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치즈를 탄생시킨 벨기에인 지정환 신부가 전북 완주군 소양면 거처인 ‘별아래’에서 50여년 동안 한국에서 농민과 장애인을 위해 헌신했던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완주/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52년간 한국사랑·임실치즈 제조 지정환 신부
52년간 한국사랑·임실치즈 제조 지정환 신부
한국전쟁 소식 듣고 도움되고 싶어 배치 자원
임실성당 부임뒤 군민 도우려 치즈생산 도전
“처음엔 실패의 연속…3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이땅의 농민과 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산 외국인 신부가 있다. 임실치즈를 탄생시킨 벨기에인 지정환(80) 신부다. 그는 52년 전인 1959년 한국에 와 한국 농민들에겐 낯선 외국 음식인 치즈를 만들어 팔아 농가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 민주화를 위해선 추방 대상자로 내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안게 된 뒤에는 중증장애인들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외국인 사제로서 반세기를 한국인과 함께한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어렵게 연락처를 구했지만,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노신부의 외부 창구 구실을 하는 황성신씨가 기자를 가까운 친구라고 소개하고서야 가까스로 인터뷰가 가능했다. 언론을 피하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기자들이 당신을 무슨 영웅인 양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 소설을 쓰고 전설을 만드는 것이 마땅찮다고 했다. 왕실 출신이 아닌데도 왕족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라며 웃었다. 기자를 기피하는 또다른 이유는 사람이란 유명해지면 교만해지기 쉬워서 그것을 경계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올해 팔순인 지 신부는 지금은 퇴역해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157-2에 꾸린 ‘별아래’에서 혼자 산다. 별아래는 북한 땅인 강원도 이천군의 한 마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휠체어를 탔지만 건강해 보였다. 전라도 사투리도 조금 썼다. 인터뷰는 그가 머무는 별아래에서 진행했다. 노신부가 피곤할 것을 걱정했지만, 2시간을 넘기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인터뷰를 돕던 황씨는 “임실치즈가 다른 치즈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저는 지 신부님의 인류애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다. 왜 사제의 길을 택했나? “귀족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라고 배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일찍부터 교육받았다.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7살 때부터 했다. 신부가 되면 벨기에를 떠나 어려운 데 가서 일하고 싶었다.”
-신부님의 인생 역정을 다룬 책 <치즈로 만든 무지개>를 보면, 벨기에 신부들은 벨기에령이었던 아프리카 콩고에서 주로 활동했다. 신부님은 왜 낯선 동양 한국을 선택했나? “당시 콩고는 (한국보다) 잘살았다. 고교를 1950년 6월24일 졸업했는데, 이튿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쟁이 끝나면 한국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다. 내가 그곳에 가면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계기였다. 나중에 신학교에서 한국으로 신부를 보내려 할 때 내가 자원했고, 천주교 전주교구의 초청도 받았다.” -신경에 이상 증세를 보이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으로 다리가 불편하시다. 이 병 때문에 1981년에 벨기에로 갔다가 1983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에서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 건강은 어떤가? 그때 왜 한국에 돌아왔나? “신부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학교가 나를 전주교구로 보냈기 때문에 나는 전주교구 소속 신부다. 다리를 한국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치료차 본국엘 갔는데, 프랑스 파리대학에서도 치료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내 소속 교구로 돌아왔을 뿐이다. 1963년에도 쓸개 때문에 본국에서 수술을 받고 다시 전주교구로 돌아왔다. 배꼽 밑으로는 감각이 없다. 4년 전부터는 눈에도 문제가 생겨서 잘 보지 못한다. 나빠지다가 회복되고 이를 반복한다.” -한국인이나 다름없는데, 귀화를 생각해본 적은 없나? “내가 귀화를 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나를 한국사람으로 생각하겠나? 한국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100년을 살아도 재일동포다. 아무리 한국말 몰라도 재일동포다. 미국은 귀화하면 미국사람으로 생각한다. 내 선배(신부)가 한국에 와서 귀화했지만, 아무도 그를 한국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 웃어버린다.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나에게 최고 좋은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 오기 전에 영국에서 미리 한국어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자와 고문에도 조예가 깊다고 들었다. 언어 문제는 어떻게 극복했나? “한국에 오기 전에 1년 동안 런던대학에서 한국말과 한자 기초를 배웠다. 그다음에 농민·학생들, 아는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며 한국말을 배웠다. 농민들한테선 사투리도 배우고. 임실성당에 있으면서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6개월간 다니기도 했다. 일요일 미사 끝나고 기차 타고 서울 왔다 월~금요일 공부하고 임실로 내려가는 생활이었다.” -1964년 전북 임실성당에 부임했을 때 당시 임실군수가 “신부님! 이다음에 떠나실 때 우리 임실군민들에게 뭔가 하나쯤은 남겨주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그게 계기가 돼 임실에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나? “사람들이 ‘벨기에는 부자인데, 한국은 왜 가난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랬다. 