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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중앙정보부 엘리트 동생도 설마했던 ‘형의 죽음’

등록 2012-08-17 19:30수정 2012-08-18 15:39

1973년 10월19일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마당에 떨어진 최종길 교수의 주검. 중앙정보부가 현장검증 사진이라면서 공개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10월19일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마당에 떨어진 최종길 교수의 주검. 중앙정보부가 현장검증 사진이라면서 공개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8) 최종길 교수 의문사(상)
누렇게 빛이 바랜 흑백사진 속에 한 남자가 있다. 양복 웃옷까지 갖춰 입은 채 땅바닥을 베고 하늘을 바라보고 누웠다. 한 남자의 삶 전체가 저렇게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마흔둘, 중년의 나이에도 얼굴에는 아직 청년의 싱그러움이 남아 있다. 흐트러진 머리칼. 그 주위 땅바닥엔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넓게 번졌다. 저 남자는 왜 저기 저리 슬픈 모습으로 누워 있는 걸까. 달랑 사진 한 장, 그것도 흑백사진으로.

반유신 시위가 번지던 1973년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동생 손을 잡고 중정에 왔다
중정 감찰실에 근무하던 동생은
‘설마 무슨 일 있겠나’ 했지만…

동생은 형을 안내한 10월16일
저녁 퇴근때 출입자 통제소에서
주민등록증 보관함을 살폈다
주민증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엘 다 와보는구나”
1973년 10월19일 새벽. 남산 중앙정보부 마당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또 보았다. 2001년 여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으면서, 간첩으로 몰려 죽은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사건을 조사하던 때 일이다. 그 ‘피 묻은 사진’을 보면서 성서 창세기 한 대목이 떠올랐다.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받아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왕조시대의 전제군주보다 더한 권력을 누리기 위해 중정을 통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똑같이 묻고 싶었다. ‘당신들이 저 사람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저 사람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다.’ 하긴 그래, 이미 당신도 저 피를 받아낸 땅에서 쫓겨났지.

어떤 영감이라도 떠오를까, 혹시 어떤 단서라도 있을까.

사진은 중앙정보부가 검사 입회 아래 현장검증을 하면서 찍은 거라 했다. 중정 남산 청사 7층에서 조사를 받던 최 교수가 화장실 변기를 밟고 창문에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했다.

그 바로 3일 전 최 교수는 동생 손을 잡고 남산 중정에 왔다. 동생 최종선은 중정 공채에 수석으로 합격해서 ‘중정 안의 중정’이라는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감찰실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높던 중정 직원들을 감시하는 부서였다.

동생은 당시를 이렇게 썼다.

“73. 10. 16. 오후 1시45분, 나와 형은 아스토리아 호텔 지하 다방에서 만나 차 한잔 마시고 웃으며 걸어서 남산 청사 정문에 도착했다. 나는 담당과에 전화를 걸어서 형님께서 오셨음을 알렸다. 형님이 안내 직원을 따라 들어가기 전에 나는 ‘그들을 믿어도 좋을까’ 하는 불안을 감추고 ‘형님, 이 못난 동생의 직장, 이때 한번 봐 두십시오’ 하며 웃었다. 형도 ‘허허! 말로만 듣던 남산에를 다 들어가 보게 되었구나’ 하면서 같이 웃으시더니…. 이것이 나와 형의, 우리 형제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 줄이야.”

최 교수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쾰른 대학에서 우리나라 사람 최초로 민법 전공으로 독일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중정은 최 교수와 제물포고등학교 동창인 이재원이라는 친구를 북과 내통하고 있는 첩자로 지목했다. 그러던 차에 역시 독일에서 유학하다 돌아온 이아무개가 중정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동베를린에 갔다 온 죄를 면제받으려고 최 교수 이름을 댔다.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50~60년대 베를린은 유학생들의 무덤이라 할 만했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에서 비롯된 극단의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에 사람들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일본이나 독일, 그 밖에 유럽 여러 나라들은 사회당, 공산당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 사상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리고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지하철을 타면 동베를린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가 있었다. 호기심에서, 지하철 타고 서울에서 인천 가듯 동베를린에 갔다 온 유학생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중정에서 볼 때 이들은 너무너무 훌륭한 먹잇감들이었다. 아마 이랬을 거다. ‘어이구, 내 밥이 득시글득시글하는구나.’

최종길 교수의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수 시절. 1970년대 초반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최종길 교수의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수 시절. 1970년대 초반의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밀고자’가 된 유학생들 운명, 그리고 천상병
최 교수를 조사했던 중정 수사관 차철권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지 마라. 당시 한국에서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있은 다음이라 동베를린에 갔다 왔다는 자백만 받아도 바로 간첩으로 볼 때였다.”

중정은 동베를린에 갔다 온 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겁을 주고는, 다른 유학생들을 불면 봐주겠다고 회유를 했다. 이렇게 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첩 후보자’들이 중정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중정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수많은 유학생들이 프락치가 되었으니 그들의 신세 또한 너무도 딱했다. 내가 살기 위해 친구, 지인의 이름을 대야 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평생 동안 그들은 ‘배신자’라는 양심의 가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을 테니 그들 또한 박정희 중앙정보부의 피해자였다.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정치학 개론 수업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 소설을 쓴 도스토옙스키 평전을 번역했고, 헤겔을 소개하던, 그래서 너무 존경스러웠던 어떤 선생님도 나중에 들으니 젊은 시절, 이 밀고자 중의 한 사람이었단다. 아아, 마음이 아팠다.

