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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백성과 나라와 임금 중 가장 귀한 건 백성이다”

등록 2012-01-01 20:52

송담의 작은 서재에는 그가 번역한 유교 경전 10서, 강학집 <송담 강학록> 등과 함께 여러 권의 자작 시문집들도 있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하자 “자기 글을 자기가 옮기는 것은 우습제. 나가 죽은 뒤에 누군가 맡아주면 고맙제”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A href="mailto:daeha@hani.co.kr">daeha@hani.co.kr</A>
송담의 작은 서재에는 그가 번역한 유교 경전 10서, 강학집 <송담 강학록> 등과 함께 여러 권의 자작 시문집들도 있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하자 “자기 글을 자기가 옮기는 것은 우습제. 나가 죽은 뒤에 누군가 맡아주면 고맙제”라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마지막 유학자’ 송담 이백순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군주시대에도 유교의 기본은 민주주의
국민들 뜻 잘 살펴서 사람 쓰는 게 선거

2012년 새해가 밝았다.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니 올 한 해의 화두는 두말할 것 없이 정치다. 이전투구라도 승자만이 정의가 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벌써부터 어지러운 국민이 많을 듯하다.

광주 무등산 증심사 가는 길의 일명 ‘배고픈 다리’ 부근 작은 집을 찾아간 것은 크리스마스날이었다. 낡은 양옥 2층의 두칸짜리 서재 겸 사랑방에서 송담 이백순(82)옹을 만났다. 송담은 호남지방에 몇 남지 않은 근대 유학의 마지막 대가로 꼽힌다. 후학들 중에는 그가 지방에 은거하지 않았다면 더욱 큰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가 많다.

유교는 고리타분한 옛날의 윤리체계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천년 이상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떠받쳐온 ‘보이지 않는 축대’이다. 새해 첫 인터뷰를 위해 굳이 옛 유학자를 찾아 나선 것은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기본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걱정 때문이었다.

송담은 일생을 한 몸에 응축시킨 듯한 작고 구부정한 체구, 커다란 귀를 가진 소년의 얼굴과 형형한 노안이 은자의 상을 연상케 했다. 큰절로 인사를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노경이 역력한 그는 자주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처음 뵙습니다. 인터뷰를 자주 하셨나요?

“최근에는 한 적이 없고, 수년 전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학문은 어떻게 하시게 되었습니까?


“본래 신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상급 학교에 가지 못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필생의 학문으로 선택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내가 학문을 하고자 할 때 우선 세계적으로 보니 불교와 예수교, 유교가 있었습니다. 공자는 인간의 윤리를 중심으로 봤고, 예수교는 차등 없는 사랑을 말하고, 불교는 세속과 인연을 끊는 데서 공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셋 다 성인이지만, 석가와 예수의 말은 인간 본성과는 맞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유학에는 주자의 학문과 육왕(중국 송나라 시대의 상산 육구연과 명나라의 양명 왕수인)의 학문이 있는데, 마음에서 이치를 찾자는 육왕보다는, 성현의 도를 연마하고 힘써 실천하자는 주자에 마음이 더 끌렸습니다. 제아무리 양심을 지키고 덕성을 높인다 해도 아는 것이 없으면 엄한 길로 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자를 좇았습니다. 우리나라 주자학을 놓고 또 공부해 보니 우암(송시열)의 학문이 바르고 컸습니다. 우암 이후로는 학문적 연원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학맥이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암 이후 노론 안에서 호론이니 낙론이니 하며 갈라져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 싸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따지고 보면 큰 것이 아닙니다. 같은 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보고, 다른 점에서 같은 점을 찾아보는 게 옳은 학문의 자세이지, 어떻게 하나가 아니면 전부가 아니고, 하나가 맞다고 전부가 맞다는 말입니까? 이건 편벽함입니다. 나는 할아버지나 선생님의 말씀이라도 내가 생각해 맞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늘 날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했습니다.”

