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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운명적인 두 만남…‘초등시절 동창’ 남편과 교직 / 정해숙

등록 2011-05-26 21:01수정 2011-05-27 20:16

1958년 12월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던 희망예식장에서 올린 필자와 남편 정희영씨의 결혼식 장면. 주례는 김창선 선생이다. 부부는 3남1녀를 두고 53년째 회로하고 있다.
1958년 12월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던 희망예식장에서 올린 필자와 남편 정희영씨의 결혼식 장면. 주례는 김창선 선생이다. 부부는 3남1녀를 두고 53년째 회로하고 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9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마저 쓰러지자 외할머니는 ‘너희 어머니가 저대로 떠나버리면 너는 형제도 없이 혼자다. 그러니 결혼을 해라’ 하시며 부쩍 재촉을 하셨다. 그 말씀에 따라 전남대 의대 본과 1년을 다니다 두번째 휴학중이던 1958년 12월 결혼을 했다. 남편 정희영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함께 자란 동창생이자 내 농구팬으로 나이는 두 살 위였다. 멀리 부산수산대로 유학을 갔으나 그만두고 결혼할 때는 해병대 장교였다.

결혼을 했지만 내가 처한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몸져누운 어머니를 돌보고, 사업 실패로 떠돌아다니던 아버지도 집으로 돌아와 모시게 됐다. 다시 상하방에 하숙을 치기로 했다. 하숙생이라고 해봐야 2명으로, 한명은 아주 예의가 바른 교사였는데 10년 뒤 내가 전남여고로 전근하면서 동료로 다시 만나기도 했다. 다른 한명인 대학생 송군도 교사가 되어 순천지역에서 고교 교장까지 지냈다.

그런데 1년쯤 뒤 주인댁이 다시 광주로 발령이 나 셋집을 옮기면서 하숙도 접어야 했다. 결혼 이듬해 태어난 큰아들 규석이를 키우고 어머니를 돌보려면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는 교사 자격 검정고시를 보기로 했다. 지금이야 교대나 사범대 졸업 또는 교직과목을 이수하면 임용고사를 거쳐 교사가 되지만, 그때는 사범대학이 별로 없어 사대 졸업생도 많지 않았던 까닭에 누구나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하면 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1961년 교육위원회에 검정고시 원서를 제출하러 갔다. 고시는 과목별로 치렀는데, 나는 어학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는 편이어서 국어과를 할까 영어과를 할까 한참 고민했다. 결국 국어과를 보기로 결심하고 원서를 냈는데, 담당관이 ‘의예과 2년만 나와도 과학 교사 자격증이 그냥 나오는데 무슨 시험을 또 보려고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렇게 2주 만에 문교부에서 발급한 중학교 과학과 자격증을 받았다.

그 얼마 뒤 신문에서 우연히 전라남도 교육위원회의 수학교사 채용시험 공고를 보게 됐다. 국어·영어·수학 등 과목별 채용공고였는데 과학과는 없고 과학과 자격증 소지자는 수학과에 응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을 한 박정희 정권이 교직에 있는 교사 중 군복무를 거치지 않은 교사를 모두 다 징집하는 바람에 교사가 많이 부족해서인지, 교과별로 모집 인원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 때여서 사실 자신은 없었지만 용기를 내서 시험을 봤다.

광주공고에서 치러진 채용고시에는 9명 모집에 34명이 지원을 했다. 그때만 해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 정말 드문 때로 지원자 34명 중 여성은 2명뿐이었다. 시험에 나온 5문제 가운데 4문제는 자신있게 풀었는데 한 문제가 자신이 없었다.

다음날은 면접시험이었는데 면접 담당 장학사 중에 고교 때 은사님들이 있을 것만 같아 그만 포기했다. 남의 집 상하방을 빌려 살면서 먹을거리가 없어 호박만 조금 넣은 멀건 밀가루죽 먹던 곤궁한 형편에, 결혼도 하고 애까지 가진 몸으로 옛 은사님을 만나는 것이 그때의 내 자존심으로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면접시험을 포기했으니 발표 날짜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는데 며칠 뒤 나이 드신 당숙께서 우리집으로 오시더니 “해숙아, 너 합격했더라!” 하며 소식을 전해줬다. “어떻게 아세요?” 했더니 “신문에 났어” 하시는 것이다. 그길로 공중전화로 달려가 전남교육위원회에 전화로 ‘수학과 정해숙 합격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사실이었다. 합격했으니 며칠까지 서류 준비해 나오라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전화나 텔레비전이 없을 때였으니 정보를 확인할 방법은 라디오나 신문뿐이라 신경 써서 확인하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던 때였다. 그때 당숙이 우리집까지 찾아온 것은 좀 느닷없는 일이었는데 생각하면 신기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 덕분에 생계형 교사로서 나의 교직생활이 시작됐다.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반드시 의사가 되라며 한사코 교사를 말리던 아버지 뜻에 따르려 애썼지만 결국 교사가 됐으니 어쩌면 이 길이 나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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