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27일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이 내려진 뒤 피해자 유가족들이 희생자 추모 행사에서 오열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⑮ 인혁당·민청학련 재심(상)
⑮ 인혁당·민청학련 재심(상)
어떤 이가 비노바 바베에게 물었다. “당신은 당신 앞에 있는 등불을 보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하느님(브라만)을 느끼십니까?” 그는 이리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하느님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내 앞에 놓여 있는 그 등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군요.”
인도 힌두교 전통에서 브라만계급은 절대로 막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똥 치우고 옷감 짜고 목수 일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하느님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내가 내 주변에서 보는 갖가지 살아 있는 피조물들과 인간 존재들은 하느님이 몸 입고 나타나시고자 하는 많은 형상들이다.’
비노바 바베는 6년 동안 인도 시골 이 마을 저 마을을 걸어서 다니면서 지주들을 상대로 땅 없는 농부들에게 기부를 해달라고 호소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양 아흔아홉 마리 가진 사람이 한 마리 가진 사람 걸 차지해서 백 마리를 채우려는 게 사람의 본성이거늘 그의 호소를 들은 지주들은 무려 400만에이커, 스코틀랜드만한 땅을 내놓았다.
헌법을 바꾸자는 것도 범죄행위라니…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의 벽을 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 한구석에는 선함이라는 문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행한 결과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결점을 비판하면 벽에 제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니 그 사람의 좋은 점, 선한 문을 찾아 열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그래서 돈이 주인이 된 이 시절에 사람들의 착한 마음을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은 일이긴 하다. 근본적으로 제도를 확 바꾸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나 종교인들이 이 정도 꿈은 보여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인 이 시절의 시작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아닌가 싶다. 그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창 시절 내내 대통령이었으니 나에게 대통령 하면 박정희였고 다른 대통령이란 내 머릿속에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잘 먹고 잘사는 것도 꿈의 하나’가 아니라,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의 전부’라고 시대의 정신을 바꾸어 버린 지도자.
나는 40년 가까이 오래된 그의 행악을 요즈음 치우면서 돈도 벌고 덧없는 이름도 얻고 있다.
“이 재판 기록에 나오는 고등학생 ‘김형태’가 변호인석에 앉아 있는 김 변호사 맞소?” 2006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법정에서 부장판사가 나에게 물었다. 1974년에 벌어졌던 인혁당, 민청학련 재판을 수십년 만에 다시 하는 자리였다.
1974년 1월18일자 내 일기장에는 지금 읽어보면 좀 유치하고 젠체하는 글이 적혀 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어도 그 과정에 눈곱만큼도 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혹시 지금 내가 무모하게 일을 벌이다가 잘못되어서 정말 감옥에서 한 15년 있는 것보다 좀 더 참았다가 실력을 키워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좋은 목적에 섞여 있는 악은 아닐까?”
그 열흘 전인 1월8일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를 발표했다. 어린 고등학생이 보기에도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하거나 이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법관 영장 없이 잡아다가 군법회의에서 최고 15년 징역에 처한다. 헌법을 바꾸자는 것도 범죄행위라니.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 긴급조치를 잘못된 거라고 말해도 똑같이 처벌한다니.
독재정치였지만 경제는 잘했다? 독재란 그저 정치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존중하느냐, 그저 한낱 수단으로 생각하느냐. 이건 박정희가 내세운 잘 먹고 잘사는 문제 이전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온 삶이 걸려 있는 문제다. 남의 물건을 빼앗아서라도 잘 먹고 잘살면 되나. 잘 먹고 잘살면 된다는 건 이기심만을 잔뜩 북돋우는 악이다. 고등학교 2학년짜리 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이어지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편 징역 15년이 무섭기도 했다.
인혁당·민청학련 재판기록
“여기 적힌 고등학생 김형태가
김 변호사 맞소?”
