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6년 3월 필자는 무용 선생님의 추천으로 광주극장에서 한국춤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난 뒤 어머니(최인순)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길을 찾아서]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②
해방된 뒤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인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광주시내 초등학교에서 각각 몇명씩 뽑아 어린이 공연단을 꾸렸는데 나도 뽑혔다. 그전부터 무용도 하고 중창도 한 덕분이었다. 공연단은 광주만이 아니라 목포·여수·순천에서도 해방 축하공연을 했다. 4학년이 된 어느날 무용 선생님이 부르더니 ‘한국춤을 좀 춰야 되겠다’고 하셔서 방과후마다 연습을 했다. 원삼족두리를 쓰고 한춤을 추었는데 광주극장에서였다. 그때는 그냥 무슨 행사인지도 모르고 그저 내 순서를 무사히 끝내는 데만 열중했는데, 훗날 자라서 얘기를 들어보니 그 자리가 건준의 뒤를 이은 진보단체의 행사였던 것 같다.
4학년 때 담임 박길채 선생님도 기억에 또렷하다. 내게 ‘의사가 되라’고 격려해 주셨고, 민족적 양심과 의식있는 가르침을 주셨는데, 졸업하고 6·25 전쟁 이후로 한번도 뵙지를 못했다. 어린 나이에도 의식이 남다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 선생님도, 박 선생님도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진보적인 활동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태어나기 전 8년 동안 아버지는 동생(내게는 작은아버지)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뒷바라지를 했다. 작은아버지는 유학 가서 원예 공부를 한 전문가로,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원예협회에서 상당한 활동을 했다. 해방될 무렵 작은아버지가 풍금을 선물해 줘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음악 담당인 홍명희 선생님은 유난히 형편이 어려워 보였지만 곱슬곱슬한 머리가 예술가다웠다.
어린 시절 무남독녀로 귀하게 자랐지만 몸은 굉장히 약했다. 편식도 몹시 심했다. 늘 밥맛이 없어 어머니가 밥숟가락 위에 반찬을 얹어주어 겨우 먹곤 했다. 그러니 학교에서 종종 쓰러져 선생님들이 숙직실에 눕혀 놓기도 했다. 그때는 교통수단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를 업고 우리집까지 데려다준 적도 있었다.
결국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한달이나 학교를 못 나갔다. 집에서 쉬면서 약 먹고 병원 다니며 치료하면서 쉬었다. 그때는 시험 봐서 성적이 좋으면 학년을 건너뛰는 월반제도가 있었다. 한달 쉬고 나와 시험을 봤는데 신통하게도 좋아 6학년 언니들 교실에 가서 함께 공부하게 됐다.
그런데 6학년 때 또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약하니까 어머니가 항상 집에서 보약을 달여가지고 학교에 오셨다. 보온병도 없던 때라 식지 않게 그릇을 씌워가지고 와서 수업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려 약을 먹이곤 하셨다. 그런데도 또 쓰러져 결국 시험을 볼 수 없게 됐고, 5학년 때 친구들과 다시 만나 6학년을 같이 다녔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 됐다. 그 시절 광주에서는 전남여중이 일제 때부터 명문으로 꼽혀, 웬만큼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그곳으로 진학했다. ‘S 언니’, ‘B 동생’과 같은 특별한 관계를 맺던 때여서 전남여중에 다니는 선배 언니들이 수업 끝나는 오후가 되면 교실 밖에 와서 ‘B 동생’ 삼을 후배를 찾곤 했다. 그런데 왠지 나는 그게 아주 싫었다.
그러다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르던 독립지사 외숙을 만나서 어느 학교로 가야 할지 여쭸다. 외숙께서는 ‘전남여중은 일제 때 부르주아들이 다니던 학교니까 새로 생긴 공립학교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외숙이 말씀하신 ‘부르주아’ 발음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암튼 그 말씀대로 나는 해방 이후 여학교로는 유일하게 신설된 광주여중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딱 굳혔다. 그런데 광주여중 원서를 써 내니까 교장 선생님이 불렀다. 6반 반장인 나와, 5반 반장이었던 친구 강경례도 와 있었다. 경례는 언니가 광주여중을 다니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명예도 있고 공부도 잘하고 하니 너희는 전통 있는 학교로 평가받는 전남여중으로 원서를 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고집대로 광주여중을 택했다. 그때부터 나와 그 친구는 평생지기로 지내고 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 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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