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2월 5·18특별법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 전 대통령(앞줄 맨 오른쪽)을 비롯한 12·12와 5·18 사건 피고인들. 나는 전두환이 우리 집을 곤경에 빠뜨렸지만 이를 처벌하겠다고 소급입법을 해선 안 된다고 여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⑩ 당파성 이야기
2003년부터 3년간 문화방송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를 한 적이 있다. 본사와 지방, 계열사 사장들을 선임하는 힘있는 자리였다. 명절 때면 고가품은 아니어도 지역 토산품들이 십수개씩이나 배달되어서 어머니가 집을 못 비웠다. 노조에서 이사추천을 했는데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을 자유를 주면 하겠노라’고 단서를 달았다. 이 말이 씨가 되었을까. 본사 사장을 뽑는데,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이 찾아와 전 노조위원장을 사장으로 밀어 달라고 했다. 그분은 좋은 분이고 나와 잘 아는 사이였다. 하지만 노조는 노조고 경영진은 경영진이니 노조위원장 출신이 사장이 되면 노사 모두에 안 좋을 것 같다며 다른 뜻을 밝혔다. 당연히 도와줄 걸로 알았던 이들에게는 아주 미안스러웠다. 하지만 어쩌리. 나중에는 노무현 정부와 관계있는 사람들까지 나서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어느 보수 언론은 내 성향을 근거로, 당연히 내가 노 정권의 사주를 받아 전임 노조위원장을 사장으로 추천하는 데 총대를 멘 양 잘못된 추측성 기사를 썼다. 반면에 조선일보 반대운동을 하던 이는 나를 찾아와 어찌 민주진영을 배신하느냐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딱딱거렸다. 아, 이 골치아픈 편 가르기여.
문화방송 노조의 배신자로 찍히다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사람들은 저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솔개가 부러워서 이리 노래한다. 하지만 솔개도 저기 병아리 떼가 있다는 걸 제 짝에게 알려주기 위해 최소한의 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강이며, 푸른 숲, 그 속에 숨어 있는 들쥐를 ‘언어’로서는 아니래도 머릿속에 떠오른 분명한 ‘개념’을 통해, 알아보고 기억할 것이다. 말이며 개념은 우리가 바깥세상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리하고 기억해 두는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유식(唯識)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그 본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 분별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던가. 그런데 말은, 개념은 한번 만들어지면 당초 세상을 알아차리는 수단의 지위를 벗어나서 세상을 규정하려 든다. 마치 그 말에 대응하는 어떤 것이 저 홀로 그리고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양. 저기 창밖에 부슬부슬 어떤 것이 내려오는 ‘순간’을 ‘비’라고 분류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에 비슷한 어떤 것이 내리면 ‘어, 또 비가 오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번 ‘비’라고 이름 붙이고 나니, 마치 ‘비’라는 놈이 있어 저 하늘 꼭대기에 이렇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 밤 내 방 창문 앞으로 부슬부슬 떨어지는 양 착각을 한다. 실상은 그게 아니리. ‘비’라는 실체는 별도로 없고 온도와 습도와 다른 조건들이 딱 들어맞아 수증기가 물이 되어 떨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그저 비라 부를 따름이다. 조건들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고, ‘비’라는 순간은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뭐, 사람이라고 어디 별다른가. 옛날에 까치였던 내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구하려고 종에다 머리를 들이받은 착한 일 덕에 이번 생에서는 사람인 나로 태어났다는 식의 윤회설. 아니면 내 이 모습 그대로 저 요단강 건너가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난다는 찬송가 역시 나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안 거 아닐까. 다정다감한 어머니 유전자와 강한 성격의 아버지 유전자가 서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가 생겨났고, 내가 50여년 세월 겪은 여러 경험들이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 부모 유전자가 달라지고 경험이 달라지면 나는 나가 아니다. 열 살 때 죽은 내 동무는 열 살 어린 아이의 몸과 마음으로, 여든넷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쪼그라들고 병든 모습과 마음으로 저 요단강 건너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부모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이 몸과 마음이 몇 십년이라는 비교적 긴 ‘순간’ 동안 유지되므로 나는 나의 실체가 있는 양 여긴다. 대체로 불교는 ‘실체 없음’에 방점을 두고, 비교적 긴 순간 동안 사실상 실체가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금 여기’를 접어두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기독교는 대체로 만물들이 비교적 긴 순간 동안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조건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순간들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로 붙잡으려 애쓴다. 실체처럼 보이는 ‘지금 여기’들이 모여 세상은 변해 흘러간다. 변하지 않는 우리 편?
