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⑪ 이승복 사건 오보소송(하)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이승복기념관에 걸려 있는 1968년 12월10일 낮 12시경의 사진. 군경이 데리고 간 마을 사진관 주인 김진우가 찍은 것으로 왼편에 주검을 수습해 놓았다.(위) 아래 사진을 보면 주민들이 ‘맨 오른편 아래’ 옥수수 더미 속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조선일보사가 재판부에 사진을 내면서 붙인 “당시 주검들이 ‘마당 가운데’ 옥수수 더미 속에 있었다”는 설명과도 배치된다. 어느 쪽이든 아래 사진처럼 수습해 놓았던 주검들을 다시 옥수수 더미로 수북이 무덤처럼 덮었다는 이야기다. 아래 사진 뒤편에서 수첩을 들고 뭔가 적는 경향 기자는 당일 현장 사진에 계속 등장한다. 조선 기자와 찍힌 경향 기자 사이의 거리는 10미터 안팎이었고, 조선 기자와 경향 기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도 둘은 현장에서 상대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주검이 이미 수습된 뒤였으나
수습 전 모양대로
옥수수더미 속에 있었다고 했다
주검이 추울까봐 그랬다는 것 또 평소 잘 아는 경향 기자를
계속 사진 찍고도 보지 못했다니…
재판부는 강 기자의 증언에
의심할 여지가 있다면서도
현장에 갔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최아무개 할머니의 증언은 왜 바뀌었을까
이승복 보도 관련 재판에서 이런 이야기도 나왔다. 1960년대 초 <한국일보>가 황씨 성을 가진 대령 출신 지게꾼 이야기를 휴먼 스토리로 소개한 적이 있단다. 그러자 <조선일보> 데스크에서 소관 기자를 불러 너는 이런 것도 놓치느냐고 혼쭐을 냈다. 그 기자가 서울역 일대를 돌아다니며 아무리 찾아보아도 황씨 성을 가진 그런 사람은 없었다. 데스크는 이 보고를 받고 한국일보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정확한 문구가 이랬다는 거였다. “대령 출신 지게꾼 황씨는 취재에 응한 후 어디론가 표표히 사라졌다.” 아, 그래, 어디론가 ‘표표히’ 사라졌다는데 어찌 조선 기자가 그 황씨 지게꾼을 찾을 수가 있었겠나.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이 강 기자 자신이라는 이상한 주장 다음 두 번째 쟁점은 강 기자가 현장에 갔을 때 시신들이 어디에 있었다는 것인지였다. 강 기자는 자신이 낮 12시 반쯤 거기에 도착했을 때 시신들이 옥수수 더미 속에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나는 나름 쾌재를 불렀다. 두 가지 점에서 그랬다. 우선 시신 수습 시점과 관련해서였다. 공비들은 전날 저녁 7시 무렵 일가족들을 죽인 뒤 마당으로 끌고 나와 외양간 옆 분뇨 더미에 던지고 옥수숫대로 덮었다. <월간조선> 1998년 10월호에 따르면 이승복의 친척인 최아무개 할머니가 1968년 12월10일 새벽 5시께 승복이 집에 와서 마당 한가운데 거적을 깐 뒤 시신들을 옮겨 나란히 눕히고 얼굴에 묻은 거름도 닦아주었다. 이 상태에서 낮 12시쯤 군경이 마을 사진관 주인 김진우를 데리고 와서 시신들 사진을 찍었고 이 사진은 지금도 이승복 기념관에 걸려 있다. 그런데 얼마 뒤인 12시 반경 조선일보 강 기자가 왔을 때는 시신들이 도로 수북이 쌓아 올려진 옥수수 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최 할머니는 나중에 검찰에서, 자신이 시신들을 수습하고 집으로 갔다가 다시 현장에 돌아와 시신에 옷을 입히고 ‘추울 것 같아 그 위에 옥수수 섶으로 덮어두니 옆에 있던 군인들이 완전히 덮어 주었다’고 진술했다. 지서 주임도 자신이 10일 저녁 6시쯤 와보니 시신들이 옥수수 섶으로 덮여 있었다고 주장했다. 항소심 법원은 이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최 할머니나 지서 주임 모두 최초 <월간조선> 인터뷰 당시에는 시신 수습한 이야기만 했을 뿐 나중에 다시 옥수수 더미로 덮었다는 얘기는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조선일보사가 김종배 기자를 고소한 뒤 새로 나온 이야기였다. 얼굴에 묻은 거름을 닦아 주고 거적 위에 나란히 수습을 해 놓고는, 시신들이 ‘추울 것 같아서’ 다시 옥수수 섶으로 덮어 주었다고? 사진을 자세히 보면 이건 시신을 그저 슬쩍 덮어 주는 정도를 넘어서서, 옥수수 더미가 무슨 무덤처럼 수북하게 쌓여 있다. 저게 시신이 추울까봐 그런 거라니…. 정 그렇다면 방안에 있는 이불이라도 가져다 덮어 줄 것이지, 수습한 시신 위에 옥수수 섶을 도로 잔뜩 올려놓았다? 또 다른 의문은 강 기자가 현장에 갔을 때 시신들이 들어 있었다는 옥수수 더미가 과연 사진 속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였다. 사진을 보면 옥수수 더미가 두 개 있다.
