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여름 의문사위원회는 거문도에서 현장조사를 하며 사람과 똑같은 크기와 무게를 지닌 마네킹을 여기저기서 바다로 던져보았지만 이내창씨의 사체가 발견된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그가 실족했다는 지점에서 던져도 마찬가지였다. 이내창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6) 이내창 의문사(하)
(16) 이내창 의문사(하)
1989년 8월17일 여수경찰서에서 오연희, 박철수(둘 다 가명)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내창을 전혀 알지 못하며 거문도에서 본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자신들은 거문도 서도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경찰은 박철수의 친구들 진술과 일치하고, 오연희가 안기부에 근무해 신원이 확실하다며 이들을 풀어 주었다.
중앙대 학생들은 이 두 사람 사진을 찍어 8월19일 다시 거문도로 향했다. 그리고 다방 종업원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 사람들, 맞아요. 이 남녀(이내창과 오연희)가 다방에 들어와 콜라와 환타를 시키고 해수욕장 가는 배가 몇 시에 있는지 물었어요. 몰라서 주인 언니한테 물어보았죠. 한 20분 정도 앉아 있다가 나가 밖에서 기다리던 남자(박철수)와 같이 세 사람이 여객선 터미널 쪽으로 걸어갔어요. 혹시나 간첩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보았었어요.”
그 안기부 직원, <한겨레> 기자를 고소하다
그녀는 경찰에서도 맨 처음 진술 때는 이 내용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두번째는 남녀가 왔던 건 맞는데 이내창이 아니고 비슷하게 생긴 박철수의 친구 같다고 하더니 세번째에는 아예 이마저도 부인했다. 나룻배 ‘덕성호’ 선장 역시 학생들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는 8월15일 오후 3시 반경 거문리에서 이내창과 함께 유림해수욕장까지 태워다 준 사람들 맞다고 했다. 세 사람 뱃삯으로 오연희가 2천원을 내서 500원을 거슬러 주었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그런 그 역시 나중에 경찰에서는 이내창을 남녀 2명과 함께 실어다 준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오연희, 박철수는 아니라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선장 자신이 선착장에서 경찰에게 이 두 사람을 지목한 건 또 무어란 말인가. 그해 10월 <한겨레> 신문 이공순 기자는 다방 종업원과 나룻배 선장을 다시 취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내창과 오연희가 같이 있는 걸 본 건 사실이라 진술했다. 한겨레는 이 취재를 토대로 “이내창씨 사망 전 안기부 요원 동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오연희는 이 기자와 한겨레 신문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검찰은 오연희가 안기부 직원으로서 이내창의 사망 직전에 동행하고 이내창의 죽음에 관여한 듯한 취지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며 기소를 했다. 재판의 핵심은 말을 바꾼 다방 종업원과 선장 진술의 신빙성 여부였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다방 종업원을 증인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여수경찰서에 진술할 때 적어 놓은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는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증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뭐라고 이야기했건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증거로 쓸 수 없으며 법정에 나와서 그 진술이 맞다고 해야 증거로 쓸 수 있다. 그 종업원은 아예 증인소환이 불가능하므로 경찰 진술을 증거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 옆방 조용환 변호사는 증거로 써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려고 헌법소원까지 냈다. 한편 선장은 법정에 나와서 애매한 말로 일관했다. 검찰에서는 오연희와 대질을 하면서 자신이 두 남녀를 이내창과 함께 유림해수욕장까지 데려다 준 사실은 있지만 오연희 등은 아니라고 하여 당초 진술을 번복했었다. 다시 법정에서는 검찰에서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한술 더 떠서 검찰에서 진술내용을 읽어주지 않았고 서명은 자기 글씨가 아니라 했다. 검사의 증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변호인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변했다. “이내창과 그 일행은 배에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린 다음 유림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동행하는 걸로 보였다. 8월16일과 17일 경찰과 함께 선착장에서 이내창 일행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그 일행’이 오연희 등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법원도 애매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내창과 오연희가 다방에 함께 왔다는 종업원의 최초 진술 사실, 이내창과 박철수를 배에 태웠다는 선장의 맨 처음 진술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망 직전 오연희 등이 이내창과 동행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공순 기자가 이걸 사실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며 공익 목적 보도였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야말로 ‘애매’ 그 자체였다. 1996년 대법원에서 재판이 끝나고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난 2000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우리 법무법인 덕수에 이공순 기자 재판기록이 보관되어 있어서 기본 자료로 삼을 수가 있었다. 상임위원이었던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8월 당시 평양에서 임수경이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있었던 걸 기화로, 정보기관이 프락치를 운동권 핵심인 양 이내창에게 접근시켜, 임수경 쪽으로부터 무슨 연락을 가지고 온 사람이 거문도에 오기로 되어 있으니 거기에 가서 만나보라고 유인한 게 아닐까. 거기서 무슨 조작된 문건 같은 걸 받아 돌아오려는 순간 덮쳐서 이내창이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고 임수경도 단순한 전대협 대표가 아니라 북의 지령을 받고 움직인 간첩이다, 전대협 역시 북의 지령을 받는 단체다 하고 몰아가려 한 게 아니었을까.’
