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만난 사람] 순창고추장 제조 기능인 설동순씨
어릴적 집에서 어머니가 담그던 방식 체득
결혼후 조금씩 만들어 팔다가 본격 사업화
대량생산 않고 오직 손으로 맛·품질 지켜와
어릴적 집에서 어머니가 담그던 방식 체득
결혼후 조금씩 만들어 팔다가 본격 사업화
대량생산 않고 오직 손으로 맛·품질 지켜와
전라북도 순창에 사는 설동순씨는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이 되는 시골 아줌마다. 신혼생활 몇년을 제외하고는 평생 순창을 벗어나지 않았다. 작은 키와 가는 눈매, 높은 광대뼈, 들일로 단련된 까무잡잡한 피부는 전형적인 한국의 촌부상을 떠올리게 한다. 설동순씨는그런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설씨는 고추장 사업가다. 현재 순창고추장마을에서 순창전통별미고추장 가게를 열고 있는 그의 고추장과 각종 장아찌는 옛맛과 전통적인 제조방식을 선호하는 이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1991년 순창전통고추장 제조기능인으로 지정된 설씨는 1980년대 초부터 집에서 담가 팔기 시작한 고추장 하나로 수억원대의 점포를 열고, 집을 사고, 논밭을 사고, 산을 샀다. 오로지 사람 손만으로 한해 3만㎏의 고추장을 담근 적이 있다는 그의 가게에는 300개가 넘는 항아리가 마당에, 지하에 즐비하다. 재고량으로 10억원어치가 넘는 규모이다.
그녀는 억척같이 번 돈으로 교회의 선교사업이나 불우이웃돕기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한다.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인사들과 친교를 쌓으며 한껏 뿌듯한 성취감도 누려본다. “나맨치로 재미나게 산 사람이 누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는 사람. 어쩌면 세속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시골 아낙네의 인생에 어떤 성공의 비결이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고추장 하나로 행복한 인생을 가꾸셨습니다. 서울에서는 몰라도 시골에서 이만하면 알부자 소리를 듣겠습니다.
“땅뙈기 한 평 없이 월세와 전셋집을 돌아댕길 때와 대면…”
-행복하십니까?
“그럼요, 지는 참 행복하당게.”
-행복하다니 참 부럽습니다.
“내가 생각혀도 인생을 잘 산 것 같으요.” -어떤 점이 그런가요? “아직 60밖에 못 살아봤지만, 배웠다고 잘 살고 못 배웠다고 다 못 살고 그런 게 아니더라는 거, 내가 살아본께 알겠드라구요. 인생은 지 하기 나름이에요.” -어떨 때가 행복합니까? “지가 딸만 넷인데 큰딸과 사위가 고추장 사업을 도와주고 있어요. 걔들한테 가게를 물려줘야겠지요, 아들이 없응게. 둘찌, 셋찌 그리고 막내에게도 살 밑천을 챙겨줘야제 하는 생각 혈 때. 그라고 진짜는 교회사업에 기부할 때, 나보다 못현 사람 도울 때, 그럴 때가 젤 마음이 즐겁지라. 지난번에 제조기능인 상을 받았는데 상금 200만원을 독거노인 돕는 데 냈어요. 지는 지금이 재밌고 좋습니다. 저에게 좋은 사람들 많이 붙여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설동순씨가 고추장 사업에 눈을 뜬 것은 1980년, 그가 28살 때였다. “25살에 열 살이나 위인 군청 사방관리소 임시직원과 1975년 겨울에 결혼했습니다. 신혼살림은 남편 직장이 있는 남원의 월세방에서 시작했지요. 남편은 결혼 전에 빚이 많았어요. 좀처럼 살림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무슨 일이든 나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설동순은 남편의 손을 이끌고 장사에 나섰다. 시장에서 생태를 두 짝 사다가 리어카에 싣고 남원 읍내를 돌며 팔아보았으나 겨우 3마리를 팔고는 두 손을 들었다. 다음에는 광양에서 김을 사다 팔아보았으나 역시 실패. 그다음은 감, 그다음은 번데기 장사…. 첫딸을 낳은 뒤엔 비슷한 산모집에서 보모 겸 식모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쌀독에 쌀이 떨어져 친정집에서 몰래 쌀을 훔쳐냈다가 들키기도 했다. 어려웠던 결혼 초기 생활에서 다소 벗어난 뒤 경찰관이었던 오빠의 숙식을 돕기 위해 고향 순창으로 돌아와 선택한 부업은 고추장 담그는 일이었다. 본래 설동순은 고추장 담그는 법을 어머니에게 배워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음력 섣달이면 쌀 두어 말로 고추장을 담갔는데, 고추장에 쓸 밥을 지을 때 아궁이 곁을 지키고 서서 나무주걱으로 솥을 젓는 일이 내 몫이었습니다. 