1968년 12월10일 낮 12시쯤 군경이 마을 사진관 주인 김진우를 데리고 와서 찍은 일가족 주검 사진. 강 기자는 자신이 낮 12시 반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은 주검들이 그 속에 놓여 있다면서 “마당 한켠 옥수수 다발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고 진술했다.(위에서 두번째 사진 참조)
강 기자는 1999년 1월 검찰에 낸 진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낮 12시30분에서 1시 사이에 피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부락민으로 보이는 주민 2, 3명이 마당에 있었기에… 저는 처음에 피해자들 사체를 발견하지 못해 그들에게 ‘사망자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으며 그들은 마당 한켠에 옥수수 다발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범행 현장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피해자들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에 옥수수 다발을 벗겨 내어 시체를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강 기자의 이 진술은 사진 내용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사진 속 주민들이 강 기자가 갔을 당시 사체들이 있다고 손으로 가리켰다는 옥수수 더미는 사진 ‘맨 아래쪽’이다. 반면에 조선일보는 재판부에 사진을 내면서 당시 시신들이 ‘마당 가운데’ 옥수수 더미 속에 있었다고 설명을 붙이고 서면으로 주장했다. 최 할머니가 시신을 수습해서 거적 위에 눕혀 놓았던, 그리고 나중에 옥수수 섶으로 덮었다고 주장하는 위치는 마당 가운데이고, 사진 속 주민들이 손가락질하는 아래쪽 더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런 모순은 강 기자가 나중에 사진을 보고 그에 맞추어 진술을 하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여겨진다. 공식 사진사 김진우보다 조금 나중에 현장에 도착했던 <경향신문> 기자는 1심 법정에서 자신이 ‘현장에 갔을 때는 사체를 수습한 상태’여서 보지 못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당시는 시신을 아마 안방에 안치해둔 듯하다. 강 기자의 진술은 왜 경향 기자와 전혀 다른 걸까. 세 번째 쟁점, 강 기자가 현장에 갔다면 왜 경향 기자와 서로 보지 못했을까. 강 기자와 경향 기자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당일 현장에서 서로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강 기자와 노 기자가 10일 낮 현장에 가서 찍은 것이라며 법원에 낸 사진 15매에는 시종일관 경향 기자가 현장을 취재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 있다. 2심 법원은 강 기자가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서 김종배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정작 핵심 쟁점이었던 강 기자가 현장에 갔었는지 여부는 이를 인정하는 취지로 판결을 했다. 그 주된 논거는 조선일보가 당시 경향 기자가 현장을 취재하는 장면을 담은 15매 사진 원판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강 기자 등이 현장에서 경향 기자를 카메라로 찍었다면, 사진상으로 볼 때 그 거리는 불과 10미터 안팎으로 보이는데, 그 가까운 거리에서 10여장이나 되는 사진을 찍고 찍히는 상당 시간 동안, 어찌 조선 강 기자와 경향 기자는 서로를 못 볼 수가 있는가. 서로 본 적이 없다는 두 사람 증언은 오히려 그 사진을 강 기자 등이 직접 찍은 게 아니라는 강력한 반증이었다. 당일 낮 김진우가 찍어서 이승복 기념관에 걸어놓은 현장 사진을 보면 조선일보가 법원에 낸 사진과 앵글이 거의 같다. 김진우는 당시 조선일보 진부지국장이었다. 나는 강 기자 등이 찍었다며 조선일보가 법원에 낸, 경향 기자가 담겨 있는 사진들은 실제로 김진우가 찍은 사진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가까운 우체국 놔두고 먼 목장에서 기사 송고?
