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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아, 그들은 진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단다

등록 2012-08-24 19:14수정 2012-08-25 13:43

1973년 10월21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직계가족들만 모여 치른 최종길 교수의 장례식. 이 기막힌 순간에도 영문을 모르는 여섯살짜리 딸 희정(맨 왼쪽)은 무덤가를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 옆으로 아들 광준군, 동생 종선씨, 부인 백경자씨.  <한겨레> 자료사진
1973년 10월21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직계가족들만 모여 치른 최종길 교수의 장례식. 이 기막힌 순간에도 영문을 모르는 여섯살짜리 딸 희정(맨 왼쪽)은 무덤가를 웃으며 뛰어다녔다. 그 옆으로 아들 광준군, 동생 종선씨, 부인 백경자씨.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18) 최종길 교수 의문사(하)
2002년 의문사위 조사 결과
최 교수가 간첩자백을 하고
양심 가책 못 이겨 자살했다는 등
중정 발표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관 증언에 따르면
“7층 비상계단에서
최 교수 미는 걸 보았다며
김종한 계장이 시늉을 했다”
그러나 김종한은 이미 사망
화장실 추락사 주장한 김상원은
캐나다로 이민가 입을 닫았다

“존경하는 중앙정보부장님,

우리는 나라를 배신한 천인공노할 간첩 최종길의 가족으로서 그가 간첩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조국을 배반하고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결국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은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우나 살아있는 가족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부디 살아남은 우리 가족을 불쌍히 여겨서 부장님께서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며 최종길의 죄상을 신문에 보도하지 않고 호적에 기재하는 등 사상적 제한을 가하지 않음으로써 자손들이 밝게 살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간첩 최종길’ 표현까지 써야 했던 유족들
최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받다 죽은 10월19일 그날 저녁. 그의 처와 형, 동생 최종선은 중정의 요구로 이런 내용의 각서, 아니 탄원서를 썼다.

최 교수의 처와 형제들은 자신의 남편, 동생, 형인 죽은 최 교수를 향해 ‘천인공노할 간첩’이라고 했고, ‘조국을 배반했다’고도 했고, ‘최종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럽다’고도 했다.

가족들은 최 교수가 간첩 자백을 했다는 중정의 이야기를 듣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사건이 신문에 나지 않게 해 달라, 가족들이 연좌제 피해를 받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을 중정이 들어주는 대가로 이 탄원서를 썼다. 그 절망의 시간들….

10월21일 아침, 주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가족 몇이 모여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 최 교수를 묻었다. 최 교수의 6살짜리 딸은 이 기막힌 순간에도 아버지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채 무덤가를 웃으며 뛰어다녔다.

나흘 뒤인 10월25일 중정은 유럽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공무원, 교수 등 총 54명이 정부 주요 기관, 학원, 기업체에 침투하여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최 교수는 ‘구라파 거점 학원침투 거물간첩’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을 지내던 2001년 12월10일, 필자가 기자회견장에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를 중정 직원들이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렸다는 중정 전직 간부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의문사진상규명위 상임위원을 지내던 2001년 12월10일, 필자가 기자회견장에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를 중정 직원들이 창밖으로 밀어 떨어뜨렸다는 중정 전직 간부의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간첩 최종길은 1957. 11. 인천중학교 동창인 북한 공작원 노봉유에게 포섭되어 김일성 선집 등을 탐독하여 오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흠모하여 오다가 1958. 10. 하순 동백림 비밀 아지트에서 유학생을 포섭할 것을 지령받고, 1960. 5. 평양에 가서 20일 동안 체류하면서 사상교양과 간첩교육을 받았고, 1962. 8.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법대 학생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북한의 지령을 15차례에 걸쳐 받은 후 한일회담 반대, 삼선개헌 반대 등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해 왔다.’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2000년 12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가족들의 진정으로 조사를 개시했다. 나는 상임위원으로서 조사를 총괄했고, 조사관들은 약 800명의 관련자들을 탐문, 조사했다.

무엇보다 터무니없었던 것은 그 어마어마하게 그린 유럽 간첩단 사건의 54명에 이르는 간첩 중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단 2명이라는 거였다.

의문사위원회에서 이들을 소환하자 대부분은 30년 전 일을 다시 돌이키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상당수는 내 앞에 와서 자신들이 그 사건으로 조사받은 내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이 불기소 처분을 받은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에 연합전선을 형성하려 했다’는 간첩들이 거의 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니와, 자기가 간첩으로 수사를 받고 불기소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그런 간첩도 다 있나.