단순히 상대편을 처벌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절차를 좀 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오늘은
더이상 당파성이란 말이
절차적 정당성을 누를 수 없다
통진당 파문이 바로 그렇다 전두환을 법정에 세운 5·18특별법에 대하여
1982년쯤이었나.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막내 동생이 운동권이었는데 그 무렵은 소위 주사파들이 판을 장악해 가던 때였다. 이 녀석이 그 동네에서 작성한 문건을 평소 잘 들고 다니지 않는 내 가방 안에 숨겨두었다. 그날따라 이 가방을 들고 나갔던 나는 집에 오는 길에 그만 택시에 이를 두고 내렸다. 동생으로부터 문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가방에는 ‘사법 연수원’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당시 명문이던 군산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줄줄이 잡혀가 긴 옥살이를 한 ‘오송회’ 사건도 국어선생님이 3학년 제자에게 빌려 준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을 버스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시작되었다. 그때 버스기사는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온 식구가 전화통에 매달렸다. 서울에 웬 택시회사가 그렇게도 많은가. 지금 기억으로 이백 몇 십개나 되었는데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혹시 오늘 분실물로 가방 들어온 것 없나요?” 모두 “없습니다”였다. 그 뒤로부터는 괴로운 기다림의 날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경찰이 들이닥치려나. 초조한 나날이 이틀, 보름, 한달가량 지나갔다. 아마 기사양반이 가죽가방만 가져가고 그 안의 서류들은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모양이었다. 동생은 그예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 주동을 하다가 2년여 감옥살이를 했다. 재판 때 주심 배석판사도 변호사도 다 내 연수원 동기들이었다. 주심은 내 핑계를 대고 다른 재판부로 가버렸다. 재판장은 고압적이었다. 동생이 재판거부를 하며 재판장을 향해 살인마의 시녀라고 험한 소리를 하자, 부장판사가 “너는 에미, 에비도 없느냐”고 호통을 쳤다. 마침 방청석에는 어머니, 아버지, 나와 여동생이 앉아 있었는데 여동생이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에미, 에비 여기 있다아. 어디다 대고 에미 에비냐. 당신이야말로 에미, 에비도 없냐?” 동생 녀석은 나와서도 고생을 했다. 부평역 앞에서 ‘한권의 책’이라는 상호로 빵재비 셋이서 동업을 했다. 사회과학 책들을 주로 팔았는데 이 지역 운동권들은 이적표현물로 걸리면 실제와 상관없이 모두 동생 책방에서 샀다고 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경찰에 불려갔고 재판도 받았다. 덕분에 평소 검사, 판사에게 잘난 척 큰소리만 펑펑 치던 소위 ‘인권’변호사가 그들을 찾아가 팔자에도 없는 아쉬운 소리를 했던 거였다. 당시 사무실이 강남역 바로 앞에 있었는데 동생이 도망 다닐 땐 내 사무실 근처에 형사들이 며칠씩 잠복을 했다. 변호사 눈에는 이게 바로 들어오는 법이라 하루는 건물 밖으로 나가 형사들을 덥석 붙잡았다. 하루 종일 힘드실 텐데 내 방에 가서 차 한잔 하시라고. 그들은 잠복이 탄로가 난 데 대해 낭패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동생이 바보가 아닌데 형 만나러 오겠수. 그들은 차 마시고 코가 쑥 빠져서 돌아갔다. 동생은 전두환 덕에 고생 좀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어머니는 그 뒤로도 동생 선후배들을 집에 숨겨 주느라 속을 좀 끓이셨다. 변호사인 큰아들에게 혹 불똥이 튀는 건 아닐까. 그 전두환이 5·18특별법으로 법정에 섰다. 소위 12·12사태와 5·18계엄은 내란죄에 해당되는데 이미 공소시효 15년이 지난 상태였다. 5·18특별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에 대하여 국가소추권행사의 장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동)기간이라 함은 당해범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고 규정했다. 김영삼 정권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공소시효가 정지된 걸로 본다는 것이었다. 민변도 이 법을 만드는 데 적극 간여했다. 1980년대 당파성은 아직도 유효한가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법이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미 공소시효가 다 지나갔는데 이제 와서 전두환, 노태우 재임기간에는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된 걸로 본다는 건 일종의 소급입법 아닌가. 