고추장 만드는 일은 꼬박 이틀이 걸려요. 어머니는 내게도 간을 보게 하셨는데, ‘한꺼번에 간을 했다가 짜지면 1년 장맛을 망친다’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 설동순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근의 고추장 만드는 집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순창 지방의 고추장이 유명해서 여러 집들이 고추장을 담가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설동순은 그중 한 집에서 일하며 고추장 담그기에서 나아가 고추장을 파는 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년쯤 지난 어느날 남편이 본격적인 고추장 사업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제안하고 나섰다. “아마도 88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이었을 겁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이 도로가 완공되면 전라도 지역의 물산이 대구·부산 등 여타 지역으로 나가는 게 한결 쉬워질 뿐 아니라, 고속도로를 타고 순창으로 고추장을 사러 오는 외지인의 발길이 부쩍 늘 것이란 판단을 남편이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뜻 자기 장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설동순에게 장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동기가 생겼다. 순창에서 그토록 소망하던 내집을 마련하면서 400만원가량의 빚을 졌던 것이다. 설동순은 1983년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80㎏들이 쌀 한 가마를 사서 고추장을 담갔다. 판로를 걱정하던 차에 서울 사는 시누이가 연말 선물용으로 1㎏짜리 50개를 주문했다. 개당 8000원씩 40만원을 손에 쥔 설동순은 가슴이 뛰었다. “아, 이렇게 돈이 들어오는구나 싶었어요. 용기가 나더군요. 그래서 다음에는 3가마니, 그다음엔 5가마 하는 식으로 생산량을 늘려 갔습니다. 88도로를 타고 순창 고추장의 명성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제 고추장 사업도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전북 순창은 섬진강 상류에 자리해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해 옥천(玉川)이라 불리기도 한 고장이다. 순창은 고추가 자라고, 장이 숙성하는 데 알맞은 기후였다. 이 지역 여인네들 특유의 손맛으로 버무려진 고추장과 장아찌는 오래전부터 순창의 명물이었다. -한창때는 얼마나 팔았나요? “겁나게 팔았지요. 고추 1만5000근과, 1톤 트럭 15대 분량이에요. 80㎏들이 쌀 80가마를 가지고 고추장을 담갔어요. 고추장 양이 30톤이니 엄청났지요. 그때가 1997년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엠에프가 올 무렵인데 우린 그게 뭔 줄도 모를 정도로 신바람이 났죠. 물론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아무튼 91년부터 잡더라도 한 7~8년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은? “한해 10톤 정도 담그는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안 팔려요. 한국 사람들이 갑자기 고추장을 안 먹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작년, 올해는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해요.” -왜일까요? “경기가 안 좋으니까 그런 거겠지요. 물가가 좀 올라요? 나라도 고추장 사먹기가 겁나겠어요. 고추장 사업 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너무 많아졌고.” -순창에는 고추장 제조 기능인이 얼마나 되나요? “순창에만 150여명. 내가 23호여요. 23번째가 아니라 1991년 허가제로 바뀔 때 처음 신청하고 받은 사람이 23명이었다는 뜻입니다. 23명이 모두 최초인 셈이지요.” -여기 고추장마을이 조성된 것은 허가제가 된 이후군요? “생각해보면 그 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세금 안 내고 장사해서 좋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어요. 