-호남지방은 노론의 반대당인 남인의 학풍이 강한 곳으로 알고 있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나는 우암의 노론 쪽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지만, 당색을 떠나 남소(남인과 소론) 쪽 사람들과도 상대해 봤습니다. 이런 말 하면 안 좋아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내 안목에서는 노론 쪽에 좀더 군자지풍이 있었습니다. 우암도 사람이니 장단점이 있지만, 학문만큼은 정대합니다. <송자대전>을 읽어보면 그가 대학자이고 큰 학문이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우암과 노론을 따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실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실학도 필요하지요. 의리만큼이나 경제도 중요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왜 안 중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조선이 망한 이후로 우리나라가 몇백배 발전하였지만, 오늘날 사람의 의리는 아주 후퇴하였습니다. 노인들이 빈 방에서 홀로 죽고, 가정은 파괴되어 자식들이 갈 곳을 잃고, 형제간의 우애도 많이 약해졌습니다. 이제는 이런 점으로도 위정자가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실리적인 경제만 생각하다 보면 부자로 살면서도 한없이 불행한 사람들만 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는 유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유학의 기본은 한마디로 순리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암수가 있습니다. 하늘의 이치는 음양이 서로 교합하여 자식을 낳고 기르라는 것입니다. 짐승도 때가 되면 알아서 새끼를 낳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제 새끼를 이뻐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이니 이것이 하늘의 순리입니다. 순리의 시작은 부자유친, 나아가 오륜입니다. 유교는 순리 두 글자로 시작되고 귀결됩니다. 천리입니다.”

-개인이나 가족 윤리에만 치우친 건 아닐까요?

“불교에서 무소유를 말합니다.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알겠으나, 크게 보아 ‘두고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은 순리가 아닙니다. 교사는 자신의 직분에 ‘유소유’하고 상공인은 상공에, 국방인은 국방에, 모두가 자기의 맡은 바 직분에서 최선을 다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교는 자신으로부터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이치를 넓혀가며 실천하는 것이지 한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유교를 봉건시대의 철학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면?

“유학은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주어진 세상에 적합하게 살도록 가르칩니다. 과거에 상투 틀고 도포를 입었다고 오늘날에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유학의 참된 정신이 아닙니다. 유건을 써도 행동이 그르면 유자가 아니고, 양복을 입어도 행동이 바르면 유자입니다. 유학에 반대하는 분들도 유학이 말하는 순리의 이치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현대인의 삶에 얼마든지 적용 가능한 것이 유학의 가르침입니다.”

-옛날의 유학이 현대 사회제도와 조화를 잘 이룰 수 있을까요?

“만인이 임금 한 사람을 받들고 신하 노릇을 하던 시절에도 유학에서만큼은 ‘민’이 기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맹자>에 ‘민위귀(民爲貴)하고 사직차지(社稷次之)하고 군위경(君爲輕)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다음이 나라이고, 임금은 기중 가벼운 존재입니다. 유교의 기본정신은 옛 군주시대에도 민주주의였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편벽한 태도가 잘못
자기 당색 고집말고 상대 헤아려야

-민주주의는 국민이 선거로 통치자를 뽑습니다.

“다시 맹자를 말하면, ‘좌우의 신하와 대부들이 다 현인이라고 천거해도 국민이 모두 그렇다고 한 뒤에야 자세히 살펴보고 등용하고, 좌우의 신하와 대부들이 다 등용이 불가하다고 말해도, 국민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한 뒤에야 자세히 살펴보고 내치며, 좌우의 신하와 대부들이 다 죽일 만하다고 해도, 국민들이 모두 죽일 만하다고 한 뒤에야 자세히 살펴보고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 선거의 본뜻이 이런 게 아닙니까? 기본은 같은 것입니다.”

-정치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정치는 ‘바를 정’이요, ‘추스를 치’입니다. 내가 먼저 바르고자 하는 것이 정(政)이고, 내가 바른 뒤에 남이 바로 서도록 추슬러 주는 것이 치(治)입니다. 정치란 실이 헝클어져 있을 때 빗질을 해 제 가닥을 찾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실 가닥처럼 가지런히 하여 백성들이 제각기 자기 직분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과거에도 당파가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대립합니다.

“진보든 보수든 편벽한 태도가 잘못입니다. 자기 당색만 고집해서야 못 씁니다. 상대방을 참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하를 알고 선후배 예절을 아는 것은 주의주장을 떠나 기본이지요.”

-북한 3대 세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아마 거기에도 그런 체제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김정일이가 꽉 잡아놓고 갔으니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겠고, 문제는 김정은이가 과연 적격자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스물아홉살이라는데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니 지금으로서는 가타부타 논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평생을 유학 공부에 바치셨는데, 독자들에게 좋은 책을 추천한다면?

“사서오경이 다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논어>가 으뜸이지요.”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은?

“논어는 첫머리부터 끝까지 안 좋은 말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는 천하제일의 책입니다.”

-수신(修身)의 요체를 알려주십니오.

“첫째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마음이 둥둥 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둘째는 앞서 깨친 사람들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배운 바를 부지런히 실천하려는 자세, 그것이 수신입니다.”