아무리 전두환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죽이고 국헌을 문란케 했고 사적으로는 우리 집을 곤경에 빠뜨렸지만 이를 처벌하겠다고 소급입법을 해선 안 된다고 여겨졌다. 나는 특별법 반대운동이라도 하겠다고 나섰다. 옆방 이돈명 변호사께서 농담삼아 이리 말씀했다. ‘김 변호사, 참으소. 전두환 봐주자 한다고 김 변호사 방에 돌멩이 날아올지도 몰러.’ 뒤에 헌법재판소는 특별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재임기간에 이미 시효 진행이 정지된 것이고 특별법은 단지 이걸 확인한 것일 뿐 이미 끝나버린 공소시효를 새삼스레 되살린 게 아니다. 형벌불소급은 죄와 형을 소급적으로 변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인데 공소시효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형벌불소급은 아니나 소급입법금지원칙에는 반한다는 의견이 5명으로 과반을 넘었지만 위헌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6명에 못 미쳐 합헌으로 유지되었다. 역사시간에 당파싸움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민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 배웠다. 하지만 저 질풍노도의 1980년대, ‘당파성’이란 말은 오히려 많은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당파성을 견지해야 한다.’ 그 시절엔 참으로 멋진 말이었다. ‘모든 계급에 두루 이익이 되는 제도나 절차는 없다.’ 워낙 험난했던 시절이라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당파성의 하위 개념일 뿐이었다. 옛날 동생 녀석 문건에 따르면 이걸 ‘계급독재’라 하던가. 이제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노동자 계급 맨 앞에 서서 싸웠던 대기업 노조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들을 나몰라라 한다. 비정규직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옛날 노동자 투쟁을 하던 때처럼 계급의식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계급’의 자리는 ‘복지’가 대신하고 있다. 북은 일제 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외세와 자본주의에 맞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철저히 당파성을 지켜 역사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역사발전에 뒤처져 있다. ‘당파성’ 때문에 민주주의나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게다. 부디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선출 과정의 부실 혹은 부정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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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 사람들은 저 높은 하늘에 떠 있는 솔개가 부러워서 이리 노래한다. 하지만 솔개도 저기 병아리 떼가 있다는 걸 제 짝에게 알려주기 위해 최소한의 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강이며, 푸른 숲, 그 속에 숨어 있는 들쥐를 ‘언어’로서는 아니래도 머릿속에 떠오른 분명한 ‘개념’을 통해, 알아보고 기억할 것이다. 말이며 개념은 우리가 바깥세상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리하고 기억해 두는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유식(唯識)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은 그 본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 분별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고 말하던가. 그런데 말은, 개념은 한번 만들어지면 당초 세상을 알아차리는 수단의 지위를 벗어나서 세상을 규정하려 든다. 마치 그 말에 대응하는 어떤 것이 저 홀로 그리고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양. 저기 창밖에 부슬부슬 어떤 것이 내려오는 ‘순간’을 ‘비’라고 분류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번에 비슷한 어떤 것이 내리면 ‘어, 또 비가 오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번 ‘비’라고 이름 붙이고 나니, 마치 ‘비’라는 놈이 있어 저 하늘 꼭대기에 이렇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 밤 내 방 창문 앞으로 부슬부슬 떨어지는 양 착각을 한다. 