당시 대학생 형들을 몇번 만났다가
한 친구가 진술서를 썼던 것 2002년 재심 변호를 하면서
이 기록을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정권이 짜놓은 각본은 이랬다
‘주동자가 공산주의임을 입증하라
국가전복 내용으로 조사하라’ 고등학생 넷, 긴급조치 4호에 몸이 덜덜 73년 겨울방학 때부터 친구 몇몇이 함께 고등학교 선배인 대학생들을 몇 번 만났다. 3학년에 막 올라간 74년 4월 초 나는 라디오에서 박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걸 듣고 정말로 간이 콩알만해졌다. ‘작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어서 이를 뿌리뽑는다면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도 1호 못지않게 가관이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동조한 자,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도 사형에 처할 수 있고 학교는 폐교시킬 수 있다는 거였다. 정당한 이유 없이 학교 안 가도 사형? 지난겨울에 만났던 대학생 선배들은 민청학련으로 다 잡혀갔을 터였다. 어린 마음에 엄청 무섭고 고민이 되었다. 긴급조치 4호 제4항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년 4월8일까지 그 행위 내용의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까까머리 넷이 모여 분개하고 선배 몇 번 본 게 전부인데 이거 큰일났네. 그 뒤 이철이란 주모자 서울대 학생이 고등학생 교복 입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는 나중에 쓴 글에서 어떻게 변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스님이나 신부보다는 신분증 제시가 필요 없는 고교생이 되는 게 제일 낫겠다 싶어 그랬다고 했다.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친구들은 결국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가 이실직고하고 한 친구가 진술서를 써서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우리들은 벌벌 떠는 정도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자술서를 썼던 친구는 그 충격으로 문과에서 진로를 바꾸어 이과로 옮겨 갔다. 2006년 민청학련, 인혁당 재심사건 변호를 하면서 30년 전 고등학생 때 내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까까머리들이야 그저 어린 시절 이야깃거리 정도로 넘어갔지만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사형당하고 감옥살이하고 그 뒤 삶이 완전히 바뀌어 변변한 직업도 없이 노년에 이르렀다. 학생 2천명이 잡혀가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은 잡혀간 지 석 달여 만에 1심에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의 선고를 받았다. 대학생들은 이듬해 2월 대개 석방되었고 졸업한 이들만 4, 5년 옥살이를 했다. 인혁당 관련자는 23명이 기소되어 사형 8명, 무기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선고 다음날 박정희 정권은 8명을 사형 집행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는 데는 나와 이 사건 간에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1998년 무렵 문정현 신부 주선으로 인혁당 사형수 부인들이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왔다. 그분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이들의 가족들 모임에 가도 눈치가 보였다. ‘빨갱이’니까. 천주교 인권위원회로서는 그런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 천주교라는 종교의 특성상 ‘빨갱이’들을 도와도, 같은 빨갱이로 몰릴 위험이 덜하니 다른 단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좀 있었다. ‘아이고,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빨갱이 타령….’ 사실 빨갱이의 출발은 권력을 틀어쥔 돈의 횡포에 맞서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약자들을 돕자는 좋은 뜻에서 비롯된 거 아닌가. 애초의 이 뜻을 제대로 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또다른 억압 세력이 된 건 아닌지 잘 따져 볼 일이지, 그저 무턱대고 빨갱이로 몰아댈 일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1998년 무렵 종교는 빨갱이 타령에 희생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일종의 소도(蘇塗)였다. 인권위는 그저 이 어머니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모 모임을 주선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펴내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그래도 계속 아쉬웠던 건 민청학련, 인혁당 수사·공판기록을 찾는 거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설 같은,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있지만 정작 공식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재판기록이 없었다. 인권위는 백방으로 기록의 존재를 수소문했다. 기록의 보존은 최종적으로 검찰 소관이다. 10년이 지나 모든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게 법무부 공식 입장이었다. 기록이 없다는데야 뭐라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1999년 무렵 한 군종 신부로부터 이 기록들이 군의 모처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박정희는 왜 일주일에 두번이나 보고를 받았나 그리고 그 뒤 국가적으로 과거사 사건을 정리하는 기회를 통하여 이 기록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면서 재판과정에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자료를 받아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을 조사도 하기 전에 이미 각본을 다 짜 놓았다.