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직후인 1956년 폐허 속에서 경남 거창고를 일군 3대 교장 전영창(오른쪽) 선생과 대를 이어 가꿔온 전성은(왼쪽) 선생 부자의 67년 무렵 모습. 필자는 82년 거창고를 견학하며 ‘교육의 희망과 교육자의 용기’를 확인했다.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40
암담한 교육 현실에 외로운 저항을 하던 시절, ‘그래도 교육의 희망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경남 거창고등학교에서였다. 1982년 광주의 공사립 선생님 40여명과 함께 기독교청년회(YMCA) 차를 빌려 선진지 시찰을 갔다. 그때 거창고의 교장은 전성은 선생님(4대·전 교육혁신위원회 위원장)이셨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을 통해 지금의 거창고가 있기까지 과정, 교육철학과 목표, 학교운영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고, ‘우리가 실천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
거창고를 전인교육·열린교육·참교육의 대명사로 일군 분은 전영창 3대 교장 선생님이셨다. 전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미주리주의 한 신학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 소식을 듣고 귀국했는데 대학 학장 등 여러 곳에서 ‘모시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을 바르게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는 소신에 따라 재정 문제로 폐교 위기에 놓인 두메산골의 거창고 교장을 맡은 것이었다.
전 선생님은 맨 먼저 교사 채용에 힘을 기울였다. 뜻있는 좋은 교사를 모시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사립학교에서 교사를 채용할 때는 기부금을 요구하는 것이 상식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비용을 들여 교사를 찾아다니며 모셔왔다는 것은 남다른 교육철학이 아닐 수 없었다.
전 선생님의 소신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들이 많았다. ‘교장실에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걸라’는 유신독재정권의 지시를 거부했다. 어느 날은 정보기관으로부터 “지금 그 학교 학생들이 장터에 나와 시위를 하고 있는데 교장은 학교에서 뭐하고 있느냐”는 연락을 받고 장터로 달려가 보니 거창고 학생들이 손수레 위에 올라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을 바로 끌어내리지 않고 청중 속에서 연설을 다 들은 뒤 사람들이 흩어지자 조용히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밤 기관에서는 다시 ‘학생들 명단을 작성해서 조처하라’는 전화 지시가 왔다. 전 선생님은 “현장에 가서 우리 학생들의 연설 내용을 다 들었는데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말하고 있었다. 배운 대로 주민들에게 전달한 학생들을 징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기관에서는 ‘학교를 폐쇄시킬 수밖에 없다’고 협박했다.
교장 선생님은 동요하지 않고 교무회의를 열어 학교 폐쇄 대책을 논의했다. ‘대청마루가 넓은 1학년 어느 선생님 집에서는 국어수업을, 방이 넓은 2학년 어느 선생님 집에서는 영어수업을….’ 이렇게 학생들을 잘 가르치자고 의견을 모았다. 당국에서는 끝내 학교를 폐쇄하지는 못했고, 선생님들의 현명한 지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기부금을 받고 채용한 것이 아니라 교육철학이 맞는 선생님들을 모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 선생님은 평소 학생들에게 ‘정의는 끝내 이긴다는 소신을 갖고 야망을 품기를’ 강조했다. 56년부터 75년까지 20년 가까이 재임한 전영창 교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76년, 재단 이사회에서는 교직원들의 뜻을 모아 그 아들이자 기획실장을 후임 교장으로 선출했다. 바로 전성은 선생님이었다.
거창고의 교육 내용과 학교시설 하나하나가 감동적이었다. 냉난방 시설이 잘된 기숙사를 갖춰서 모든 학생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설이 완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기숙사를 지어놓고 난방시설을 하려는데 예산이 모자랐다. 그러자 교장 선생님이 사재를 팔아 보탰고, 한편에는 학교 직영으로 출판사를 운영해 수익을 더했다.
교무실 앞에는 교사들의 체력단련과 휴식을 위한 당구장과 탁구장을 두었다. 지하에는 정비가 매우 잘된 도서실이 있었고, 학생 독후감 발표 시간도 짜여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외부 인사를 초청해 전교생에게 교양강좌를 했다. 그야말로 전인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학교였다. 당연히 대학 진학률이 높았고,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은 전용 운전 연습장에서 방과후 실습을 해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했다. 한쪽에는 학생들이 가꾸는 과수원이 있어서 우리 일행도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자두를 대접받았다. 봄·가을마다 열리는 교내 체육대회와 학예발표회는 이후 2박3일 청소년 수련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데 거창고에는 교문이 없었다. 학교 설명이 끝난 뒤 ‘교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열린학교인데 굳이 교문이 필요합니까?” 박정희 18년에 이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어둠 속에서, 거창고의 발견은 터널의 끝이 보이는 ‘희망의 세계’였다. 확고한 철학을 지닌 지도자와 실천만 있으면 ‘희망의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교무실 앞에는 교사들의 체력단련과 휴식을 위한 당구장과 탁구장을 두었다. 지하에는 정비가 매우 잘된 도서실이 있었고, 학생 독후감 발표 시간도 짜여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외부 인사를 초청해 전교생에게 교양강좌를 했다. 그야말로 전인교육이 실현되고 있는 학교였다. 당연히 대학 진학률이 높았고,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은 전용 운전 연습장에서 방과후 실습을 해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했다. 한쪽에는 학생들이 가꾸는 과수원이 있어서 우리 일행도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자두를 대접받았다. 봄·가을마다 열리는 교내 체육대회와 학예발표회는 이후 2박3일 청소년 수련회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런데 거창고에는 교문이 없었다. 학교 설명이 끝난 뒤 ‘교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열린학교인데 굳이 교문이 필요합니까?” 박정희 18년에 이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어둠 속에서, 거창고의 발견은 터널의 끝이 보이는 ‘희망의 세계’였다. 확고한 철학을 지닌 지도자와 실천만 있으면 ‘희망의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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