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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현실 눈감은 채 어떻게 빛과 소금 되겠나”

등록 2011-02-07 08:27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인 함세웅 신부는 1996년 자신이 설립한 기쁨과 희망사목연구원 원장이기도 하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비롯해 이상적 교회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싱크탱크 구실을 자임하고 있다. 함 신부는 이 연구원을 중심으로 원로로서의 경험과 경륜을 후배 사제들의 활동에 보탤 생각이다. 가톨릭 사제는 지위에 따라 만 70살부터 75살 사이에 정년을 맞이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인 함세웅 신부는 1996년 자신이 설립한 기쁨과 희망사목연구원 원장이기도 하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비롯해 이상적 교회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의 싱크탱크 구실을 자임하고 있다. 함 신부는 이 연구원을 중심으로 원로로서의 경험과 경륜을 후배 사제들의 활동에 보탤 생각이다. 가톨릭 사제는 지위에 따라 만 70살부터 75살 사이에 정년을 맞이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사제 인생’ 40년 함세웅 신부
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가톨릭이 수행한 역할은 지대했다. 해방신학 또는 민중신학의 영향 아래 사제들이 보여준 용기와 헌신은 많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용기를, 국민들에게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지학순(1921~1993) 주교를 정점으로 젊은 사제들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해 앞장서고 김수환(1922~2009)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 같은 교회의 수장들이 그들을 암묵적으로 받쳐주었다. 젊은 사제의 대열 맨 앞에는 함세웅(69) 신부가 있었다. 그는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된 이래 38년간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의 대오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촛불시위 지지, 4대강 사업 반대 등의 목소리를 내며 이명박 정부에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는가 하면, 교회 내적으로는 정진석 추기경을 강력히 비판하는 등 원로 사제로서 발언을 계속하고 있다. 마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직을 퇴임한 것을 계기로 그를 만나 그의 ‘40년 사제 인생’을 들어보았다.

그를 만난 곳은 그가 사목하고 있는 서울 중구 청구성당 사제관이었다. 청구성당은 신자가 1800여명으로 서울에서 가장 작은 성당에 속한다고 하는데, 성당 4층에 자리잡은 사제관은 꽤 넓었다. “성당은 제일 작지만, 사제관은 아마 제가 가장 넓은 곳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폭격을 피해 숨어든 성모병원

“저도 이제 일흔, 옛일을 회고할 나이가 되었나요?(웃음) 저는 1942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3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목재상에서 일하시는 분이었고, 가톨릭과는 별 인연이 없는 보통의 유교적인 가정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를 맞았습니다. 피난을 못 가고 서울에 있었는데 어느 날 미군의 비29 폭격기 100여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북한 인민군이 설치한 한강 임시다리와 연료창을 폭파하기 위해) 폭격을 가했습니다. 오전 10~11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 아이들과 놀라서 달아난 곳이 당시 용산 신학교 안 성모병원(지금 성심여고 자리)이었습니다. 분명 집 앞에서 놀았는데 왜 그리로 도망쳤는지…. 그것이 천주교와 친숙해진 첫 번째 사건이었습니다.”

사제의 길로 이끈 공동묘지의 미사

“용산중학교 3학년 때 성당에서 복사(가톨릭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사람)를 맡아 했습니다. 56년 11월2일로 기억합니다. 약현성당 응굽이 묘지(현 논현동)에 갔습니다. 학교도 빠지고 신부님을 따라 위령 미사에 참례한 것인데, 수많은 무덤들이 을씨년스런 바람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과 의문이 싹텄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저의 첫 신앙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기도도 더 많이 하고 성경책도 더 열심히 읽고 나름대로 종교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어보곤 했습니다. 방학 때면 학교에서 돌아와 성당 일을 돕던 신학생 선배들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커지면서 저는 어느 날 신부님을 찾아가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그때 제 고백을 받아주신 신부님이 95살이 되신 조창희 신부님으로 지금 경북 영천수도원에 계십니다.”