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전인 1974년 4월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 전체를 암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민청학련이 어떤 단체인지 조사도 하기 전에 긴급조치 4호라는 대통령이 만든 법을 통하여 범죄단체로 규정해 버리니 재판은 법률적으로 전혀 필요가 없는 절차가 되고 말았다. 1974월 4월21일자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수사초점’에는 이렇게 수사하라고 지침을 내리고 있다. ‘관련자, 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고, 가족 중 부역자, 혁신계 등을 찾아내어… 학교 선배, 교수, 교우, 또는 사회인으로부터 정부전복을 교사받은 사실을 입증하고… 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내용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하여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사건 내용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 기자 두명이 한국 학생운동을 취재하러 와서 서울대 학생 유인태를 만났고 취재 사례비로 7500원을 주었는데, 지금 돈으로 10만원쯤 되려나? 중정은 이 두 기자를 일본 공산주의자라며 공작금을 준 것으로 몰아갔다. 수사지침에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서를 정리할 때 지난번 부장님 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도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고… 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을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받았다고 한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에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하였더니… 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기에 마지못해 받은 것으로 표현’하라고. 이 수사를 책임진 이용택 중정 6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때 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는 1주일에 두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 아이고, 비노바 바베는 힌두교식 표현을 빌려,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이 몸 입고 나타나시고자 하는 많은 형상들이랬는데….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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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의 사형집행은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인 1975년 4월9일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 장소였던 서울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터에 추모 꽃송이들이 놓여 있다. 김정효 기자
“여기 적힌 고등학생 김형태가
김 변호사 맞소?”
당시 대학생 형들을 몇번 만났다가
한 친구가 진술서를 썼던 것 2002년 재심 변호를 하면서
이 기록을 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정권이 짜놓은 각본은 이랬다
‘주동자가 공산주의임을 입증하라
국가전복 내용으로 조사하라’ 고등학생 넷, 긴급조치 4호에 몸이 덜덜 73년 겨울방학 때부터 친구 몇몇이 함께 고등학교 선배인 대학생들을 몇 번 만났다. 3학년에 막 올라간 74년 4월 초 나는 라디오에서 박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는 걸 듣고 정말로 간이 콩알만해졌다. ‘작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어서 이를 뿌리뽑는다면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도 1호 못지않게 가관이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동조한 자,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도 사형에 처할 수 있고 학교는 폐교시킬 수 있다는 거였다. 정당한 이유 없이 학교 안 가도 사형? 지난겨울에 만났던 대학생 선배들은 민청학련으로 다 잡혀갔을 터였다. 어린 마음에 엄청 무섭고 고민이 되었다. 긴급조치 4호 제4항에는 이런 문구도 있었다.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년 4월8일까지 그 행위 내용의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까까머리 넷이 모여 분개하고 선배 몇 번 본 게 전부인데 이거 큰일났네. 그 뒤 이철이란 주모자 서울대 학생이 고등학생 교복 입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는 소식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는 나중에 쓴 글에서 어떻게 변장을 할까 고민하다가 스님이나 신부보다는 신분증 제시가 필요 없는 고교생이 되는 게 제일 낫겠다 싶어 그랬다고 했다.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와 친구들은 결국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가 이실직고하고 한 친구가 진술서를 써서 수사기관에 제출하고 우리들은 벌벌 떠는 정도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자술서를 썼던 친구는 그 충격으로 문과에서 진로를 바꾸어 이과로 옮겨 갔다. 2006년 민청학련, 인혁당 재심사건 변호를 하면서 30년 전 고등학생 때 내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까까머리들이야 그저 어린 시절 이야깃거리 정도로 넘어갔지만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고문당하고 사형당하고 감옥살이하고 그 뒤 삶이 완전히 바뀌어 변변한 직업도 없이 노년에 이르렀다. 