 뿌리니 세찬 바람이 술방울을 휘몰아 다시 내 얼굴과 눈에 뿌렸다. 그런데 다른 이들을 보니 태극기를 펼쳐 흔들기도 하고, 제수를 차려놓고 천제(天祭)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뭔가 지나친 행동으로 보였다.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북쪽과 경계를 짓는 천지의 중간을 살펴보고 남쪽에 우뚝 선 장군봉(옛 병사봉)을 바라보기도 했다.

천지 앞에서 한 시간쯤 머문 뒤 내려온 우리는 장백폭포 쪽으로 갔다. 폭포 아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고 솟는 온천물에 삶은 달걀을 까먹기도 했고 소천지를 들러보기도 했다. 밤에는 마침 훈춘에서 온 동포들과 어울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그날 밤 간이호텔에서 묵은 감회는 여기에 다 쓸 수가 없다.

이이화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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