벨기에는 할아버지들이 희생을 많이 해서 잘살고, 한국은 조상들이 기술을 배우지 못해 못산다. 여러분이 희생해서 자손들은 잘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또 임실은 뭐가 있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산에 (나무가 없어서) 풀이 많고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풀을 뜯는 산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들었다. 치즈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3개월 유럽을 다녀왔더니 그새 함께 일하던 12명 중 1명을 빼고 다 그만뒀다. “3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양들도 다 팔아치우고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다. 농가에서 우유를 신선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들인 노력이 너무 아까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임실치즈가 유명해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내분이 발생했다. 지금은 4개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본래 임실치즈와 관련이 없는 곳에서 피자체인을 만들자고 했다. 내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라고 했다. 임실치즈를 위하는 길이라면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실치즈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업체들이 서로 다투면 결국 농민들이 손해다. 그래서 입을 닫고 있다. 4개 브랜드가 서로 협조하도록 3년 전에 4명의 대표를 이 자리에 초대했다. 일년에 몇번씩 만나자고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그러나 브랜드가 많아져 치즈마을과 테마파크 등의 사업으로 연계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1984년 장애인공동체 무지개 가족의 지도신부가 됐고,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애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신학교 있을 때도 장애인 문제에 관심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거의 30년 동안 장애인을 볼 수가 없었다. 치즈공장 할 때도 장애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활동하고 일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장애인이 된 후 장애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좀더 건강했을 때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지학순 주교의 민주화투쟁 도운건 신부의 역할
다리에 장애 안게된뒤 중증장애인 위해 헌신
다음세대에 역사 전하려 천주교사 정리 도와 -1970년대 유신정권 때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석방 투쟁을 했다. 민주화 투쟁으로 추방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사람이 뭣 때문에 한국에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 벨기에에는 문제가 없냐? 할 테면 벨기에나 가서 해라’라고 했다. 나는 항상 천주교 신부들과 함께했다. 전주교구 신부로서 했다. 만약 그때 안 했으면 너는 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느냐고 했을 거다. 김대중 재판받을 때도 갔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니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외국사람으로서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박정희 시대와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학생들이 고문당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신부님의 삶을 엮은 <치즈로 만든 무지개>가 2007년 발간됐는데, 책이 나온 계기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치즈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여기 오라고 했다.”(황성신씨가 옆에서 “인터넷에 신부님에 대한 기사가 많은데 책으로 나온 게 없었다. 신부님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는데 책이 나오니 편해졌다”고 거들었다.) -<치즈로 만든 무지개> 말미에 이렇게 나온다. ‘내가 만약 지금 다시 신부 서품을 받던 20대로 돌아가면 한국이 아니라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 당시는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했기에 한국을 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리카가 더 가난하니 아프리카를 택하는 것이 옳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인가? “그렇다. 그래서 조금 힘있을 때 그만뒀다. 우리 후배들,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도록.” -한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르겠다’고 하셨다. 예수님 말처럼 우리들도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 약한 사람을 종으로 생각하지 말고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장관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교들이 우리 신부들을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고, 신부들도 신자들을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정환 신부가 걸어온 길
벨기에 귀족 출신…‘봉사하는 삶’ 많은 상 받아
1931년 12월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디디에 세스테벤스. 세례명이기도 하다. 나중에 지정환이란 한국이름을 지을 때 ‘디디에’에서 ‘지’를 따왔다. ‘환’은 그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도움을 준 김이환 전주교구 부주교의 끝자를 사용했다. 가운데는 발음이 편한 ‘정’을 선택했다.