한편의 첩보영화 같은 추리
안기부는 북에서 전갈이 온 양
역공작으로 이내창을 거문도 유인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선
민미련 수사차 이내창을 미행
체포과정에서 역공작 탄로나며… 의문사위의 중요한 성과는
다방 종업원을 찾아낸 거였다
그녀는 처음엔 제대로 말했는데
나중에는 시달려서, 또 대질 때
오연희의 눈빛이 하도 애절해
말을 바꾼 것이라고 했다 쫓기던 이내창과 그를 감시하던 세 남자
또한 그해 7월 민미련이 주관하여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슬라이드를 평양청년학생축전에 보낸 바 있었다. 청년학생축전은 북의 초청 이전에 남쪽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먼저 참가를 제안했었고, 노태우 정권은 이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관변기구까지 만들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허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걸개그림을 보낸 민미련 대표 홍성담을 간첩 혐의로 구속해서 엄청난 고문을 했다. 민미련 관련 활동을 하던 이내창을 고리로 이 사건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려 들 수도 있었다. 의문사 위원회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여럿 드러났다. 당초 신영 훼리호 승선자 명단에는 1번 이내창, 2, 3번 오연희, 박철수 순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공순 기자 재판과정에서 안기부 직원 오연희는 배표를 구한 경위를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휴가를 받아 거문도에 놀러 가려고 사무실 직원 소개로 안기부 여수분실 ‘양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배표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8월14일 오후 여수 분실 현관에서 ‘양양’으로부터 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양양’ 등 여수 분실 직원들은 나중에 의문사위원회에 나와, 자신들은 오연희로부터 직접 전화 받은 일도 없고, 인천 분실에서 연락이 왔기에 여객 터미널에 전화 한통으로 끝냈으며, 굳이 터미널까지 가서 배표를 구해다가 오연희를 만나 직접 전달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오연희 개인이 놀러 가려고 표를 구한 게 아니라 안기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짐작게 하는 정황이었다. 그리고 그 표는 8월15일 아침 7시 출발하는 고속선 타코마호 승선표였다. 이 배로 거문도까지 1시간30분이면 가는데 오연희는 왜 어렵게 구한 표를 바꾸어 8시 출발에 5시간이나 걸리는 신영 훼리호로, 이내창 바로 뒤에 승선했던 걸까. 의문사위 조사 결과 신영 훼리호 선실에서 줄곧 이내창을 감시하던 남자 세 사람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내창은 오후 1시경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착장 부근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쫓기듯 들어오더니 ‘아줌마 방 있어요? 하고 물으면서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왔어요. 방을 가르쳐주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뒷문 있어요?’ 하고 묻고는 죄송하다면서 황급히 뒷문으로 도망갔어요.” 이내창도 배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남자들을 눈치챘던 걸로 보인다. 의문사위 조사의 중요한 성과는 다방 종업원을 찾아낸 거였다. 법원도 주소나 주민번호를 몰라 불러내지 못했던 그녀를 곡절 끝에 찾았는데 전방 직업군인 상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협조를 거부했다. 지금 기억으론 남편이 못 나가게 해서 협조가 안 되는 걸로 추정하고 의문사위원회에 파견 나와 있던 보안사 수사관에게 해결을 맡겼던 것 같다. 그녀는 위원회에 나와 당시 다방에 이내창과 오연희가 왔던 것이 사실이며 처음에는 제대로 말했는데 나중에 시달려서, 그리고 대질 시 오연희의 눈빛이 하도 애절해서 아니라고 말을 바꾼 거라 했다. 한편 오연희는 박철수와 함께 8월15일 오후 1시경 거문도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2시 반에 박철수 친구들이 마중 나와 영국군 묘지 등을 구경하고 놀다가, 5시에 ‘거문호’ 배를 타고 서도에 갔으며 다방엔 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도에 사는 친구의 친척은 친구 일행이 2시 반이 아니라 오후 5시 무렵에 비로소, 거문호가 아니라 동네 배를 빌려 오연희를 마중 나갔다고 전혀 다른 진술을 했다. 거문호 선장도 그날은 국경일이어서 아예 운행을 안 했다고 증언했다. 박철수의 친구도 오연희, 박철수한테서 거문도 다방에 갔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여수 경찰에 진술했다. ‘치끌바위’ 부근에서 무언가를 찾던 두 남녀
