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박종철(앞줄 가운데)은 1년 재수 끝에 1984년 3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 뒤 고교 동창의 권유로 지하 이념서클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해 자연스럽게 운동권 학생이 됐다. 사진은 언어학과 동기들과 함께한 모습.
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20
1983년 막내 철이(박종철)는 서울 종로학원을 다니며 재수를 했다. 그해 여름 12주에 걸친 방학이 시작되었다. 막내가 보고 싶었던 아내는 부산에 내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철이는 거절의 편지를 보내왔다.
“모두 다 집에 간다고들 하는데 낸들 왜 가기 싫겠습니까? 처음에 갓 서울에 왔을 때는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사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올라올 때 엄마하고 약속한 게 있잖습니까. 시험 치기 전에는 나도 안 내려가고 엄마도 안 올라오기로.”
녀석의 냉정한 말에 야속함이 없진 않았지만 한편 심지가 굳은 아들이 대견했다. 재수시절 철이는 사회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한달에 한번은 친한 친구를 만났다. 그는 혜광고 친구로 서울대 법대에 다니고 있었다. 철이는 그에게 대학생활 얘기도 듣고, 정치 얘기도 나누었다.
맏이 종부와 하숙집 대학생들도 이 시절 막내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다. 종부와 막내가 사는 하숙집은 서강대 정문 맞은편에 있었다. 이 집엔 열두명가량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운동권 학생이었다. 하숙집 주인은 형사들이 워낙 자주 찾아와서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붙임성이 좋은 철이는 형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막내는 대학생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들이 본 세계와 달랐다. 본래 알던 세계의 장막이 서서히 걷히며 아들은 자신이 깨트려야 할 알의 껍질을 보았다. 하지만 껍질을 향해 부리를 들이대는 일은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84년 3월 철이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공무원 선후배들과 지역 인사들한테 태어나서 가장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종부를 서울대에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아내는 나보다 더 행복해했다.
철이가 대학에 합격하자 종부의 멘토인 빌라레알 펠릭스 신부는 형제에게 축하주를 쏘겠다며 단골 실비집으로 데려갔다. 셋이서 소주를 마셨는데 술집 문이 닫힐 시간이 되어도 술이 모자랐다. 이들은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든 뒤 아예 문을 닫고 밤새 마셨다. 세 사람 중 종부가 맨 먼저 술에 곯아떨어졌다. 펠릭스 신부는 서강대에서 소주를 물처럼 마시는 이로 유명했는데 철이는 흔들림 없이 아침까지 대작했다고 한다. 해인대 시절의 나와 녀석이 대작한다면 누가 마지막까지 남을지 궁금하다.
철이는 입학과 함께 형과 헤어져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재수시절 만났던 그 법대생 친구가 갓 입학한 아들에게 이념서클 활동을 권유했다.
“니 여태까지 고민하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곳에서 공부해볼 생각 없나?” 아들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했다. 이때 철이는 학생운동 문화에 스스럼없이 동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하서클에 가입하던 날 선배들이 몇 가지 수칙을 알려주었다. “학교에서 같은 팀원을 만나도 절대로 아는 척을 하지 말 것.” 군부정권하에서 지하서클 활동은 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수칙으로 서로를 보호하고 서클을 유지해야 했다. 가급적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시절 철이의 사진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활동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잡혀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학의 이념서클 활동은 학습과 함께 시작한다. 아들이 서클에서 처음 학습한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민중과 지식인>,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었다. 이 중엔 훗날 나도 읽게 된 책도 있다.
종철은 서클의 첫 엠티에서 말했다.
“이제까지 모든 집회와 투쟁에 한번도 빠진 일이 없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학생들이 모두 놀랐다. 막내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집회에 참석한 것일까? 그날 철이는 책 한 권을 통해 받은 감동을 고백했다.
“재수시절에 형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책들을 접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얼마 전에 읽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해야 할 인물이 누구이며, 가장 열심히 권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이제 결정했습니다. 저는 전태일을 따르고, 전태일의 생활 자세를 배울 것이며, 전태일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생활하겠습니다.”
잠시 말을 끊은 철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열사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를 비장하게 만듭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구술작가 송기역
“니 여태까지 고민하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곳에서 공부해볼 생각 없나?” 아들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문화연구회’에 가입했다. 이때 철이는 학생운동 문화에 스스럼없이 동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지하서클에 가입하던 날 선배들이 몇 가지 수칙을 알려주었다. “학교에서 같은 팀원을 만나도 절대로 아는 척을 하지 말 것.” 군부정권하에서 지하서클 활동은 법을 어기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수칙으로 서로를 보호하고 서클을 유지해야 했다. 가급적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시절 철이의 사진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활동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잡혀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학의 이념서클 활동은 학습과 함께 시작한다. 아들이 서클에서 처음 학습한 책은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민중과 지식인>,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었다. 이 중엔 훗날 나도 읽게 된 책도 있다.
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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