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4월8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교육부장관실에서 전교조 집행부와 오병문 교육부 장관이 역사적인 첫 악수를 하고 있다. 전교조 결성 이후 4년 만에 이뤄진 이날 면담에서 필자(오른쪽 두번째)는 1500명 해직교사의 조건없는 전원복직을 요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해숙-아름다운 선생님의 멘토 75
1993년 3월1일 청화 큰스님께서 미국에서 귀국하기로 한 날이 왔다. 마침 3·1절 공휴일이라 하루 전날 저녁에 곡성 성륜사로 내려갔다. 사실 내심 걱정이 있었다. 위원장 출마에 대해 큰스님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국에 계셔서 미처 상의를 드리지 못했던 까닭이다. 주지스님께서 김포공항으로 큰스님 마중을 나간다고 하시기에 “큰스님께 제가 위원장을 맡았다는 얘기를 먼저 말씀해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사실 주지스님은 위원장 당선 직후 내가 영생회 회장 일을 그만두겠다고 얘기하자 “그냥 그대로 겸해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의를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전교조가 어느 정도의 활동을 하는지 자세히 모르셨기 때문에 그리 말씀하신 듯했다. 주지스님은 어느날 출타했던 길에 신문에서 나의 위원장 당선 인터뷰 기사를 보셨다고 했다. 아마도 전교조의 조직 규모와 위원장 활동의 엄중함에 대해 짐작하신 듯했다.
예정대로 그날 청화 큰스님을 모시고 성륜사에 도착한 주지스님은 ‘문수행(내 법명)님이 전교조 위원장을 맡게 되셨다’고 말씀드리니 큰스님께서 대번에 “아, 그거 잘한 일입니다” 하며 반기셨다고 전해주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공부나 하지 왜 위원장을 맡았냐’고 야단치실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큰스님의 무언의 지지는 내내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민정부 출범을 앞두고 93년 초부터 해직교사 원상복직 문제는 가장 중요한 사회 현안으로 떠올랐다. 전교조로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였다. 3월4일 국제노동기(ILO) 이사회는 한국 정부에 ‘공무원과 교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보장, 제3자 개입 금지조항 폐기, 해직교사 복직에 필요한 조처’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권고안을 채택했다. 곧이어 우리 집행부는 기자회견을 열어 ‘조건없는 해직교사 전원복직과 전교조 합법화’를 촉구했다. “전교조 탈퇴를 전제로 한 선별복직이나 임용시험을 통한 신규발령 등은 수용할 수 없다. 교육부와 대화를 통해 당면 교육문제를 논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요구사항을 분명히 밝혔다.
같은 날 한국교총은 전교조 탈퇴를 전제한 해직교사 복직과 전교조 해체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교조의 대국민 사과, 해직교사의 전교조 탈퇴, 복직 후 위법활동 중지 약속’ 등 구체적인 조건도 내걸었다. 이어 3월29일에는 한국초등교육협의회 등 13개 교장단 대표들이 ‘전교조 해체, 해직교사 복직 반대’ 내용의 건의서를 청와대·국회·교육부에 제출했다.
국제단체의 적극적인 지지와는 상반되는 국내 교원단체의 방해 활동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해직교사 원상복직을 위한 전교조의 발걸음은 꾸준하고도 다각도로 계속되었다. 3월말 ‘전국해직교사원상복직추진위원회’(원복추위)를 발족시켜 복직 투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4월 들어서는 지역별로 ‘해직교사 복직 촉구 각계인사 선언’도 이어졌다. 선언에 참여한 함세웅 신부, 이영순 여성단체연합 공동의장, 문익환 목사, 리영희 교수 등은 기자회견을 열어 “해직교사 복직을 위한 문민정부의 가시적 노력이 진전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해직교사 복직과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촉구했다. 4월19일부터 27일까지는 18명의 전직 중집위원 중심으로 행진단을 구성해 제주에서 서울까지 전국 13개 도시를 걸으며 복직 지지 여론을 확산시켰다. ‘교육개혁과 해직교사 원상회복을 위한 온나라 행진’으로 이름 붙인 이 대장정에서는 가는 곳마다 주민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집행부에서는 교육부와 협상도 병행했다. 4월8일 오후 5시, 정부 제1종합청사 교육부 장관실에서 전교조 위원장인 나와 오병문 교육부 장관이 첫 공식 만남을 가졌다. 전교조 결성 이후 첫 대면이었던 만큼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청사에 도착해 장관실까지 들어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지 눈이 부셨고 급기야는 장관실의 화분이 넘어지기도 했다. 솔직히 그런 관심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장관 취임을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첫인사를 주고받고 자리를 잡자마자 나는 윤영규 전 위원장의 수배를 해제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만남은 1시간40분 남짓 진행되었다. 전교조 쪽에서는 유상덕 수석부위원장과 이영주 사무처장, 정진화 부대변인이 함께했다. 교육부에서는 이천수 차관과 박용진 장학편수실장, 허만윤 교직국장이 배석했다.
나는 해직교사 문제에 대해 정부가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크게 감싸안는 자세로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해직교사들은 학교 밖에서도 현장 조합원들과 함께 각종 교육 세미나와 참교육 실천대회를 여는 등 꾸준히 연구·실천하고 있습니다. 전교조 시·도지부의 각종 연구활동을 통해 발표된 자료를 제출한다면 아마도 트럭에 싣고 와야 할 정도로 방대할 것입니다.” 오 장관은 해직교사 문제 해결은 화해와 신뢰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며 실무접촉을 계속 갖자고 했다. 첫 만남은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
나는 해직교사 문제에 대해 정부가 조건을 내세우지 말고 크게 감싸안는 자세로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해직교사들은 학교 밖에서도 현장 조합원들과 함께 각종 교육 세미나와 참교육 실천대회를 여는 등 꾸준히 연구·실천하고 있습니다. 전교조 시·도지부의 각종 연구활동을 통해 발표된 자료를 제출한다면 아마도 트럭에 싣고 와야 할 정도로 방대할 것입니다.” 오 장관은 해직교사 문제 해결은 화해와 신뢰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며 실무접촉을 계속 갖자고 했다. 첫 만남은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전 전교조 위원장(구술정리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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