학생 2천명이 잡혀가 180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은 잡혀간 지 석 달여 만에 1심에서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의 선고를 받았다. 대학생들은 이듬해 2월 대개 석방되었고 졸업한 이들만 4, 5년 옥살이를 했다. 인혁당 관련자는 23명이 기소되어 사형 8명, 무기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선고 다음날 박정희 정권은 8명을 사형 집행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는 데는 나와 이 사건 간에 또 하나의 인연이 있었다. 1998년 무렵 문정현 신부 주선으로 인혁당 사형수 부인들이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왔다. 그분들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이들의 가족들 모임에 가도 눈치가 보였다. ‘빨갱이’니까. 천주교 인권위원회로서는 그런 어려운 처지를 도와줄 뾰족한 수가 없었지만 천주교라는 종교의 특성상 ‘빨갱이’들을 도와도, 같은 빨갱이로 몰릴 위험이 덜하니 다른 단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운신의 폭이 좀 있었다. ‘아이고,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빨갱이 타령….’ 사실 빨갱이의 출발은 권력을 틀어쥔 돈의 횡포에 맞서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약자들을 돕자는 좋은 뜻에서 비롯된 거 아닌가. 애초의 이 뜻을 제대로 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또다른 억압 세력이 된 건 아닌지 잘 따져 볼 일이지, 그저 무턱대고 빨갱이로 몰아댈 일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1998년 무렵 종교는 빨갱이 타령에 희생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일종의 소도(蘇塗)였다. 인권위는 그저 이 어머니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모 모임을 주선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책을 펴내고,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그래도 계속 아쉬웠던 건 민청학련, 인혁당 수사·공판기록을 찾는 거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수많은 전설 같은,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있지만 정작 공식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재판기록이 없었다. 인권위는 백방으로 기록의 존재를 수소문했다. 기록의 보존은 최종적으로 검찰 소관이다. 10년이 지나 모든 기록이 폐기되었다는 게 법무부 공식 입장이었다. 기록이 없다는데야 뭐라고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1999년 무렵 한 군종 신부로부터 이 기록들이 군의 모처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박정희는 왜 일주일에 두번이나 보고를 받았나 그리고 그 뒤 국가적으로 과거사 사건을 정리하는 기회를 통하여 이 기록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2002년 재심을 시작하면서 재판과정에서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조사자료를 받아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을 조사도 하기 전에 이미 각본을 다 짜 놓았다. 사람들을 잡아들이기도 전인 1974년 4월3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 전체를 암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민청학련이 어떤 단체인지 조사도 하기 전에 긴급조치 4호라는 대통령이 만든 법을 통하여 범죄단체로 규정해 버리니 재판은 법률적으로 전혀 필요가 없는 절차가 되고 말았다. 1974월 4월21일자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수사초점’에는 이렇게 수사하라고 지침을 내리고 있다. ‘관련자, 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고, 가족 중 부역자, 혁신계 등을 찾아내어… 학교 선배, 교수, 교우, 또는 사회인으로부터 정부전복을 교사받은 사실을 입증하고… 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내용으로 조사’하라고 지시하여 수사도 하기 전에 이미 사건 내용을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 기자 두명이 한국 학생운동을 취재하러 와서 서울대 학생 유인태를 만났고 취재 사례비로 7500원을 주었는데, 지금 돈으로 10만원쯤 되려나? 중정은 이 두 기자를 일본 공산주의자라며 공작금을 준 것으로 몰아갔다. 수사지침에 이런 대목이 있다. ‘조서를 정리할 때 지난번 부장님 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도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고… 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을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받았다고 한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에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하였더니… 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기에 마지못해 받은 것으로 표현’하라고. 이 수사를 책임진 이용택 중정 6국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때 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는 1주일에 두번꼴로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 아이고, 비노바 바베는 힌두교식 표현을 빌려, 주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하느님이 몸 입고 나타나시고자 하는 많은 형상들이랬는데….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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