허가낸 뒤로는 관에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게 많고, 한데 모여서 경쟁하다 보니 이웃간의 사이도 예전 같지 않고…” -본인이 만든 고추장이니 더 맛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남의 것이야 안 먹어봐서 모르지만 당연하지 않겠어요? 제 맛의 비밀이 있다면 이런 거예요. 난 고추 살 때 다른 사람보다 비싸게 값을 쳐주더라도 내가 원하는 좋은 고추를 써요.” -어디 고추를 쓰나요? “순창 금과면에서 나는 거.” -왜죠? “제 고향이니까. 그러구 금과는 토질이 좋아요. 순창에서도 쌀 하면 금과를 쳐주고 있어요. 모든 재료는 순창 안에서 나는 걸 씁니다.” -그것이 맛의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럼요. 무엇보다 간을 잘해야죠. 짜서도 안 되고 싱거워도 안 되고.” -결국 손맛인가요? “좋은 물, 좋은 기후, 좋은 쌀 그리고 담그는 이의 정성이지요. 뭐든 안 그렇겠어요?” -전통적인 방식이라는데 어떻게 담그나요? “난 30년 동안 어머니한테 배운 방식 그대로 해오고 있어요. 찹쌀을 4시간 정도 불린 뒤 그걸로 밥을 지어서 고추장을 만들어요. 그리고 한 6개월간 숙성시킨 뒤 식혜 조청을 섞어주지요. 요즘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쌀가루와 엿기름을 한꺼번에 섞어서 만들지요. 재래방식은 일이 고되고 만들기도 까다롭지만, 그만큼 값을 더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내 고추장은 단골들이 많아요. 명절 때는 한달 전부터 주문이 들어옵니다.” -고추장 빛깔을 보면 무슨 재료를 썼는지 아나요? “진홍색 고추장. 이건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지금까지 고추장을 30년 넘게 담가오고 있지만 우리 국산 고추장은 검붉은색이 나와요. 오래 두면 검어지고. 그게 정상인데…. 옛날에도 색을 내려고 카라멜을 넣는 집이 있었긴 했지요. 나한테 고추장 담그는 법 배우러 다닌 사람 중에 내가 카라멜 쓰는 걸 안 가르쳐줬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걸 기술이라고 여겼던 거지요.” -장아찌는 어떤가요? “장아찌를 맛있게 오래 먹으려면 짜지 않아야 해요. 그다음은 오래 묵힐수록 좋지요. 매실은 1년 안이지만, 무는 3년 이상, 더덕은 2년 이상 묵혀야 제 맛이 나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각사각 씹히는 걸 좋아해서 오래 안 묵히게 돼요.” -장아찌를 맛있게 담그려면? “고추장을 여러번 갈아줘야 해요. 제대로 만든 장아찌가 비싼 건 그래서지요. 3년간 최소 7번은 고추장을 갈아줍니다. 고추장이 잘 배어들어야 제 빛깔과 맛을 내니까.” 설동순은 한 종교신문사의 신자모임 회원이다. 선교사업에 많은 기부를 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데, 그 모임을 통해 정영숙·정애리 같은 기독교신자 탤런트들과 교유를 맺었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정영숙씨가 선물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복이 참 곱다고 칭찬하자, 대뜸 정영숙 권사가 보내준 거라고 자랑했다. 언니 동생 하는 친한 사이라며 한껏 뿌듯한 모습이었다. -인생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많이 못 배운 거지요. 아버지가 여자는 시집가면 어차피 남의 집 사람인데 돈 들여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어요. 그래서 손위 오빠와 열여섯살이나 차이가 나는 나이인데도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다니게 했어요. 중학교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동네에서 신문을 주워 모아다가 거기 나오는 한자를 베껴쓰기도 했어요. 지금도 글씨 쓰는 거 한문 읽는 거는 요즘 애들보다 잘해요.” “전통 고추장은 검붉은색…진홍색 이해 안돼”
순창만 기능인 150여명 달해 경쟁 탓 맘고생도