실상은 그게 아니리. ‘비’라는 실체는 별도로 없고 온도와 습도와 다른 조건들이 딱 들어맞아 수증기가 물이 되어 떨어지는 ‘순간’을 우리는 그저 비라 부를 따름이다. 조건들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고, ‘비’라는 순간은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뭐, 사람이라고 어디 별다른가. 옛날에 까치였던 내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구하려고 종에다 머리를 들이받은 착한 일 덕에 이번 생에서는 사람인 나로 태어났다는 식의 윤회설. 아니면 내 이 모습 그대로 저 요단강 건너가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난다는 찬송가 역시 나라는 변치 않는 실체가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잘못 안 거 아닐까. 다정다감한 어머니 유전자와 강한 성격의 아버지 유전자가 서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가 생겨났고, 내가 50여년 세월 겪은 여러 경험들이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일 뿐. 부모 유전자가 달라지고 경험이 달라지면 나는 나가 아니다. 열 살 때 죽은 내 동무는 열 살 어린 아이의 몸과 마음으로, 여든넷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그 쪼그라들고 병든 모습과 마음으로 저 요단강 건너에서 영원히 존재한다? 부모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이 몸과 마음이 몇 십년이라는 비교적 긴 ‘순간’ 동안 유지되므로 나는 나의 실체가 있는 양 여긴다. 대체로 불교는 ‘실체 없음’에 방점을 두고, 비교적 긴 순간 동안 사실상 실체가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금 여기’를 접어두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기독교는 대체로 만물들이 비교적 긴 순간 동안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조건들이 만나 이루어지는 순간들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로 붙잡으려 애쓴다. 실체처럼 보이는 ‘지금 여기’들이 모여 세상은 변해 흘러간다. 변하지 않는 우리 편?
1980년대 대학가의 시위. 질풍노도의 1980년대, 당파성이란 말은 오히려 많은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절차를 좀 어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뀐 오늘은
더이상 당파성이란 말이
절차적 정당성을 누를 수 없다
통진당 파문이 바로 그렇다 전두환을 법정에 세운 5·18특별법에 대하여
1982년쯤이었나.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막내 동생이 운동권이었는데 그 무렵은 소위 주사파들이 판을 장악해 가던 때였다. 이 녀석이 그 동네에서 작성한 문건을 평소 잘 들고 다니지 않는 내 가방 안에 숨겨두었다. 그날따라 이 가방을 들고 나갔던 나는 집에 오는 길에 그만 택시에 이를 두고 내렸다. 동생으로부터 문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가방에는 ‘사법 연수원’이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당시 명문이던 군산제일고등학교 선생님들이 줄줄이 잡혀가 긴 옥살이를 한 ‘오송회’ 사건도 국어선생님이 3학년 제자에게 빌려 준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을 버스에 두고 내리는 바람에 시작되었다. 그때 버스기사는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온 식구가 전화통에 매달렸다. 서울에 웬 택시회사가 그렇게도 많은가. 지금 기억으로 이백 몇 십개나 되었는데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혹시 오늘 분실물로 가방 들어온 것 없나요?” 모두 “없습니다”였다. 그 뒤로부터는 괴로운 기다림의 날들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언제 경찰이 들이닥치려나. 초조한 나날이 이틀, 보름, 한달가량 지나갔다. 아마 기사양반이 가죽가방만 가져가고 그 안의 서류들은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모양이었다. 동생은 그예 ‘전두환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 주동을 하다가 2년여 감옥살이를 했다. 재판 때 주심 배석판사도 변호사도 다 내 연수원 동기들이었다. 주심은 내 핑계를 대고 다른 재판부로 가버렸다. 재판장은 고압적이었다. 동생이 재판거부를 하며 재판장을 향해 살인마의 시녀라고 험한 소리를 하자, 부장판사가 “너는 에미, 에비도 없느냐”고 호통을 쳤다. 마침 방청석에는 어머니, 아버지, 나와 여동생이 앉아 있었는데 여동생이 큰 소리로 맞받아쳤다. “에미, 에비 여기 있다아. 어디다 대고 에미 에비냐. 