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순씨와 부인 이두이씨는 1970년 결혼할 때 이런 약속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나이를 합쳐 100살이 되면 미련 없이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가자고. 이들 부부는 결혼 23년 만에 이 약속을 행동으로 옮겨 십수년 만에 한 해 5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허브농원을 일궈냈다. 허브나라 농원은 주변 펜션에 묵는 사람들에게는 입장료를 깎아주고, 농원 안 식당에서는 메밀국수 등 지역 주민들의 주요 상품은 팔지 않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봉평 허브나라 농원 이호순 원장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쪽으로 가다 면온나들목으로 나가면 흥정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리에 있는 이 아름다운 계곡 안에 ‘허브나라’라는 입장료를 받는 사설 허브농원이 있다. 한 해 5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와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타임 같은 150여종의 허브를 감상하고 간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허브농장인 허브나라 농원은 1993년 이호순(68)·이두이(66) 부부가 귀농해 300여평의 땅에 허브를 심은 것이 계기가 되어 조성되었다. 3만평의 땅에 옥내외 전시공간과 숙박시설, 식당, 허브 관련 상품 판매점 등이 들어 있다. 환경부가 선정한 ‘체험 생태관광지 20선’ 가운데 한 곳이다. 지난해 타계한 법정스님이 오대산에 머물 때면 가끔 들러서 차를 마시고 가는 곳이기도 했다. 이 농원을 일군 이호순 원장을 만나러 흥정계곡으로 차를 몬 것은 잘나가는 기업인이 50대에 농촌에 들어가 아름다운 생태농원을 건설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였다. 농원 사무소가 있는 2층 목조건물은 살아있는 나무를 그대로 기둥 삼아 지은 집이었다. “인상적”이라고 했더니, 주인은 오히려 무안해했다. “딴에는 자연을 사랑한다고 한 일이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보니까 나무를 가둬놓은 게 아닌가 싶은 반성이 들었다. 오가며 저 나무를 볼 때마다 자연이야말로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93년 정착해 4만평 대지에 허브·꽃 가꿔
가족쉼터로 시작…한해 입장객 50만명
“농대생 아내가 주로 작물재배…난 관리” -허브나라 농원 소개부터 부탁합니다. “1993년 이곳에 정착해 이듬해부터 허브를 심었습니다. 150여종의 허브와 각종 꽃들을 재배·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체 규모는 4만평(이 가운데 4분의 1이 재배지) 정도입니다. 매년 조영남·이문세·노영심 같은 분들을 모시고 음악회를 열어 수익금을 평창군내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데 쓰기도 합니다. 2009년에는 환경부 선정 생태관광지 20곳 중 ‘숲과 문화생태계’ 부문에서 문경 새재, 무주 덕유산, 안동 하회마을, 울진 불영계곡, 청원 미동산수목원, 영월·정선 동강과 함께 저희 허브나라 농원이 뽑히는 과분한 영광도 누렸습니다.” -수지는 맞는 편입니까?
“한 해 입장객이 50만명 정도로 매출은 연 40여억원입니다. 입장료 수입이 대부분이죠. 직원은 60여명입니다. 식물은 사람 손이 워낙 많이 가 인건비 비중이 높지요. 다른 허브농장 하시는 분들은 그래 가지고 운영이 되느냐고 걱정을 해주시는 형편입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 이곳에 들어온 게 1993년인데 애초 이런 큰 농원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냥 50줄에 들어선 부부의 신선놀음이었다고 할까요? 애초 취미로 채집하던 허브를 재배해 찾아오는 분들에게 허브차를 대접했는데, 그게 사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이쪽 분야에 공부가 되어 있던 편에 속합니다. 아내가 농대 출신이고, 저 자신도 공대 출신이지만, 반은 농대생이었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부터 농촌에 관심이 많았군요. “어린 시절엔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배를 만드는 과를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고교(전주고) 시절 <사상계> 잡지에서 농촌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류달영(1911~2004) 교수의 글에 매료돼 농대 진학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시 때는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반대로 공대(서울공대)에 진학을 했는데, 도무지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공대보다는 서울농대가 있는 수원에 가서 주로 놀았어요.” -부인이 농대 출신이라 도움이 컸겠습니다. “제가 단순히 농촌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면, 집사람은 처음부터 농업을 깊이있게 공부하려 했어요. 삼수를 해가며 서울농대를 간 것이나, 아이들 다 키우고 마흔 넘어 대학원에 간 것이나, 도시생활 청산하고 귀농을 결행한 것이나, 다 아내의 의지가 주효했어요. 