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 민중사 헤쳐온 야인 72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연구는 1945년 해방이 된 뒤에야 조금씩 이루어졌다. 한우근(서울대)·김용덕(중앙대)·김의환(충북대)·김용섭(연세대) 등이 관련 논문을 냈다. 뒤를 이어 정창렬(한양대)·신용하(서울대) 등이 진전된 여러 논문을 발표했다. 필자도 1980년대부터 이 대열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
나는 기존 논문들을 읽고 검토했으며 사료를 모아 분석하기에 열중했다. 유신 시절 박정희 정권이 “우리나라에는 혁명이 두번 있었는데 하나는 5·16혁명이요 두번째는 동학혁명이다”라고 선전하는 소리를 듣고 “이게 도대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어리둥절했다.
또 박정희의 지시로 전봉준의 마지막 전적지인 공주 우금치와 최초의 전승지인 정읍 황토현에 ‘동학위령탑’ 또는 ‘기념탑’을 세운 사실을 알았지만, 이들이 농민전쟁 또는 전봉준을 정권에 이용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나는 유신 시절부터 때때로 골방에서 글을 쓰다 나와 혼자서 가방을 들고 유적지를 답사했다. 이 초기 답사에서 겪은 몇 가지 일화를 적어보자.
버스를 타고 진주에 내린 어느 날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자리잡은 산청군 덕산을 찾아갔다. 덕산장터에 내려서는 과자와 막걸리를 사들고서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사랑방으로 갔다.
나는 노인들에게 지리산 나무꾼인 유계춘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이곳에 숨어 지낸 이필제란 사람에 대해 아느냐, 동학꾼들이 이곳에 모여서 진주로 달려간 얘기를 들어보았느냐, 한국전쟁 때 이곳에 빨치산 근거지가 있었느냐 따위의 질문을 해댔다. 유계춘은 진주민란(삼남농민봉기)의 주역이었고, 이필제는 이곳으로 흘러와서 민중봉기를 꾸미려 한 적이 있었으며, 농민전쟁 당시 이 일대 농민군들이 이곳에 집결해서 그 아래 단성 등지를 거쳐 진주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노인들은 떫은 표정을 지으면서 신통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별로 들을 것이 없겠다 싶은데다 날도 저물어서 그곳을 횅하게 나왔다. 그때는 마을에 여관도 없었다. 그런데 버스 타는 곳에 서 있자니 덕산지서의 순경이 와서는 나를 지서로 데리고 갔다. 그는 내 신분증을 뒤지고 가방도 열게 하면서, 이곳에 왜 왔느냐, 무얼 하는 사람이냐 따위 질문을 해댔다. 나는 진주문화원장인 이아무개에게 연락해 보라고 말했고, 마침 연결이 돼 진주문화원장의 신분 보증을 받고서야 어렵사리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노인들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나를 신고했던 것이다.
정읍 일대의 유적지를 돌아볼 때는 초기 개척자라 할 최현식 선생을 만나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한 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황토현 기념탑의 개막식을 서둘러 열었다. 그런데 전봉준의 딸이라는 한 여성을 박정희 옆에 앉혀놓았단다. 개막식을 끝낸 뒤 그 딸이라는 여인에 대해 알아보니 전봉준이 죽은 3~4년 뒤에 태어난 나이로 확인됐단다.
또 전주에서 들은 얘기로, 전두환이 황토현기념관의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전주로 와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전봉준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내가 이루었다”고 떠벌렸다 한다. 곧 전봉준과 전두환은 같은 천안 전씨이니 ‘할아버지’라는 표현은 꼭 틀렸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과연 전봉준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신이 이루었을까?
‘농민군 3대 지도자’로 꼽히는 김개남의 손자인 김환옥옹을 정읍 산골마을인 지금실로 어렵게 찾아갔다. 김환옥옹은 나를 보자마자 “뭐하러 왔소? 아파트나 하나 사줄라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방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삼일절마다 학교 운동장 같은 곳에서 기념행사를 하면서 늘 불러내 단상에 앉혀놓고는 행사가 끝나면 점심 한끼도 주지 않고 가라고 한다는 말도 했다. 그는 “뭣하는 짓들이야!”를 되뇌었다. 그분의 살림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보고 다음부터 작은 선물도 사가기도 하고 용돈을 놓아두고 온 덕분인지 뒤에는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외롭게 돌아다닐 적에 서원의 재실이나 마을의 회관에서 잔 적도 여러 번 있었고 밥을 사 먹을 곳이 없어서 굶은 적도 있었다. 또 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해 수십리 길을 걷기도 했다.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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