네 번째, 강 기자는 어디서 기사를 송고했다는 것인가. 강 기자가 12월10일 오후 1시쯤 취재를 마치고 속사 삼거리에 도착하니 3시였단다. “그날 강릉으로 급하게 돌아가려다 마감시간을 맞출 수 없을 거 같아서 목장으로 들어갔다. 목장에는 도시와 연락할 일도 많을 테고 당시에 목장을 할 정도로 경제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전화가 있다고 판단해서” 그리로 들어가 본사에 송고했다고 증언했다. 조선의 마감은 오후 4시. 그런데 강 기자는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몇 시간씩 걸리는 강릉까지 돌아가려 했다는 건지. 공비가 출몰한 오지에서 취재를 할 땐, 처음부터 송고를 어찌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는 게 기자의 기본이다. 속사 삼거리에서 3, 40분 거리에 횡계 우체국이 있었다. 당시 경향 기자도 가장 가깝고 확실한 횡계 우체국에 가서 송고를 해서 당일인 10일자 석간에 기사를 실을 수 있었다. 마감이 겨우 한 시간 남았는데 가까운 횡계 우체국을 놓아두고 그 먼 강릉을 목표로 가다가 ‘목장’이 경제력이 상당해 전화가 있을 것 같아서 임기응변으로 송고하러 들어갔다는 강 기자 진술 역시 현장에 가지 않았음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대관령에 목장이 없었다. 나중에 조선일보 측은 강 기자가 송고한 곳이 목장처럼 보이는 농촌진흥청 고랭지 시험장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것이, 그래, 기자가 자기가 송고하러 안에 들어가 전화까지 사용했다면서도 그곳이 정부 기관인지 민간 목장인지도 모르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경제력이 있어 보이는 목장’에서 송고했다고 주장하는 건가. 더욱 결정적인 대목. 강 기자와 조선 측은 강 기자가 10일 현장에 갔었다는 확실한 근거로 <마이니치신문> 이시카와 기자가 당일 속사 삼거리까지 강 기자와 동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이니치신문> 12월19, 20일자에 “사건 다음날 아침 일찍 강릉에서 지프차를 타고 현지로 향했다”고 실려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기사 원문을 보니 ‘사건 다음날’이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기자는 다음날 아침 일찍 강릉시로부터 현지로 향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소식” 바로 앞 부분에는 “2남(승복)이 말한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한마디가 생각지도 못한 참극을 불러온 것이라 한다”고 씌어 있었다. 요컨대 ‘사건 다음날’인 10일이 아니라, 1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 소식을 접한 다음날’ 즉 12일에 현지로 갔다는 얘기였다. 조선 측 주장대로 강 기자가 마이니치 기자와 같이 현장에 갔다면 오히려 그 날짜는 10일이 아니라 12일이었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하는 셈이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2년여 긴 세월 동안 푹 묻어 두었다. 2006년에야 나온 판결에서는 내가 제기한 여러 의문점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이, 그저 ‘원심 조치는 수긍이 가고’, 딱 10자로 넘어갔다. 비록 김종배 기자가 무죄를 받기는 했지만,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무얼 하려 변호사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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