“단골도 많고 성공했고…잘 살아온거 같으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겠어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싹 씻었어요. 내가 쌀이 떨어져 친정에서 쌀을 훔쳐내온 걸 동네 사람들이 알았어요. 어머니가 그 소문을 듣고 추궁하는 걸 아버지가 들으셨나봐요. 아버지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오시며 그러셨어요. ‘내가 가져가라고 줬다. 어느 연놈들이 도둑질했다고 하더냐. 주둥이를 쪄불랑게!’ 그날 이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동행했던 설씨의 지인이 돈 버는 재주는 없고 고집만 부려서 백화점이나 대형체인에 들어가 큰돈 벌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자) “그건 지금 생각혀두 잘한 거여. 대량으로 나갔으면 맛과 품질을 지키기 어려웠을 거여. 돈이야 이만큼 벌었으면 되얏지. 자석 공부시키고 집 사주고, 두 늙은이 살 큰 집을 가졌는디 뭐가 아쉬워? 솔직히 인간적으로다가 내가 시골뜨기 아줌마인데, 서울의 큰 모임에 가서 많이 배운 높은 분들과 나란히 앉아 밥 먹고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탈렌트, 배우들하고 사진도 찍고, 팔자에 없는 요리책도 내고 했으면 됐지 얼마나 돼야 성공한 거여?”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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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혀도 인생을 잘 산 것 같으요.” -어떤 점이 그런가요? “아직 60밖에 못 살아봤지만, 배웠다고 잘 살고 못 배웠다고 다 못 살고 그런 게 아니더라는 거, 내가 살아본께 알겠드라구요. 인생은 지 하기 나름이에요.” -어떨 때가 행복합니까? “지가 딸만 넷인데 큰딸과 사위가 고추장 사업을 도와주고 있어요. 걔들한테 가게를 물려줘야겠지요, 아들이 없응게. 둘찌, 셋찌 그리고 막내에게도 살 밑천을 챙겨줘야제 하는 생각 혈 때. 그라고 진짜는 교회사업에 기부할 때, 나보다 못현 사람 도울 때, 그럴 때가 젤 마음이 즐겁지라. 지난번에 제조기능인 상을 받았는데 상금 200만원을 독거노인 돕는 데 냈어요. 지는 지금이 재밌고 좋습니다. 저에게 좋은 사람들 많이 붙여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지요.” 설동순씨가 고추장 사업에 눈을 뜬 것은 1980년, 그가 28살 때였다. “25살에 열 살이나 위인 군청 사방관리소 임시직원과 1975년 겨울에 결혼했습니다. 신혼살림은 남편 직장이 있는 남원의 월세방에서 시작했지요. 남편은 결혼 전에 빚이 많았어요. 좀처럼 살림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무슨 일이든 나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설동순은 남편의 손을 이끌고 장사에 나섰다. 시장에서 생태를 두 짝 사다가 리어카에 싣고 남원 읍내를 돌며 팔아보았으나 겨우 3마리를 팔고는 두 손을 들었다. 다음에는 광양에서 김을 사다 팔아보았으나 역시 실패. 그다음은 감, 그다음은 번데기 장사…. 첫딸을 낳은 뒤엔 비슷한 산모집에서 보모 겸 식모를 하기도 했다. 한번은 쌀독에 쌀이 떨어져 친정집에서 몰래 쌀을 훔쳐냈다가 들키기도 했다. 어려웠던 결혼 초기 생활에서 다소 벗어난 뒤 경찰관이었던 오빠의 숙식을 돕기 위해 고향 순창으로 돌아와 선택한 부업은 고추장 담그는 일이었다. 본래 설동순은 고추장 담그는 법을 어머니에게 배워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음력 섣달이면 쌀 두어 말로 고추장을 담갔는데, 고추장에 쓸 밥을 지을 때 아궁이 곁을 지키고 서서 나무주걱으로 솥을 젓는 일이 내 몫이었습니다. 고추장 만드는 일은 꼬박 이틀이 걸려요. 어머니는 내게도 간을 보게 하셨는데, ‘한꺼번에 간을 했다가 짜지면 1년 장맛을 망친다’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의를 주었습니다.” 설동순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인근의 고추장 만드는 집으로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순창 지방의 고추장이 유명해서 여러 집들이 고추장을 담가 부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설동순은 그중 한 집에서 일하며 고추장 담그기에서 나아가 고추장을 파는 일에 대한 기본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2년쯤 지난 어느날 남편이 본격적인 고추장 사업을 해보는게 어떠냐고 제안하고 나섰다. “아마도 88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이었을 겁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이 도로가 완공되면 전라도 지역의 물산이 대구·부산 등 여타 지역으로 나가는 게 한결 쉬워질 뿐 아니라, 고속도로를 타고 순창으로 고추장을 사러 오는 외지인의 발길이 부쩍 늘 것이란 판단을 남편이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선뜻 자기 장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설동순에게 장사를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동기가 생겼다. 