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왼쪽)으로부터 ‘역사와 미래를 위한 범국민자문위원회’ 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는 필자. 위암 수술을 한 지 1주일쯤 뒤였으나 기꺼이 참석했다.
이이화-민중사 헤쳐온 야인 112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 부산의 한 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아 강연을 갔을 때였다. 당시 인권변호사요 정치인이었던 그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대화를 길게 하지는 않았다. 두번째 조우는 10년 세월이 지난 2001년 11월 끝무렵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민주 언론인 송건호 선생의 영결식장이었다. 그때도 서로 가볍게 인사만 나누었을 뿐이다.
‘노무현’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이뤄진 세번째 만남에서였다. 2005년 7월 청와대에서 열린 ‘역사와 미래를 위한 범국민자문위원회’ 위원 위촉장을 받는 자리였다. 위암 수술을 받고 1주일밖에 안 된 해쓱한 얼굴로 굳이 그 자리에 참석한 것은 과거사 해법에 대한 소견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는 강원룡(작고) 목사를 비롯해 서영훈·신인령·윤경로·임재경·조정래·안병욱·염무웅·서중석·심지연·안병우 등 18명의 위원이 참석했다. 친일진상규명위원장 강만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등 당연직 위원 5명을 포함하면 모두 23명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과거사 청산을 위한 자료수집과 연구활동의 어려움을 말하면서 “한국전쟁 시기의 인권문제를 풀지 않으면 미래의 역사가 바르게 전개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앞으로 관련 단체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자료수집과 연구활동을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조직을 만드는 것도 신중히 검토해 보겠다”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어 그는 “지금 하나의 결단을 내리려고 기를 돋우고 있다”고 밝히면서 혼자 30분 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나라당에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한 것인데 박근혜 당시 대표가 이를 거절했고 여당 안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튼 청와대 회합이 끝난 뒤 실무자 회의가 꾸려지고 몇차례 보좌진들과 만났지만 가시적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과거사 정리를 평가하고 국민 여론을 결집시키는 방안 등을 모색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보좌진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실무회의를 이끌었던 안병욱 위원은 지금도 “몇몇 교수 출신 보좌진들이 자기네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열중해 진정한 과거사 청산 사업을 외면했다”고 말한다. 그들만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었을 터이나 역사적 소명이 뒤로 미뤄지게 된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노무현재단이 꾸려지고 몇 사람을 초청해 그를 평가하는 강좌를 열었는데 나도 ‘노무현의 개혁정치’에 대해 한마디 했다.
‘거슬러 올라가 보자. 노무현 후보가 2002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지역감정이 표로 드러났다는 해괴한 지적도 나왔지만 이는 전혀 타당치 않았다. 그는 비록 호남에 기반을 둔 평민당 후보였으나 영남 출신 인사였다. 노무현의 당선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완고한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지금 사정은 어떠한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청산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친일 반민족 문제는 물론 4·3 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부끄러운 과거사를 정면으로 안으려 애썼다. 그는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제주도 4·3 추모식장에서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올바른 역사가 올바른 공동체, 정의로운 국가를 만든다는 신념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또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 확대, 정치자금 등 정치부패의 척결, 온건한 자주외교정책 수립, 남북 화해와 협력에 진력했다. 비록 반대 세력의 방해와 자신의 의지 부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잦았으나 그 성과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권위를 깨고
국민에게 다가가려 노력했다. 이런 분위기는 서민적 언어 사용에서도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권위주의 풍토에서는 품위를 손상한 것으로 또는 경박한 행동으로 비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절차 민주주의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여담을 한마디 곁들인다면, 설이나 추석 명절 때 노 대통령 부부 이름으로 청와대에서 전통주나 특산물 같은 소박한 선물꾸러미를 보내줘 지인들과 나누곤 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뚝 끊겼다. 물론 무한정 인사를 챙기기에 한계가 있겠지만 씁쓸한 뒷맛은 지울 수가 없다.
역사학자
역사학자 이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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