의문사위 조사에서, 8월15일 오후 4시경 이내창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남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유림해수욕장 옆 ‘쌍바위’에서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고등학생 진술도 나왔다. 그리고 오후 6시경에는 경찰이 실족 예상 지점이라고 한 ‘치끌바위’ 부근에서 남녀 2명이 해변을 살피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보았다는 주민 증언도 있었다. 8월15일을 전후해서 서울시경, 대전시경 경찰관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거문도에 와 있었고, 이내창이 죽은 다음날인 8월16일 유림해수욕장을 빠져나갔다는 피서객 증언도 학생들에 의해 확보된 바 있었다. 2001년 여름, 나는 조사관들과 거문도에 가서 현장을 살펴보았다.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바위는 둥글고 커서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법하지 않았다. 설령 물에 빠지더라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1.5m 정도여서 빠져 죽을 상황은 아닌 걸로 보였다. 사람과 똑같은 크기, 무게를 가진 마네킹을 여기저기서 바다로 던져 보았다. 조수의 움직임을 보려 한 것이었는데 실족했다는 지점에서 던져도 사체가 발견된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결론을 보지 못하고 의문사위원회를 떠났고 나중에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아쉬웠다. ‘안기부가 이내창을 민미련과 전대협의 중요 연결고리로 삼아 내사공작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내창이 사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국정원은 내사기록 및 관련자 존안자료에 대해 비협조로 대응함으로써 관련자 신원 확보와 이내창에 대한 가해과정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였다.’ 나는 한 편의 첩보영화 같은 이런 추리를 해 본다. ‘당시 안기부는 북에서 임수경 전갈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양 이내창을 거문도로 유인하는 역공작 중이었다. 그런데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서 민미련 사건 수사차 이내창을 미행해 거문도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이내창 일행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이내창이 역공작을 눈치채게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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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경찰에서도 맨 처음 진술 때는 이 내용을 그대로 유지했다. 하지만 두번째는 남녀가 왔던 건 맞는데 이내창이 아니고 비슷하게 생긴 박철수의 친구 같다고 하더니 세번째에는 아예 이마저도 부인했다. 나룻배 ‘덕성호’ 선장 역시 학생들이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는 8월15일 오후 3시 반경 거문리에서 이내창과 함께 유림해수욕장까지 태워다 준 사람들 맞다고 했다. 세 사람 뱃삯으로 오연희가 2천원을 내서 500원을 거슬러 주었다고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그런 그 역시 나중에 경찰에서는 이내창을 남녀 2명과 함께 실어다 준 건 사실이지만 그들이 오연희, 박철수는 아니라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럼 선장 자신이 선착장에서 경찰에게 이 두 사람을 지목한 건 또 무어란 말인가. 그해 10월 <한겨레> 신문 이공순 기자는 다방 종업원과 나룻배 선장을 다시 취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내창과 오연희가 같이 있는 걸 본 건 사실이라 진술했다. 한겨레는 이 취재를 토대로 “이내창씨 사망 전 안기부 요원 동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오연희는 이 기자와 한겨레 신문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검찰은 오연희가 안기부 직원으로서 이내창의 사망 직전에 동행하고 이내창의 죽음에 관여한 듯한 취지로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며 기소를 했다. 재판의 핵심은 말을 바꾼 다방 종업원과 선장 진술의 신빙성 여부였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다방 종업원을 증인으로 부를 수가 없었다. 여수경찰서에 진술할 때 적어 놓은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는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증인이 경찰이나 검찰에서 뭐라고 이야기했건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증거로 쓸 수 없으며 법정에 나와서 그 진술이 맞다고 해야 증거로 쓸 수 있다. 그 종업원은 아예 증인소환이 불가능하므로 경찰 진술을 증거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 옆방 조용환 변호사는 증거로 써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려고 헌법소원까지 냈다. 한편 선장은 법정에 나와서 애매한 말로 일관했다. 검찰에서는 오연희와 대질을 하면서 자신이 두 남녀를 이내창과 함께 유림해수욕장까지 데려다 준 사실은 있지만 오연희 등은 아니라고 하여 당초 진술을 번복했었다. 