공부란 마음 바로잡고 큰 뜻 세우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노력하는 데 있다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강조한 말씀은?

“공부하기 전에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마음을 바로잡아라, ‘바를 정’ 자 한 자를 가슴 깊이 새겨라. 대지(大志)를 가져라, 마음이 발라도 뜻이 크지 못하면 향리의 좋은 선비란 소리는 들을지언정 큰 사람은 못 된다. 노력하라. 바른 마음으로 뜻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그럽니다.”

-보통사람들에게 ‘대지’는 너무 큰 목표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하면 으레 무슨 성인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마음먹는 자체가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뜻이 작으면 장래가 보잘것없어집니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무릇 뜻은 커야 합니다.”

-선비란 그런 사람입니까?

“뜻을 바르게 갖고,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지요. 마음이 바르지 못하거나 뜻이 작은 사람은 제대로 된 선비가 못 됩니다. 아무리 인물이 좋고 벼슬이 높아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한갓 소인일 뿐입니다.”

-유학자로서 자신의 팔십 평생을 논평한다면?

“사람은 남이 평가하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평해요? 나는 보잘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젊어서 세운 뜻을 이루고자 한시도 쉬지 않았을 뿐입니다.”

송담은 평생을 강학료와 번역료로만 생계를 이었다. 수업료는 정해진 액수가 따로 없었고, 번역료는 원고지 1장 당 7000원에서 1만원이었다. 송담은 그 수입으로 7남매를 교육시키며 가장의 의무를 다했다. 그는 식자로서 생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것은 최대한 다 알려주려 했고, 남의 소중한 글을 옮김에 내가 가진 지식을 아끼지 않았다.”

송담 이백순
송담 이백순
이백순은

문·사·철에 두루 밝아 유학 10대 경전 완역

송담(松潭) 이백순은 1930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비상한 기억력으로 일본인 교사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이상을 다니지 못했다. 19살 때까지 조부한테, 21살 때까지는 인근의 명유들을 찾아가 한학을 배웠다. 그가 가르침을 받은 유학자로는 효당 김문옥(전남 화순), 현곡 류영선(전북 고창), 현산 이현규(충남 대덕), 양재 권순명(전북 정읍) 등이 있다.

그의 조부인 낙천 이교천은 고향에 덕산정사를 짓고 학문을 가르친 명망 높은 선비로, 노론의 태두 우암 송시열의 학맥을 이은 간재 전우(1841~1922)의 문하이다. 이 때문에 송담도 노론 학맥으로 분류되나 스스로는 학문 연원에 집착하지 않는다. 같은 기호 학맥 안에서도 호론파(김문옥 이현규)와 낙론파(권순명) 양쪽을 넘나들며 배운 탓에 스스로 학문적 편벽을 가장 경계한다.

본격적인 강학에 나선 마흔살 무렵부터 1989년 주암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수몰될 때까지 덕산정사에서, 이후에는 광주에서 제자를 가르쳐 후학이 전국에 걸쳐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저작으로는 <송담 강학록>(2권)과 한문학 개론서인 <한문학 대계>가 대표적 저술이며, 유학의 10대 경전을 모두 완역한 것도 그의 필생의 업적으로 꼽힌다. 이밖에 그의 손을 거쳐 번역된 고문집과 비문 등도 수백종이다. 선조 때의 문신 미암 유희춘이 초서로 쓴 방대한 분량의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춘향전의 지은이로 추정되는 영조시대의 문장가 무극재 양주익의 문집, 조선 후기 대학자인 노사 기정진의 <노사집> 등이 대표적이다.

송담은 경전 해석뿐 아니라 문장과 서예에도 일가를 이뤘다는 평을 받고 있다. 64살 때 주자의 고향을 방문했을 때 그가 짓고 글씨를 쓴 시는 동행한 중국 학자들을 감탄케 했다. “평생을 주자를 존경하고 사모했는데/ 남긴 터에 와서 보니 감회가 한량없다/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제자의 몸으로/ 백세를 이은 선생의 공을 감히 잊을 수 있으랴/ 맑은 물은 굽이굽이 예와 같이 흐르고/ 기암괴석은 높고 높아 서쪽이 동쪽과 같더라/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고자 고난을 다하셨건만/ 지금의 기풍이 그때와 다른 것을 어찌할거나.”

한문학자 안동교 박사는 송담에 대해 “생존해 있는 원로 한학자 가운데 문학, 역사, 철학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라고 평가하고 “중앙 학계로 나와 활약할 수 있었더라면 더욱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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