1958년 사제로 서품된 그는 루뱅예수회 성알벨도신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12월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서 부산항에 도착했다. 1961년 전북 부안성당에 부임한 뒤, 농민들과 함께 바다를 막아 99만㎡(30만평)의 땅을 만들었다. 그러나 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쓸개에 이상이 생겼다. 수술을 위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1964년 전북 임실성당으로 복귀했다. 임실에서는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들었고, 농가소득을 위해 농민들과 산양을 기르다가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공장을 만들었다. 농가에서 우유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어려워 실패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포르살뤼·체더·모차렐라 등 다양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한 지학순 원주교구 주교가 내란선동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자, 그는 전주교구 신부로서 석방 투쟁에 참여했다가 강제추방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1981년 신경이 이상 증상을 보이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으로 다리가 불편해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치료에 실패한 채 1983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의 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1984년 장애인 공동체 ‘무지개 가족’의 지도신부가 돼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다. 2002년에는 호암상 사회봉사부문 등 많은 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전북명예도민증을 받았다. 그는 상을 받으면서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봉사란 그저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2003년 무지개 가족의 지도신부직에서 사임했다. 그 뒤 전북 완주군 별아래 마을에 살면서 한국 천주교 교회사의 전산화 작업을 돕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의 부탁이 계기가 됐다. 임실성당 후임자였던 김 신부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임실에서 전주까지 30㎞ 이상을 자전거로 달려간 일화가 있다. 잘 알아보기 힘든 1830년대 프랑스 신부 편지와 일기 등을 판독하면서 지금까지 1만쪽(A4용지) 이상을 타이핑했다. 다음 세대에게 역사를 전해주기 위함이다.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호암상으로 받은 상금 1억원, 임실치즈농협에서 매달 100만원씩 보내온 돈, 지정환임실치즈피자의 판매수익금 등 모두 5억원으로 출발했다. 지금은 7억원으로 불었다. 학기마다 40명의 장애인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금도 직접 운전할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도우미가 가사를 도와준다. “지금 앞에 있는 음식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할 만큼 긍정적이며 낙천적인 성격이다. 도우미의 어려움을 걱정해 아침과 저녁은 빵과 우유, 치즈 등으로 하고 점심만 한식이다. 한국 음식 중에 가리는 것이 거의 없지만, 여전히 번데기만은 먹지 못한다. 그는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더라도 어디에 묻힐지는 관심이 없다. 교구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한국에 묻히고 싶어한다.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지금, 벨기에를 방문하더라도 자신은 무거운 짐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국적과 종교를 초월해 한국의 하늘 위에 무지개를 띄웠다. 50년 이상 된 살구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임실성당 부임뒤 군민 도우려 치즈생산 도전
“처음엔 실패의 연속…3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이땅의 농민과 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산 외국인 신부가 있다. 임실치즈를 탄생시킨 벨기에인 지정환(80) 신부다. 그는 52년 전인 1959년 한국에 와 한국 농민들에겐 낯선 외국 음식인 치즈를 만들어 팔아 농가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한국 민주화를 위해선 추방 대상자로 내몰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안게 된 뒤에는 중증장애인들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외국인 사제로서 반세기를 한국인과 함께한 그의 근황이 궁금했다. 어렵게 연락처를 구했지만,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다. 노신부의 외부 창구 구실을 하는 황성신씨가 기자를 가까운 친구라고 소개하고서야 가까스로 인터뷰가 가능했다. 