다시 법정에서는 검찰에서 그렇게 말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한술 더 떠서 검찰에서 진술내용을 읽어주지 않았고 서명은 자기 글씨가 아니라 했다. 검사의 증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변호인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변했다. “이내창과 그 일행은 배에 타기 전에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린 다음 유림해수욕장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동행하는 걸로 보였다. 8월16일과 17일 경찰과 함께 선착장에서 이내창 일행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그 일행’이 오연희 등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법원도 애매하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이내창과 오연희가 다방에 함께 왔다는 종업원의 최초 진술 사실, 이내창과 박철수를 배에 태웠다는 선장의 맨 처음 진술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망 직전 오연희 등이 이내창과 동행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공순 기자가 이걸 사실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며 공익 목적 보도였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야말로 ‘애매’ 그 자체였다. 1996년 대법원에서 재판이 끝나고 그로부터 다시 4년이 지난 2000년 12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우리 법무법인 덕수에 이공순 기자 재판기록이 보관되어 있어서 기본 자료로 삼을 수가 있었다. 상임위원이었던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9년 8월 당시 평양에서 임수경이 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있었던 걸 기화로, 정보기관이 프락치를 운동권 핵심인 양 이내창에게 접근시켜, 임수경 쪽으로부터 무슨 연락을 가지고 온 사람이 거문도에 오기로 되어 있으니 거기에 가서 만나보라고 유인한 게 아닐까. 거기서 무슨 조작된 문건 같은 걸 받아 돌아오려는 순간 덮쳐서 이내창이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고 임수경도 단순한 전대협 대표가 아니라 북의 지령을 받고 움직인 간첩이다, 전대협 역시 북의 지령을 받는 단체다 하고 몰아가려 한 게 아니었을까.’
생전의 이내창씨. 조소학과 출신으로 민미련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고 있던 그는, 이 때문에 안기부의 역공작과는 별도로 거문도에서 경찰의 미행을 받고 있었다. 이내창 열사 추모사업회 제공
안기부는 북에서 전갈이 온 양
역공작으로 이내창을 거문도 유인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선
민미련 수사차 이내창을 미행
체포과정에서 역공작 탄로나며… 의문사위의 중요한 성과는
다방 종업원을 찾아낸 거였다
그녀는 처음엔 제대로 말했는데
나중에는 시달려서, 또 대질 때
오연희의 눈빛이 하도 애절해
말을 바꾼 것이라고 했다 쫓기던 이내창과 그를 감시하던 세 남자
또한 그해 7월 민미련이 주관하여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슬라이드를 평양청년학생축전에 보낸 바 있었다. 청년학생축전은 북의 초청 이전에 남쪽 대학 학생회장 선거에서 먼저 참가를 제안했었고, 노태우 정권은 이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관변기구까지 만들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허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걸개그림을 보낸 민미련 대표 홍성담을 간첩 혐의로 구속해서 엄청난 고문을 했다. 민미련 관련 활동을 하던 이내창을 고리로 이 사건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려 들 수도 있었다. 의문사 위원회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여럿 드러났다. 당초 신영 훼리호 승선자 명단에는 1번 이내창, 2, 3번 오연희, 박철수 순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공순 기자 재판과정에서 안기부 직원 오연희는 배표를 구한 경위를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휴가를 받아 거문도에 놀러 가려고 사무실 직원 소개로 안기부 여수분실 ‘양양’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배표를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8월14일 오후 여수 분실 현관에서 ‘양양’으로부터 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양양’ 등 여수 분실 직원들은 나중에 의문사위원회에 나와, 자신들은 오연희로부터 직접 전화 받은 일도 없고, 인천 분실에서 연락이 왔기에 여객 터미널에 전화 한통으로 끝냈으며, 굳이 터미널까지 가서 배표를 구해다가 오연희를 만나 직접 전달해 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오연희 개인이 놀러 가려고 표를 구한 게 아니라 안기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짐작게 하는 정황이었다. 