순창에서 그토록 소망하던 내집을 마련하면서 400만원가량의 빚을 졌던 것이다. 설동순은 1983년 성탄절을 얼마 앞두고 80㎏들이 쌀 한 가마를 사서 고추장을 담갔다. 판로를 걱정하던 차에 서울 사는 시누이가 연말 선물용으로 1㎏짜리 50개를 주문했다. 개당 8000원씩 40만원을 손에 쥔 설동순은 가슴이 뛰었다. “아, 이렇게 돈이 들어오는구나 싶었어요. 용기가 나더군요. 그래서 다음에는 3가마니, 그다음엔 5가마 하는 식으로 생산량을 늘려 갔습니다. 88도로를 타고 순창 고추장의 명성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제 고추장 사업도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전북 순창은 섬진강 상류에 자리해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해 옥천(玉川)이라 불리기도 한 고장이다. 순창은 고추가 자라고, 장이 숙성하는 데 알맞은 기후였다. 이 지역 여인네들 특유의 손맛으로 버무려진 고추장과 장아찌는 오래전부터 순창의 명물이었다. -한창때는 얼마나 팔았나요? “겁나게 팔았지요. 고추 1만5000근과, 1톤 트럭 15대 분량이에요. 80㎏들이 쌀 80가마를 가지고 고추장을 담갔어요. 고추장 양이 30톤이니 엄청났지요. 그때가 1997년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엠에프가 올 무렵인데 우린 그게 뭔 줄도 모를 정도로 신바람이 났죠. 물론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었지만. 아무튼 91년부터 잡더라도 한 7~8년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요즘은? “한해 10톤 정도 담그는 것 같아요. 그런데 너무 안 팔려요. 한국 사람들이 갑자기 고추장을 안 먹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작년, 올해는 아이엠에프 때보다 더해요.” -왜일까요? “경기가 안 좋으니까 그런 거겠지요. 물가가 좀 올라요? 나라도 고추장 사먹기가 겁나겠어요. 고추장 사업 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너무 많아졌고.” -순창에는 고추장 제조 기능인이 얼마나 되나요? “순창에만 150여명. 내가 23호여요. 23번째가 아니라 1991년 허가제로 바뀔 때 처음 신청하고 받은 사람이 23명이었다는 뜻입니다. 23명이 모두 최초인 셈이지요.” -여기 고추장마을이 조성된 것은 허가제가 된 이후군요? “생각해보면 그 전이 좋았던 것 같아요. 세금 안 내고 장사해서 좋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어요. 허가낸 뒤로는 관에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게 많고, 한데 모여서 경쟁하다 보니 이웃간의 사이도 예전 같지 않고…” -본인이 만든 고추장이니 더 맛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남의 것이야 안 먹어봐서 모르지만 당연하지 않겠어요? 제 맛의 비밀이 있다면 이런 거예요. 난 고추 살 때 다른 사람보다 비싸게 값을 쳐주더라도 내가 원하는 좋은 고추를 써요.” -어디 고추를 쓰나요? “순창 금과면에서 나는 거.” -왜죠? “제 고향이니까. 그러구 금과는 토질이 좋아요. 순창에서도 쌀 하면 금과를 쳐주고 있어요. 모든 재료는 순창 안에서 나는 걸 씁니다.” -그것이 맛의 전부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럼요. 무엇보다 간을 잘해야죠. 짜서도 안 되고 싱거워도 안 되고.” -결국 손맛인가요? “좋은 물, 좋은 기후, 좋은 쌀 그리고 담그는 이의 정성이지요. 뭐든 안 그렇겠어요?” -전통적인 방식이라는데 어떻게 담그나요? “난 30년 동안 어머니한테 배운 방식 그대로 해오고 있어요. 찹쌀을 4시간 정도 불린 뒤 그걸로 밥을 지어서 고추장을 만들어요. 그리고 한 6개월간 숙성시킨 뒤 식혜 조청을 섞어주지요. 요즘은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쌀가루와 엿기름을 한꺼번에 섞어서 만들지요. 