사실 농장에서도 저는 시설관리인에 가깝고, 작물 관리는 아내가 더 전문가입니다. 제가 장가를 잘 간 거죠.” -직장생활은? “공돌이니까 공장에 취직했지요. 1968년 삼성전기에 입사해서 대전공장과 자회사인 청주전자 대표를 끝으로 1993년에 퇴직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귀농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저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가진 꿈이었고, 5~6년 정도를 착실하게 준비했으니까요. 특히 부부가 생각이 같았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전주 출신이신데 어떻게 이곳 흥정계곡에 들어왔나요? “원래 우리 부부 목표는 심심산골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접 살려고 보니 너무 외진 곳은 안 되겠어요. 그래서 ‘서울서 3시간 거리 안의 인적 드문 곳’을 찾다가 대학시절 무전여행을 했던 평창의 흥정계곡을 ‘발견’했지요. 정말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 한눈에 반했어요. 그런 참에 토지 매매 공고가 나길래 친구 네 명을 꼬드겨 시세의 배 가까이를 주고 이 땅을 샀습니다. 나중에 개발비용이 자꾸 들어가는 바람에 친구들은 포기하고 저만 남게 된 거죠.” -처음부터 농원을 크게 할 생각이셨나요? “우선 300여평의 땅에다 조그만 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궈 취미로 채집하던 허브를 심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밥 같이 먹고, 허브차를 마시며 얘기도 하고. 숙박비도 정해진 게 없이 사람 따라 주는 대로 받고. 그때가 전원주택 바람이 한창 불던 때라 우리 부부의 이런 귀농생활이 일부 매스컴에 ‘성공 사례’로 소개되면서 생활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몰려오는 바람에 마을사람들과 이런저런 마찰도 생기다가 급기야는 각종 무허가사업 명목으로 고발까지 당했습니다. 벌금도 700만원이나 물었어요. 하는 수 없이 정식으로 사업 허가를 냈고, 세금을 내야 하니까 최소한의 비즈니스 마인드라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정말 떠밀리다시피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이 농원 안에 세금을 내는 업종이 지금 8개입니다. 허허.” 허브농업은 작물산업 아닌 관광서비스업
손님들에 ‘여유·생기·기쁨’ 선사가 목표
“보고 즐기는 농업, 성공모델 제시하고파”
-허브란 용어는 우리말로 딱 꼬집어 번역하기 어려운 말 같습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허브를 들여온 분은 향약초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허브는 약초만이 아니죠. 약초뿐 아니라 향신재도 허브고, 향긋한 야채도 허브고. 종류는 세계적으로 2500여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토인 서구에서는 오히려 허브가 생소한 말이지요. 파슬리, 세이지, 라벤더, 페퍼민트, 로즈메리, 타임 등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더 익숙합니다.”
-겨울인데도 이렇게 꽃을 피웁니까?
“아니죠. 허브가 원래 지중해 식물 아닙니까? 추운 데서는 안되죠. 온실 재배를 통해 꽃이 한창 핀 것을 가져다 옮겨심어 놓은 겁니다. 식물이란 게 씨 뿌리고 꽃 피우고 시들어 죽는 건데 감상하시는 분들은 그런 걸 잘 인정 안 해요. 겨울에 와도 늘 꽃이 피어 있기를 바라죠. 늘 꽃 핀 놈으로 바꿔 심어야 해요.”
-우리나라 허브산업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 산업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됩니다. 허브의 본 특징인 향신용보다는 화분에 심어 키우는 분재용이나 샐러드용으로 주로 팔리고 있습니다. 재배농가가 30여곳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지요.”
-잘 안되는 이유는 뭘까요?
“가장 큰 이유는 생활 속에 허브가 파고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에서 허브는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지요. 향신료에서 방향제, 식자재, 장식용 등.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향기에 익숙지 않은 문화인 것 같습니다. 차를 마시면서도 향기가 어때가 아니라 맛이 어때, 그러잖아요? 그러다 보니 허브를 다양하게 상품화하는 데 자연 한계가 있습니다. 관광농원도 몇 군데 있는데 사업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많지는 않습니다.”
-허브산업은 일본에서 상품화되었다고 하지요?
“허브라는 말을 대중화시키고 상품화시킨 게 일본 사람들입니다. 서양인들이 허브를 많이 이용하는 걸 보고, 저걸 체계적으로 재배해 다양하게 상품화하면 돈이 되겠다고 착안한 거지요. 서양인들이 마당에 가꾸고 부엌에서 쓰던 걸 대규모 관광농원으로 끌고 나온 겁니다. 세계적인 명소가 된 홋카이도의 라벤더 축제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다 따뜻하고 인건비 싼 남미나 동남아 등지에 위탁재배를 해서 유럽과 미국에 역수출을 하고. 이 사람들이 우리보다 한 20년 빠릅니다. 한창 바람이 불 때는 허브농장이 2000개가 넘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많이 줄었을 겁니다.”