그리고 그 표는 8월15일 아침 7시 출발하는 고속선 타코마호 승선표였다. 이 배로 거문도까지 1시간30분이면 가는데 오연희는 왜 어렵게 구한 표를 바꾸어 8시 출발에 5시간이나 걸리는 신영 훼리호로, 이내창 바로 뒤에 승선했던 걸까. 의문사위 조사 결과 신영 훼리호 선실에서 줄곧 이내창을 감시하던 남자 세 사람이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내창은 오후 1시경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착장 부근 민박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람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쫓기듯 들어오더니 ‘아줌마 방 있어요? 하고 물으면서 신발도 벗지 않고 마루에 올라왔어요. 방을 가르쳐주었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뒷문 있어요?’ 하고 묻고는 죄송하다면서 황급히 뒷문으로 도망갔어요.” 이내창도 배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남자들을 눈치챘던 걸로 보인다. 의문사위 조사의 중요한 성과는 다방 종업원을 찾아낸 거였다. 법원도 주소나 주민번호를 몰라 불러내지 못했던 그녀를 곡절 끝에 찾았는데 전방 직업군인 상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처음엔 협조를 거부했다. 지금 기억으론 남편이 못 나가게 해서 협조가 안 되는 걸로 추정하고 의문사위원회에 파견 나와 있던 보안사 수사관에게 해결을 맡겼던 것 같다. 그녀는 위원회에 나와 당시 다방에 이내창과 오연희가 왔던 것이 사실이며 처음에는 제대로 말했는데 나중에 시달려서, 그리고 대질 시 오연희의 눈빛이 하도 애절해서 아니라고 말을 바꾼 거라 했다. 한편 오연희는 박철수와 함께 8월15일 오후 1시경 거문도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2시 반에 박철수 친구들이 마중 나와 영국군 묘지 등을 구경하고 놀다가, 5시에 ‘거문호’ 배를 타고 서도에 갔으며 다방엔 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도에 사는 친구의 친척은 친구 일행이 2시 반이 아니라 오후 5시 무렵에 비로소, 거문호가 아니라 동네 배를 빌려 오연희를 마중 나갔다고 전혀 다른 진술을 했다. 거문호 선장도 그날은 국경일이어서 아예 운행을 안 했다고 증언했다. 박철수의 친구도 오연희, 박철수한테서 거문도 다방에 갔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여수 경찰에 진술했다. ‘치끌바위’ 부근에서 무언가를 찾던 두 남녀
의문사위 조사에서, 8월15일 오후 4시경 이내창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남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유림해수욕장 옆 ‘쌍바위’에서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고등학생 진술도 나왔다. 그리고 오후 6시경에는 경찰이 실족 예상 지점이라고 한 ‘치끌바위’ 부근에서 남녀 2명이 해변을 살피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보았다는 주민 증언도 있었다. 8월15일을 전후해서 서울시경, 대전시경 경찰관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거문도에 와 있었고, 이내창이 죽은 다음날인 8월16일 유림해수욕장을 빠져나갔다는 피서객 증언도 학생들에 의해 확보된 바 있었다. 2001년 여름, 나는 조사관들과 거문도에 가서 현장을 살펴보았다.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바위는 둥글고 커서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법하지 않았다. 설령 물에 빠지더라도 경사가 완만하고 수심이 1.5m 정도여서 빠져 죽을 상황은 아닌 걸로 보였다. 사람과 똑같은 크기, 무게를 가진 마네킹을 여기저기서 바다로 던져 보았다. 조수의 움직임을 보려 한 것이었는데 실족했다는 지점에서 던져도 사체가 발견된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결론을 보지 못하고 의문사위원회를 떠났고 나중에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아쉬웠다. ‘안기부가 이내창을 민미련과 전대협의 중요 연결고리로 삼아 내사공작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내창이 사망하였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국정원은 내사기록 및 관련자 존안자료에 대해 비협조로 대응함으로써 관련자 신원 확보와 이내창에 대한 가해과정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하였다.’ 나는 한 편의 첩보영화 같은 이런 추리를 해 본다. ‘당시 안기부는 북에서 임수경 전갈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양 이내창을 거문도로 유인하는 역공작 중이었다. 그런데 이 사정을 모르는 경찰 쪽에서 민미련 사건 수사차 이내창을 미행해 거문도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이내창 일행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이내창이 역공작을 눈치채게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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