언론을 피하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기자들이 당신을 무슨 영웅인 양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춰 소설을 쓰고 전설을 만드는 것이 마땅찮다고 했다. 왕실 출신이 아닌데도 왕족으로 만든 것이 대표적이라며 웃었다. 기자를 기피하는 또다른 이유는 사람이란 유명해지면 교만해지기 쉬워서 그것을 경계하고자 함이라고 했다. 올해 팔순인 지 신부는 지금은 퇴역해 전북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 157-2에 꾸린 ‘별아래’에서 혼자 산다. 별아래는 북한 땅인 강원도 이천군의 한 마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휠체어를 탔지만 건강해 보였다. 전라도 사투리도 조금 썼다. 인터뷰는 그가 머무는 별아래에서 진행했다. 노신부가 피곤할 것을 걱정했지만, 2시간을 넘기는데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인터뷰를 돕던 황씨는 “임실치즈가 다른 치즈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저는 지 신부님의 인류애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들었다. 왜 사제의 길을 택했나? “귀족은 권리가 아니고 의무라고 배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일찍부터 교육받았다. 신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7살 때부터 했다. 신부가 되면 벨기에를 떠나 어려운 데 가서 일하고 싶었다.”
-신부님의 인생 역정을 다룬 책 <치즈로 만든 무지개>를 보면, 벨기에 신부들은 벨기에령이었던 아프리카 콩고에서 주로 활동했다. 신부님은 왜 낯선 동양 한국을 선택했나? “당시 콩고는 (한국보다) 잘살았다. 고교를 1950년 6월24일 졸업했는데, 이튿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쟁이 끝나면 한국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다. 내가 그곳에 가면 뭔가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계기였다. 나중에 신학교에서 한국으로 신부를 보내려 할 때 내가 자원했고, 천주교 전주교구의 초청도 받았다.” -신경에 이상 증세를 보이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으로 다리가 불편하시다. 이 병 때문에 1981년에 벨기에로 갔다가 1983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에서 한국에 돌아왔다. 지금 건강은 어떤가? 그때 왜 한국에 돌아왔나? “신부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학교가 나를 전주교구로 보냈기 때문에 나는 전주교구 소속 신부다. 다리를 한국에서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치료차 본국엘 갔는데, 프랑스 파리대학에서도 치료할 수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시 내 소속 교구로 돌아왔을 뿐이다. 1963년에도 쓸개 때문에 본국에서 수술을 받고 다시 전주교구로 돌아왔다. 배꼽 밑으로는 감각이 없다. 4년 전부터는 눈에도 문제가 생겨서 잘 보지 못한다. 나빠지다가 회복되고 이를 반복한다.” -한국인이나 다름없는데, 귀화를 생각해본 적은 없나? “내가 귀화를 했다고 해서 여러분이 나를 한국사람으로 생각하겠나? 한국사람들은 일본에 가서 100년을 살아도 재일동포다. 아무리 한국말 몰라도 재일동포다. 미국은 귀화하면 미국사람으로 생각한다. 내 선배(신부)가 한국에 와서 귀화했지만, 아무도 그를 한국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 웃어버린다. 한국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나에게 최고 좋은 나라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다.” -한국에 오기 전에 영국에서 미리 한국어를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한자와 고문에도 조예가 깊다고 들었다. 언어 문제는 어떻게 극복했나? “한국에 오기 전에 1년 동안 런던대학에서 한국말과 한자 기초를 배웠다. 그다음에 농민·학생들, 아는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며 한국말을 배웠다. 농민들한테선 사투리도 배우고. 임실성당에 있으면서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6개월간 다니기도 했다. 일요일 미사 끝나고 기차 타고 서울 왔다 월~금요일 공부하고 임실로 내려가는 생활이었다.” -1964년 전북 임실성당에 부임했을 때 당시 임실군수가 “신부님! 이다음에 떠나실 때 우리 임실군민들에게 뭔가 하나쯤은 남겨주십시오”라는 말을 했다. 그게 계기가 돼 임실에서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나? “사람들이 ‘벨기에는 부자인데, 한국은 왜 가난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랬다. 벨기에는 할아버지들이 희생을 많이 해서 잘살고, 한국은 조상들이 기술을 배우지 못해 못산다. 여러분이 희생해서 자손들은 잘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또 임실은 뭐가 있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산에 (나무가 없어서) 풀이 많고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과 풀을 뜯는 산양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들었다. 