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계기로 ‘사제단’ 결성
고 김수환 추기경 등 수장들도 암묵적 동의
“유신철폐 외치자 시민 박수…민중요구 절감”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57년 지금은 없어진 사제후보 양성 기숙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소신학교(대신학교는 가톨릭대학교)라고 불렀지요. 규율이 무척 엄격해 아침 5시 기상해서 9시 반 취침 때까지 단 1분도 빈틈이 없었습니다. 학교 밖은 방학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었죠. 그때 국어를 가르치는 이선구 선생님이라고 계셨는데, 그분은 시험 대신 고전을 몇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오게 하셨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톨스토이의 <부활> 등이었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이런 책들은 당시 가톨릭에서는 금서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숙제라 해도 신부님한테 따로 허락을 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허락을 해준 신부님(김창렬 주교)이 라틴어 시간에 들어오셔서 그래요. ‘너희들이 지금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고 제대로 알겠느냐? 그 작품들은 신학을 배운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때는 뭐 소설까지도 신학을 배워야만 아나? 하는 반발심도 없지 않았습니다만, 나중에 감옥에서 다시 그 소설들을 읽게 되었는데 비로소 주교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어요. 거기에 인간 사회의 선과 악, 죄와 벌, 종교의 부패와 위선, 신과 인간의 싸움… 그런 신학적 주제들이 다 들어 있어요. 지금도 강론할 때 두 작가의 작품을 자주 거론합니다만, 제 신앙생활과 세상, 인간을 보는 눈에 큰 영향을 끼친 작가였습니다. 같이 감옥살이하던 문익환(1918~1994) 목사님과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며 많은 신학적 대화를 나눈 기억이 새롭습니다.”

‘불사조’ 강론의 감동

“대신학교(가톨릭대학)에서 4·19를 맞았습니다. 자유로운 대학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며 세상과 차단된 생활은 비슷했어요. 신문도 여배우 사진 같은 광고를 오려낸 뒤 이틀 뒤에나 학교 게시판에 붙였으니 신문이 아니라 구문이었지요(웃음). 4·19가 나서 혜화동 동성고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 죽고 다치고 해도 밖에 나가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4월26일 낮 기도 시간에 학장 신부님이 ‘오늘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했다’고 하시면서 불사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였습니다. 경무대 앞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청년 학생들이 바로 우리 시대의 불사조들이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해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자… 그러시면서 다 같이 라틴어 감사 찬미가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학장님은 돌아가신 한공렬 주교이셨습니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로마 유학에서 얻은 깨달음

“이탈리아에 가보니 그쪽 사람들은 자기 나라, 자기 지역의 성인들을 신앙생활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저는 왜 우리 교회는 우리의 선열을 신앙으로 받들어 모실 수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한국 교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전근대적인 신앙 이해 방식이 사라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바로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변화의 시기에 신학을 배우고 있었던 거지요. 세상과 함께, 세상에 기초한, 세상을 껴안는 교회가 되고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 육체는 원수가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함께하는 벗이라는 것, 도마(안중근) 같은 신앙적 선구자를 교회 안에서 기억하는 것이 바로 민족과 민족의 역사와 함께하는 올바른 신앙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 김수환 추기경의 눈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응암동 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74년 7월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철권통치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거듭하던 제 또래의 서울, 원주, 인천 지역 사제 30여명이 7월9일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습니다. 지 주교 납치에 대한 저희의 고뇌와 울분을 전하고 교회의 행동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추기경님은 저희 말씀을 묵묵히 들으시는데, 가만히 보니 눈가에 눈물이 보였습니다. 이튿날 명동성당에서 주교님들이 미사를 올리기로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김 추기경의 회동이 이뤄져 추기경님은 청와대로 가시고, 윤공희 대주교님이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대를 고민하는 사제들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모습이 세상보다 더 부끄러울 때 있어
정진석 추기경 비판은 우리안의 자정·회개
“현 정권 비판은 인간구원 위한 사제의 임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하다

“지 주교 사건이 발단이 되어 석달 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만들어졌습니다. 9월23일 원주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서 300여명의 참석 사제들이 사제단 결성에 합의하였고, 24일에는 원주 원동 성당에서 전국 800여명의 신부 중 450명이 서명한 서약서를 제대에 바치고 미사를 올린 뒤 사제단 이름으로 처음 집단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저도 겁이 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란 이름은 하느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이 ‘정의’라는 데서 착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순교복자 축일인 9월26일(지금은 20일) 명동성당에서 정식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탄생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박상래 신부님이 선언문을 작성하셔서 발표하셨지요. 그날 저녁 십자가를 받들고 성당 밖으로 나가면서 유신 철폐, 언론 자유 보장 등을 외치자 성당 앞에 있던 많은 시민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바로 민중의 요구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제단 발족에 앞장서신 분으로는 박상래 신부님을 비롯해 김택암 양홍 안충석 김병상 황상근 신현봉 안승길 송기인 문정현 신부님 등이 기억납니다. 오태순 장덕필 신부 등도 있었고요.”