그는 1967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동베를린에 갔다 온 주변 사람들 이름을 중정에 털어놓았다. 당시 박정희는 대통령을 두번만 연임하게 되어 있는 헌법 조항을 바꾸려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총선 부정이 있었다며 학생과 국민들이 저항했다. 그러자 중정은 이 밀고를 빌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이응노 화백 등 예술가, 교수, 학생, 공무원 등 194명을 엮어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던 시인 천상병도 이 사건의 희생자였다.

몇 년 전, 인사동에서 찻집 ‘귀천’을 운영하던, 천상병의 부인 목순옥이 나를 찾아와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소했다. 1967년 당시 중정은 천상병을 공갈죄로 엮었다. 그가 친구인 아무개 교수로부터 유학 시절 동베를린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를 당국에 알리지 않을 테니 막걸리 값 백원만 달라고 공갈을 쳤다는 거였다. 천상병이 이렇게 친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뜯어낸 돈이 도합 5만원이었다나? 그가 늘 어린애 같은 천진함으로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막걸리 값 하게 백원만’ 하고 다녔었다. 그런데 중정은 터무니없이 그를 잡아다가 매질하고 코에 물을 들이부었다. 그는 3개월 만에 풀려나서 행방불명이 된 뒤로 4년을 행려병자로 떠돌다가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이 삶을 이렇게 만든 죗값은 대체 누가 받아야 하는 건가. 박정희? 중정? 검사? 판사?

나는 목순옥 여사를 여러 번 만나 천상병 시인의 재심을 준비했다. 그런데 문제는 천상병에게 공갈을 당했다는 친구가 아예 동백림 사건의 ‘동’ 자도 듣기 싫다며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 거였다. 차일피일 세월만 가던 어느 날, 그만 목 여사가 갑작스레 남편을 따라 귀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천상병에게는 한점 혈육이 없었으니 나는 재심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이 세상 소풍이 아름다웠다’는 천상병 시인이 어디 구질구질하게 이 세상 면죄부를 바라기나 했겠나.

데모 막는 게 주임무였던 학생과장이었는데…
1971년 유학생 이아무개로부터 최종길 교수 이름을 듣고 ‘존안부’에 올려놓았던 중정은 1973년 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만약 처음 제보를 받았을 때 그 내용이 상당히 알맹이가 있는 것이었다면 2년 동안 묵혀 둘 까닭이 없었다. 이아무개의 제보는 그저 최 교수가 북한 첩자로 의심받고 있는 이재원의 친구이고, 그로부터 800마르크를 빌린 적이 있다는 수준이었다.

간첩 혐의가 있으면 중정 수사과 담당이었는데 최 교수는 수사과가 아니라 수사공작과에서, 수사가 아닌 심사를 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죄를 추궁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고 앞으로 최 교수를 공작에 활용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려 한 것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대통령을 세번째 하면서도 이번에는 아예 영구집권을 하려고 ‘10월 유신’이란 걸 선포하고 제가 만든 헌법을 스스로 파괴해 버렸다. 1973년에 접어들면서 이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시작되고 10월2일 서울대를 시작으로 반유신 시위가 대학가에 번졌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억누를 빌미가 필요했다.

최 교수는 서울법대 학생과장이었다. 말이 학생과장이지 학생 데모 막는 게 주 업무였다. 최 교수가 간첩이면 서울대 학생들이 빨갱이에게 조종당한 거라 몰 수 있다. 1967년 삼선개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백림 사건을 이용하고, 1974년 민청학련 학생들을 빨갱이 조종을 받은 걸로 몰기 위해 인혁당 사건을 만들어낸 거와 거의 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해 ‘빨갱이’ 카드를 수시로 빼들었지만 오히려 그야말로 그 분야의 원조였다. 최 교수의 동생은 2001년,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 ‘공동선’에서 형의 죽음 전말을 밝히는 <산 자여 말하라>라는 책을 냈다. 그 책에서 그는 박정희의 전력을 길게 인용했다.

거기에 따르면 박정희는 일제 때 교사 생활 3년에 출세를 위해 일본군 소속 만주신경군관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1942년 우등으로 졸업하면서 이런 답사를 읽었단다. “만주국의 왕도 낙도를 지키고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나는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 그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 졸업을 한 그는 일본군 소대장으로 중국 팔로군 게릴라 토벌에 나섰다. 팔로군에는 수많은 우리 독립군들이 배속되어 싸우고 있었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1949년 대구폭동을 일으킨 좌익세력의 우두머리였다. 박정희 그 자신도 그 무렵 국방경비대 소령으로, 좌익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1949년 2월13일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최 교수의 동생은 형을 중정에 안내해 간 날인 10월16일 저녁, 퇴근하면서 중정 출입자 통제소에서 주민등록증 보관함을 살폈다. 그런데 형이 낮에 들어가면서 맡겨놓은 주민증이 보관함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나. 친구 이재원과의 관계에 대해서 몇마디 물어보고 서너 시간 지나면 내보내 주겠지. 이렇게 낙관했던 동생에게 덜컥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다음날인 10월17일 아침 출근길에 동생은 다시 보관함을 살펴보았다. 아, 그날 아침에도 형의 주민증은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면서 다시 거길 쳐다보았다. 그때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형님이 겪고 계실 고초를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으며 당장 형님이 계신 지하실로 달려가 강제로라도 형님을 구출해 나오고 싶었다.’

10월18일 아침과 저녁에도 여전히 형의 주민증은 거기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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