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박흥주 대령의 두 딸이 서울 행당동의 집에서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란 팻말을 든 채 울고 있다. <문화방송> 제공
거사 가담한 박흥주 대령의 유언
1988년 봄, 나는 서울 행당동 ‘달동네 13평짜리’ 박흥주 대령의 집을 찾아 언덕길을 올랐다. 79년 ‘10·26’ 재판 때 그의 청렴함을 환기시켜줬던 바로 그 집이었다. 거사를 도운 6명 가운데 현역 군인 신분이란 이유로 그는 80년 3월6일 시흥시 소래의 야산에서 가장 먼저 총살형을 당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1남2녀가 있었다. 당시 김재규 구명운동을 주도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생이던 그의 큰딸 대학 등록금용으로 산업은행에 100만원을 예탁해 놓았다. 한동안 잃어버렸던 그 예탁증서를 되찾아 전해주러 간 길이었다. 나는 한사코 돈을 받지 않으려는 부인의 물 젖은 손에 증서를 던지듯 쥐여주고 나왔다.
이후 내내 박 대령을 위해 조금은 좋은 일을 했다고 믿어왔던 나는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사실을 확인했다. 2006년 ‘10·26’ 관련 자료를 뒤지다 우연히 박 대령이 사실상 사형이 확정된 뒤인 80년 2월2일에, 가족에게 보낸 유언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요.…의연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
그런데 정작 그 가족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해준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해준 것은 또 무엇이 있었던가. 우리는 그렇게 그 일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김재규와 ‘10·26 거사’에 가담한 부하들의 의리는 감동적이었다. 부하들은 단지 상사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김재규를 믿고 존경해 죽음의 길까지 기꺼이 함께했다.
80년 1월28일 항소심 결심 선고날, 이들은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재판이 끝나자 김재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5명(박선호·박흥주·이기주·유성옥·김태원)의 부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모두들 건강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법정을 떠났다.
이후 5월23일 사형집행을 예감한 김재규는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라며 “훗날 그들이 죽게 되면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하들은 결국 ‘내란주요임무 종사자’로 몰려 전두환 군부에 의해 서둘러 처형됐다.
지금 김재규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 박선호는 고양, 박흥주는 포천, 이기주는 양주에 있다. 언젠가는 과연 김재규의 소원대로 그들이 함께 묻힐 수 있을까?
정리/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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