당신이야말로 에미, 에비도 없냐?” 동생 녀석은 나와서도 고생을 했다. 부평역 앞에서 ‘한권의 책’이라는 상호로 빵재비 셋이서 동업을 했다. 사회과학 책들을 주로 팔았는데 이 지역 운동권들은 이적표현물로 걸리면 실제와 상관없이 모두 동생 책방에서 샀다고 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경찰에 불려갔고 재판도 받았다. 덕분에 평소 검사, 판사에게 잘난 척 큰소리만 펑펑 치던 소위 ‘인권’변호사가 그들을 찾아가 팔자에도 없는 아쉬운 소리를 했던 거였다. 당시 사무실이 강남역 바로 앞에 있었는데 동생이 도망 다닐 땐 내 사무실 근처에 형사들이 며칠씩 잠복을 했다. 변호사 눈에는 이게 바로 들어오는 법이라 하루는 건물 밖으로 나가 형사들을 덥석 붙잡았다. 하루 종일 힘드실 텐데 내 방에 가서 차 한잔 하시라고. 그들은 잠복이 탄로가 난 데 대해 낭패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동생이 바보가 아닌데 형 만나러 오겠수. 그들은 차 마시고 코가 쑥 빠져서 돌아갔다. 동생은 전두환 덕에 고생 좀 했다. 아버지, 어머니도. 어머니는 그 뒤로도 동생 선후배들을 집에 숨겨 주느라 속을 좀 끓이셨다. 변호사인 큰아들에게 혹 불똥이 튀는 건 아닐까. 그 전두환이 5·18특별법으로 법정에 섰다. 소위 12·12사태와 5·18계엄은 내란죄에 해당되는데 이미 공소시효 15년이 지난 상태였다. 5·18특별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파괴범죄에 대하여 국가소추권행사의 장애가 존재한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동)기간이라 함은 당해범죄의 종료일로부터 1993년 2월24일까지의 기간을 말한다’고 규정했다. 김영삼 정권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공소시효가 정지된 걸로 본다는 것이었다. 민변도 이 법을 만드는 데 적극 간여했다. 1980년대 당파성은 아직도 유효한가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 법이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미 공소시효가 다 지나갔는데 이제 와서 전두환, 노태우 재임기간에는 공소시효 진행이 정지된 걸로 본다는 건 일종의 소급입법 아닌가. 아무리 전두환이 사람들을 엄청나게 죽이고 국헌을 문란케 했고 사적으로는 우리 집을 곤경에 빠뜨렸지만 이를 처벌하겠다고 소급입법을 해선 안 된다고 여겨졌다. 나는 특별법 반대운동이라도 하겠다고 나섰다. 옆방 이돈명 변호사께서 농담삼아 이리 말씀했다. ‘김 변호사, 참으소. 전두환 봐주자 한다고 김 변호사 방에 돌멩이 날아올지도 몰러.’ 뒤에 헌법재판소는 특별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의 재임기간에 이미 시효 진행이 정지된 것이고 특별법은 단지 이걸 확인한 것일 뿐 이미 끝나버린 공소시효를 새삼스레 되살린 게 아니다. 형벌불소급은 죄와 형을 소급적으로 변경하는 것을 금하는 것인데 공소시효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다만 형벌불소급은 아니나 소급입법금지원칙에는 반한다는 의견이 5명으로 과반을 넘었지만 위헌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6명에 못 미쳐 합헌으로 유지되었다. 역사시간에 당파싸움이라는 말은 일제가 우리 민족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것이라 배웠다. 하지만 저 질풍노도의 1980년대, ‘당파성’이란 말은 오히려 많은 젊은이들을 가슴 뛰게 했다.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당파성을 견지해야 한다.’ 그 시절엔 참으로 멋진 말이었다. ‘모든 계급에 두루 이익이 되는 제도나 절차는 없다.’ 워낙 험난했던 시절이라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는 당파성의 하위 개념일 뿐이었다. 옛날 동생 녀석 문건에 따르면 이걸 ‘계급독재’라 하던가. 이제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 노동자 계급 맨 앞에 서서 싸웠던 대기업 노조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들을 나몰라라 한다. 비정규직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옛날 노동자 투쟁을 하던 때처럼 계급의식을 찾아보기도 힘들어졌다. ‘계급’의 자리는 ‘복지’가 대신하고 있다. 북은 일제 강점기 이래 지금까지, 외세와 자본주의에 맞서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철저히 당파성을 지켜 역사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역사발전에 뒤처져 있다. ‘당파성’ 때문에 민주주의나 절차적 정당성을 잃어버린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게다. 부디 통합진보당이 비례대표 선출 과정의 부실 혹은 부정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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