브로커 없는 하느님의 나라

“정의구현사제단은 70년대는 유신독재와, 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과 맞서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인권 신장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습니다. 사제단의 이런 활동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받은 과분한 평가로 대신하고, 이 자리에선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994년 사제단 창립 20돌 기념 초청강연에서 유대인 신학자 마크 엘리스가 저희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라면 예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제도교회를 어찌 비판하지 않는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the brokerless Reign of God)인데, 지금의 교회에는-가톨릭이든 개신교든- 브로커가 너무 많다… 그때 신선한 충격을 받고 저 자신도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나도 한갓 종교 브로커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교회 밖에서 정의를 외쳤지만, 교회 안의 자정과 회개를 위해서는 많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의 모습이 세상의 모습보다 더 부끄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가톨릭은 너무 밀실주의에 갇혀 있으며, 고식적인 위계질서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 예수님이 지향한 평등평화공동체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을 가지고 자기 정화를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대강 사업 막개발을 지적한 주교회의의 공식결정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사실상 거부한 정진석 추기경을 저희가 최근에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며 의롭지 못한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의노와 사랑의 모습, 곧 두가지 얼굴이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과 불의에 분노하는 예수님은 바로 신앙의 같은 대상, 한 실체의 양면입니다. 성직자들이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굳이 엠비 정권과도 맞서는 이유

“저는 가능한 한 이명박 대통령을 거명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서. 교도소에 있으면서 교도관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때는 교도관들 처우가 아주 낮을 때였지요. 그분들이 제가 신부라고 이런저런 고백도 하고 상담도 청하고 해서 친해지니까 한 분이 그래요.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손님(재소자)이 누군 줄 아냐고. 주먹(조폭)이래요. 단순해서 ‘비둘기 날려주고’(교도소 밖으로 연락해주는 일의 은어) 약간 도움도 주고 하면 돈도 잘 주고 그런답니다. 그런데 절대 안 먹는 돈이 있대요. 사기꾼. 이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돈을 먹으면 반드시 뒤탈이 나기 때문이랍니다. 아무튼 내년 선거에서는 바로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국민 여망을 수렴할 수 있는 정당, 사회단체 등 모든 영역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끝으로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일에서 떠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적 발언과 정치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의 삶과 사회는 정치를 떠나 존속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인간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제의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자 하는데, 어떻게 세상일에 눈감은 채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함 신부와 안중근·김재규의 인연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
함세웅 신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두 인물과 깊은 인연이 있다. 안중근과 김재규이다.

함 신부는 현재 안중근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그가 안 의사 기념사업에 관여한 지도 30년이 넘는다. 기념사업회는 천주교 신자인 안 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집약한 안중근 전집을 6권까지 냈고 올해 안에 완간할 계획이다. 남북관계가 풀리면 북한 쪽과 공동으로 기념사업을 벌일 계획도 갖고 있다. 그러나 보훈처와 조선일보사가 벌이고 있는 유해 봉환 사업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함 신부는 안 의사의 유해가 없거나 설사 있다 하더라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본다. 함 신부는 없는 유해 찾기 소동을 벌이기보다는 안 의사의 정신을 기릴 수 있는 사업을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정신을 받들면 남북 동포 8000만 가슴속이 다 안 의사의 묘소라고 강조했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에 쐐기를 박은 당사자이다. 함 신부는 감옥에 있다가 10·26이 나면서 석방돼 고 이돈명 변호사의 요청을 받고 김재규 구명운동에 가세했다. 이 변호사와 황인철·강신옥 등 변호인을 통해 김재규의 거사 동기, 장준하와 김재규의 인연, 지학순 주교 납치 때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의 회동을 주선한 것도 당시 중정 차장이던 김재규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함 신부는 지금도 10·26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뤄진 ‘기적’이라고 고백하면서, 유신의 핵 박정희를 제거한 김재규 행위의 순수성을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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