-허브나라 말고도 국내에 대형 허브농원이 더 있지요?
“저희들이 시작은 처음이지만, 규모는 작은 편에 속합니다. 청원의 상수허브랜드, 포천의 허브아일랜드 등이 유명한 허브농장입니다. 그분들은 투철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있어서 운영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연간 입장객이 공칭 80만, 100만이라고 하니까요. 우리 허브나라는 지리적으로 좀 외진 곳에 위치한데다, 저나 저희 가족들이 다 사업적인 마인드가 부족해 장사는 잘 못하는 편입니다.(웃음)”
-현재로는 허브가 작물산업이기보다는 관광서비스농업의 매개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보여주는 농업, 허브나 꽃을 매개로 휴식을 제공하는 농업이 기본 콘셉트입니다. 작물 재배에다 레저 성격을 가미해 농촌 소득을 올려보자는 거지요. 먹거리 중심의 농업이 육체의 양식을 제공한다면, 볼거리 중심의 농업은 마음의 양식을 제공한다고 할까요?”
-관광농업에 대한 정부 지원은?
“관광농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여전히 규제 중심입니다. 예를 들어 불량식품 단속한다고 식파라치 활동을 장려하는데, 그러면 농민들이 특색 있는 가내식품을 더는 개발하기 어렵지요. 원성만 살 뿐입니다.”
-단속과는 별개로 농촌경제를 위해서는 장려가 더 필요하다는 말씀?
“농정당국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농민들에 대한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아직도 20세기 산업국가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아요. 제가 기업인 출신 아닙니까? 그런 제가 볼 때 우리나라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체가 다스리는 나라 같아요. 기업은 선택과 집중을 잘해서 돈벌이 되는 곳에 집중 투자해 이익을 얻는 게 최고의 가치지만, 나라는 선택과 집중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정치의 최고 가치는 어떻게 하면 온 나라 사람들이 골고루 잘살 것인가가 아닙니까? 여기서도 보면 꼭 정치를 기업하듯이 하는 게 보입니다. 허허.”
-허브농원을 하면서 가진 목표라면?
“처음엔 그저 우리 가족들의 쉼터였는데 무슨 거창한 비전이나 목표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2006년 대홍수를 겪으면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그때 물난리로 몽땅 쓸려내려가 농원이 자갈밭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이 찾아와선 언제 다시 문을 여냐고 물어요. 우리가 문 닫고 있으면 지역경제도 가라앉으니. 그때 아, 이 농원이 이제 내 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걸 절감했습니다. 전 직원들과 밤을 새워 가며 흙과 나무, 식물 등을 몇십 트럭씩 실어날라 일주일 만에 농원을 재건했어요. 손님들이 와서는 그래요. 온통 물난리로 야단인데 여긴 멀쩡하네. 그때 속으로 웃으며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허브나라 농원의 비전을 허브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 건강한 삶(Healthy life), 맛깔진 삶(Enjoy the tasty life), 신나는 삶(Refresh life), 아름다운 삶(Beautiful life)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걸 ‘허브스런 삶’이라고 하자고 직원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허브나라에 생계를 의지하는 전 직원과 지역주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터전이 되자,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3R(릴랙스, 리프레시, 리조이스)를 선사하자,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보고 즐기는 농업’의 성공 모델을 제시해 보자. 그때 물난리를 겪은 뒤 그가 나름대로 ‘체계화’한 허브나라 농원의 ‘존재 이유’다.
-농촌에 들어와 산 지 20년이 되어 갑니다. 귀농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처음에는 도시에서처럼 시골에서도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자기 앞가림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걸 놓치고 있었어요. 농촌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걸. 자기를 낮추고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어느 정도는 자기를 드러내고 알려야 하는 게 서로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자,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의 도리라는 걸 한참 뒤에야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민들하고 많이 친해졌겠네요.
“그래서 감투도 하나 썼어요. 봉평전통민속보존회장. 무슨 장 자리는 절대 안 맡는다는 게 제 신조인데, 지역 전통문화를 살리는 일은 마다해선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허브나라 농원의 발전계획이 있다면?
“발전계획 같은 건 없어요. 다만 우리 부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 농원이 청정한 생태농원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걱정하고는 있어요. 식물이 중심이면서 동시에 식물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들의 농원.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우리 부부가 사라지고 없을 때의 허브나라를 준비해 갈 생각입니다.”