치즈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3개월 유럽을 다녀왔더니 그새 함께 일하던 12명 중 1명을 빼고 다 그만뒀다. “3년 동안은 정말 힘들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양들도 다 팔아치우고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해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다. 농가에서 우유를 신선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들인 노력이 너무 아까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임실치즈가 유명해지고 규모가 커지면서 내분이 발생했다. 지금은 4개 브랜드가 경쟁하고 있다. “본래 임실치즈와 관련이 없는 곳에서 피자체인을 만들자고 했다. 내 얼굴과 이름을 빌려달라고 했다. 임실치즈를 위하는 길이라면 나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실치즈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업체들이 서로 다투면 결국 농민들이 손해다. 그래서 입을 닫고 있다. 4개 브랜드가 서로 협조하도록 3년 전에 4명의 대표를 이 자리에 초대했다. 일년에 몇번씩 만나자고 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그러나 브랜드가 많아져 치즈마을과 테마파크 등의 사업으로 연계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1984년 장애인공동체 무지개 가족의 지도신부가 됐고,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장애인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신학교 있을 때도 장애인 문제에 관심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와서 거의 30년 동안 장애인을 볼 수가 없었다. 치즈공장 할 때도 장애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활동하고 일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장애인이 된 후 장애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좀더 건강했을 때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지학순 주교의 민주화투쟁 도운건 신부의 역할
다리에 장애 안게된뒤 중증장애인 위해 헌신
다음세대에 역사 전하려 천주교사 정리 도와 -1970년대 유신정권 때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석방 투쟁을 했다. 민주화 투쟁으로 추방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국사람이 뭣 때문에 한국에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 벨기에에는 문제가 없냐? 할 테면 벨기에나 가서 해라’라고 했다. 나는 항상 천주교 신부들과 함께했다. 전주교구 신부로서 했다. 만약 그때 안 했으면 너는 왜 한국이 안고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느냐고 했을 거다. 김대중 재판받을 때도 갔다. 나중에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니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외국사람으로서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지만, 적어도 박정희 시대와 지금은 달라지지 않았나? 학생들이 고문당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신부님의 삶을 엮은 <치즈로 만든 무지개>가 2007년 발간됐는데, 책이 나온 계기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치즈에 대해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여기 오라고 했다.”(황성신씨가 옆에서 “인터넷에 신부님에 대한 기사가 많은데 책으로 나온 게 없었다. 신부님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매번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는데 책이 나오니 편해졌다”고 거들었다.) -<치즈로 만든 무지개> 말미에 이렇게 나온다. ‘내가 만약 지금 다시 신부 서품을 받던 20대로 돌아가면 한국이 아니라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 당시는 한국이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했기에 한국을 택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프리카가 더 가난하니 아프리카를 택하는 것이 옳다. 아프리카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 생각인가? “그렇다. 그래서 조금 힘있을 때 그만뒀다. 우리 후배들, 젊은 사람들이 더 많이 일할 수 있도록.” -한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종으로 부르지 않고 친구로 부르겠다’고 하셨다. 예수님 말처럼 우리들도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 약한 사람을 종으로 생각하지 말고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장관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교들이 우리 신부들을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고, 신부들도 신자들을 친구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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