재래방식은 일이 고되고 만들기도 까다롭지만, 그만큼 값을 더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내 고추장은 단골들이 많아요. 명절 때는 한달 전부터 주문이 들어옵니다.” -고추장 빛깔을 보면 무슨 재료를 썼는지 아나요? “진홍색 고추장. 이건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지금까지 고추장을 30년 넘게 담가오고 있지만 우리 국산 고추장은 검붉은색이 나와요. 오래 두면 검어지고. 그게 정상인데…. 옛날에도 색을 내려고 카라멜을 넣는 집이 있었긴 했지요. 나한테 고추장 담그는 법 배우러 다닌 사람 중에 내가 카라멜 쓰는 걸 안 가르쳐줬다고 욕하는 사람이 있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걸 기술이라고 여겼던 거지요.” -장아찌는 어떤가요? “장아찌를 맛있게 오래 먹으려면 짜지 않아야 해요. 그다음은 오래 묵힐수록 좋지요. 매실은 1년 안이지만, 무는 3년 이상, 더덕은 2년 이상 묵혀야 제 맛이 나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사각사각 씹히는 걸 좋아해서 오래 안 묵히게 돼요.” -장아찌를 맛있게 담그려면? “고추장을 여러번 갈아줘야 해요. 제대로 만든 장아찌가 비싼 건 그래서지요. 3년간 최소 7번은 고추장을 갈아줍니다. 고추장이 잘 배어들어야 제 빛깔과 맛을 내니까.” 설동순은 한 종교신문사의 신자모임 회원이다. 선교사업에 많은 기부를 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하는데, 그 모임을 통해 정영숙·정애리 같은 기독교신자 탤런트들과 교유를 맺었다. 인터뷰를 하던 날도 정영숙씨가 선물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한복이 참 곱다고 칭찬하자, 대뜸 정영숙 권사가 보내준 거라고 자랑했다. 언니 동생 하는 친한 사이라며 한껏 뿌듯한 모습이었다. -인생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많이 못 배운 거지요. 아버지가 여자는 시집가면 어차피 남의 집 사람인데 돈 들여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셨어요. 그래서 손위 오빠와 열여섯살이나 차이가 나는 나이인데도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다니게 했어요. 중학교 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동네에서 신문을 주워 모아다가 거기 나오는 한자를 베껴쓰기도 했어요. 지금도 글씨 쓰는 거 한문 읽는 거는 요즘 애들보다 잘해요.” “전통 고추장은 검붉은색…진홍색 이해 안돼”
순창만 기능인 150여명 달해 경쟁 탓 맘고생도
“단골도 많고 성공했고…잘 살아온거 같으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겠어요. “원망도 많이 했지만, 싹 씻었어요. 내가 쌀이 떨어져 친정에서 쌀을 훔쳐내온 걸 동네 사람들이 알았어요. 어머니가 그 소문을 듣고 추궁하는 걸 아버지가 들으셨나봐요. 아버지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오시며 그러셨어요. ‘내가 가져가라고 줬다. 어느 연놈들이 도둑질했다고 하더냐. 주둥이를 쪄불랑게!’ 그날 이후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동행했던 설씨의 지인이 돈 버는 재주는 없고 고집만 부려서 백화점이나 대형체인에 들어가 큰돈 벌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자) “그건 지금 생각혀두 잘한 거여. 대량으로 나갔으면 맛과 품질을 지키기 어려웠을 거여. 돈이야 이만큼 벌었으면 되얏지. 자석 공부시키고 집 사주고, 두 늙은이 살 큰 집을 가졌는디 뭐가 아쉬워? 솔직히 인간적으로다가 내가 시골뜨기 아줌마인데, 서울의 큰 모임에 가서 많이 배운 높은 분들과 나란히 앉아 밥 먹고 텔레비전에서나 볼 수 있는 탈렌트, 배우들하고 사진도 찍고, 팔자에 없는 요리책도 내고 했으면 됐지 얼마나 돼야 성공한 거여?”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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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돌토돌’ 작은 혹, 손으로 떼다 혹 붙일라
■ [세상 읽기]‘직장’이라는 이름의 새 시어머니/ 김용익
■ 항일불교 터에 ‘친일파 도로명’ 쓰다니…
■ “고엽제 드럼통 매립때부터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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