가족쉼터로 시작…한해 입장객 50만명
“농대생 아내가 주로 작물재배…난 관리” -허브나라 농원 소개부터 부탁합니다. “1993년 이곳에 정착해 이듬해부터 허브를 심었습니다. 150여종의 허브와 각종 꽃들을 재배·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체 규모는 4만평(이 가운데 4분의 1이 재배지) 정도입니다. 매년 조영남·이문세·노영심 같은 분들을 모시고 음악회를 열어 수익금을 평창군내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데 쓰기도 합니다. 2009년에는 환경부 선정 생태관광지 20곳 중 ‘숲과 문화생태계’ 부문에서 문경 새재, 무주 덕유산, 안동 하회마을, 울진 불영계곡, 청원 미동산수목원, 영월·정선 동강과 함께 저희 허브나라 농원이 뽑히는 과분한 영광도 누렸습니다.” -수지는 맞는 편입니까?
“한 해 입장객이 50만명 정도로 매출은 연 40여억원입니다. 입장료 수입이 대부분이죠. 직원은 60여명입니다. 식물은 사람 손이 워낙 많이 가 인건비 비중이 높지요. 다른 허브농장 하시는 분들은 그래 가지고 운영이 되느냐고 걱정을 해주시는 형편입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요? “처음 이곳에 들어온 게 1993년인데 애초 이런 큰 농원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그냥 50줄에 들어선 부부의 신선놀음이었다고 할까요? 애초 취미로 채집하던 허브를 재배해 찾아오는 분들에게 허브차를 대접했는데, 그게 사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이쪽 분야에 공부가 되어 있던 편에 속합니다. 아내가 농대 출신이고, 저 자신도 공대 출신이지만, 반은 농대생이었으니까요.” -학교 다닐 때부터 농촌에 관심이 많았군요. “어린 시절엔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배를 만드는 과를 가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고교(전주고) 시절 <사상계> 잡지에서 농촌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던 류달영(1911~2004) 교수의 글에 매료돼 농대 진학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입시 때는 부모님과 담임선생님의 반대로 공대(서울공대)에 진학을 했는데, 도무지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공대보다는 서울농대가 있는 수원에 가서 주로 놀았어요.” -부인이 농대 출신이라 도움이 컸겠습니다. “제가 단순히 농촌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면, 집사람은 처음부터 농업을 깊이있게 공부하려 했어요. 삼수를 해가며 서울농대를 간 것이나, 아이들 다 키우고 마흔 넘어 대학원에 간 것이나, 도시생활 청산하고 귀농을 결행한 것이나, 다 아내의 의지가 주효했어요. 사실 농장에서도 저는 시설관리인에 가깝고, 작물 관리는 아내가 더 전문가입니다. 제가 장가를 잘 간 거죠.” -직장생활은? “공돌이니까 공장에 취직했지요. 1968년 삼성전기에 입사해서 대전공장과 자회사인 청주전자 대표를 끝으로 1993년에 퇴직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귀농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저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가진 꿈이었고, 5~6년 정도를 착실하게 준비했으니까요. 특히 부부가 생각이 같았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전주 출신이신데 어떻게 이곳 흥정계곡에 들어왔나요? “원래 우리 부부 목표는 심심산골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접 살려고 보니 너무 외진 곳은 안 되겠어요. 그래서 ‘서울서 3시간 거리 안의 인적 드문 곳’을 찾다가 대학시절 무전여행을 했던 평창의 흥정계곡을 ‘발견’했지요. 정말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워 한눈에 반했어요. 그런 참에 토지 매매 공고가 나길래 친구 네 명을 꼬드겨 시세의 배 가까이를 주고 이 땅을 샀습니다. 나중에 개발비용이 자꾸 들어가는 바람에 친구들은 포기하고 저만 남게 된 거죠.” -처음부터 농원을 크게 할 생각이셨나요? “우선 300여평의 땅에다 조그만 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궈 취미로 채집하던 허브를 심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으면 밥 같이 먹고, 허브차를 마시며 얘기도 하고. 숙박비도 정해진 게 없이 사람 따라 주는 대로 받고. 그때가 전원주택 바람이 한창 불던 때라 우리 부부의 이런 귀농생활이 일부 매스컴에 ‘성공 사례’로 소개되면서 생활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엄청 몰려오는 바람에 마을사람들과 이런저런 마찰도 생기다가 급기야는 각종 무허가사업 명목으로 고발까지 당했습니다. 벌금도 700만원이나 물었어요. 하는 수 없이 정식으로 사업 허가를 냈고, 세금을 내야 하니까 최소한의 비즈니스 마인드라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더군요. 정말 떠밀리다시피 사업을 하게 된 거지요. 이 농원 안에 세금을 내는 업종이 지금 8개입니다. 허허.” 허브농업은 작물산업 아닌 관광서비스업
손님들에 ‘여유·생기·기쁨’ 선사가 목표
“보고 즐기는 농업, 성공모델 제시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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