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및 전국유족협의회의 정기총회를 마친 뒤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 다섯째부터 채의진, 필자, 김영훈, 서영선씨 등이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08
이 대목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에서 함께 활동한 전국유족협의회 회원들의 애절한 사연을 소개해야겠다.
김광호씨 집안은 3대에 걸쳐 수난을 겪었다. 할아버지 김정태 선생은 경남 진영 출신으로 3·1 운동 때 옥고를 치른 민족운동가였는데 한국전쟁 무렵 보도연맹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했다. 이때 258명의 피학살자 주검은 진영창고에 묻혔다. 4·19 혁명 뒤 광호씨의 부친 김영욱은 이 혐의를 벗기려고 주검을 발굴해 화장을 하고 납골묘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부친은 5·16 이후 이적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됐고 납골묘는 부서져버렸다. 가장이 2년7개월의 옥고를 치르는 동안 살림은 거덜이 났고 가족들은 거지꼴이 되고 말았다. 부친은 출옥한 뒤 와세다대학 중퇴의 학벌을 갖고도 취직을 할 수 없었고 물려받은 재산도 한 푼 건질 수 없었다. 부친은 늘 검속을 받았고 배추장사 따위로 겨우 연명하느라 자식들을 학교에도 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부친은 끊임없이 할아버지의 ‘빨갱이 누명’을 벗기려고 애를 썼고 1986년 마침내 조부 김정태는 대통령 훈장과 건국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부친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을 계속했으며 다른 유족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부경유족회 회장과 전국유족협의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2004년 5·18재단에서 주최하는 국제인권 관련 행사에 증언자로 참석하러 광주에 갔던 부친은 숙소의 계단에서 실족해 투병하던 끝에 세상을 떠났다. 광호씨는 부친의 대를 이어 유족회 활동에 나섰고 차츰 인권운동가가 됐다.
박봉자씨의 아버지는 48년 여순사건으로 호남지역에 특별계엄령이 내렸을 때 경찰서에 끌려간 이후 지금까지 실종 상태다. 아버지가 임실경찰서에서 트럭에 실려 구례 쪽으로 끌려갔다는 풍문을 들었을 뿐이다. 한국전쟁 때 여맹원 활동을 했던 어머니마저 9·28 서울수복 뒤 시부모와 자식들을 시골로 피신시키고는 입산했다. 그 열달쯤 뒤 안내원을 따라가서 잠시 함께 지낸 게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51년 3월18일 임실군 청우면 남산리 폐광굴 일대에서 군경 합동 ‘공비’ 토벌 작전이 전개됐을 때 임실군 운암면 일대에서 어머니가 갈기갈기 찢긴 채로 경찰들에게 끌려다니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씨는 52년 어린 동생들과 할아버지·할머니를 다시 만나긴 했지만 남의 집에서 밥을 해주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심부름하러 갔던 한 개인병원에서 10년을 주경야독하며 간호 일을 배웠다.
서영선씨의 아버지 서정구는 교장·장학사를 지낸 교육자였는데 9·28 수복 이후 행방불명이 됐다. 그의 어머니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반공청년단체인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끌려가 고문 끝에 학살당했다. 치안대 청년들에 의해 저질러진 할머니·어머니·남동생의 학살 장면을 목격하는 충격 속에서 어린 영선씨와 언니만 겨우 살아남았다. 고아와 다름없이 자라면서 겨우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시인으로 등단했고 자녀들도 번듯하게 키웠다. 93년부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증언자로 나선 그는 강화도 학살 현장에서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고 수많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강화도·교동도 일대 민간인학살의 실상과 진상규명·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싸워온 이야기들을 담아 책으로 내기도 했다. 책에는 온갖 지탄과 협박으로 법 제정을 방해하는 세력들의 행동거지도 털어놓았다.
이계성씨의 아버지 이현열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광복 이후 치안대 활동을 하다 미군정기 경찰의 탄압을 받아 대전형무소에 무기수로 수감됐다가 학살당했다. 그 바람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은 한국전쟁 당시 인공 치하에서 어머니가 남원 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한 탓에 국군을 피해 지리산으로 다함께 입산했다. 여동생이 동상에 걸려 장애인이 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토벌을 피해 살아남은 이씨 가족은 피난민으로 위장하고 서울로 도망쳤다.
외가가 있는 강진과 남해 등지를 전전하며 중학을 마친 그는 고학을 하고자 서울로 다시 올라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청소부·운전기사를 거쳐 한국은행의 잡급직으로 들어가 차량관리를 맡아 정착했다. 98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자신의 신상에 대해 자식들에게도 입을 다물었던 그는 2002년 진상규명 보도를 보고 유족회와 범국민위 활동에 동참했다. 그는 명석한 이론가가 되었다.
범국민위와 유족회에는 누구를 가릴 것도 없이 구구절절한 사연이 가슴에 맺혀 있었다. ‘연좌제 사슬’에 걸려 취직도 사회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반세기를 숨죽여 살다 마침내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이들이었다. 그 모두가 시대가 만든 희생자들이었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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