재판을 받은 단 두 명도, 한 명은 무죄고, 다른 한 명, 김장현은 당시엔 징역 4년형을 받았으나 최근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김장현은 당시 경제기획원에서 촉망받던 관료였다. 그의 동료들은 후에 경제부처 장관, 대기업 고위 임원 등을 지냈다. 김장현도 최 교수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 최고 엘리트의 길을 걸어갔을 거였다. 그래도 최 교수처럼 목숨을 잃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중정은 최 교수가 10월19일 새벽 1시40분경 평양에 갔다 온 간첩이라는 사실을 자백하고는 ‘끊었던 담배를 7년 만에 피워본다’며 연거푸 두 개비를 피우고, 용변을 구실로 7층 화장실에 가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변기를 밟고 창으로 올라가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국내 조직의 파괴로 북 당에 대한 사명감과 자신은 물론 가족 친지 등에까지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남기게 됨을 비관한 자살.’

차철권의 ‘천지신명과 어머니와 양심’
의문사위원회 조사에서, 사건 당시 중정부장 이후락을 비롯한 차철권의 상급자나 동료, 같이 조사했던 사람들 모두가 하나같이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이를 확실히 뒷받침하는 사실 하나. 당시 중정 관계자들은 최 교수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대책회의를 열었다. 10월16일 최 교수를 동생을 시켜 중정에 데려다 놓고 19일 새벽까지 3박4일 동안 최 교수로부터 어떤 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서 한 장 받아낸 게 없었다. 간첩임을 입증할 만한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마치 최 교수에 대해 상당 부분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처럼 서류들을 소급해서 허위 작성했다. 긴급 구속장, 피의자 신문 조서, 압수수색 조서 등.

현장검증 조서도 허위로 꾸몄다. 19일 새벽 4시40분 검사 입회 아래 현장검증을 하고 추락 사진을 찍은 양 서류가 꾸며져 있었지만 위원회 조사 결과 현장검증은 없었고, 시신은 새벽 4시5분에 이미 국과수에 안치되었다.

10월25일자 중정의 신문보도 발표문 작성자는 이리 증언했다. “신문보도문에 최 교수가 평양에 가서 노동당에 가입하고 공작금을 받았다는 내용은 진술서나 피의자 신문 조서 같은 어떤 근거자료를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고 아무개가 메모해서 주면 짜깁기 식으로 작성을 한 것입니다.”

의문사위원회 조사의 핵심은 고문 여부와 사망 경위였다. 차철권은 위원회에서 고문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다.

“잠재우지 않은 것을 빼고는, 제 생명을 걸고 천지신명께 맹세코 최 교수를 고문하지도 죽이지도 않았습니다. 자유당 시절 제가 육군 특무부대장교로 복무할 때 어머니는 ‘남의 눈에 눈물 나오게 하면 너나 네 자손 대에서 반드시 피눈물 흘리게 될 것이니 절대로 남에게 악행을 하지 말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 제일 중요한데 저는 양심껏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살 만큼 살아서 머지않아 저승에서 최 교수를 만나게 될 터인데, 더구나 형사처벌 시효가 끝난 지금 뭐가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늘에 맹세코 저는 최 교수의 뺨을 한 차례도 때린 일이 없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도 할 말이 많습니다. 그 기구는 대통령 직속으로 국민 혈세로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국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공산당과 싸워온 나를 허무맹랑하게 모함하고 있어요. 세상이 바뀌면 내가 진짜로 진상규명을 요구할지도 몰라요. 누가 국민 혈세를 낭비했는지 따질 때가 올지도 모른단 이야기입니다. 두고 보세요.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천지신명과 어머니와 양심’을 걸었다. 하지만 최 교수 신문에 간여했던 중정 직원 양아무개의 증언은 이랬다. “최 교수는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런닝, 팬티만 입고 있었습니다. 차철권은 ‘이 새끼 제대로 불지 못해’ 하면서 발로 걷어차고 변아무개는 야전침대에서 뺀 몽둥이로 빠따를 때렸습니다.”

그 밖에 여러 간부와 직원들이 최 교수에 대한 고문 사실을 시인했다. 최 교수의 둔부 사진에는 엄청난 멍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게 그들 손바닥 안에 있던 중정 사람들이 30년이 지나 의문사위원회에 나와서는 정말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내 앞에서 서로 책임을 떠밀었다. 아래는 위에서 시켜서 그랬다는 거였고, 위는 아랫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저질렀다는 식이었다. “부하들을 믿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다.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엉덩이의 상처는 몽둥이로 심하게 매질을 해서 생긴 상처다. 이런 몸으로는 걸어다니는 것도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타살이 분명하다, 타살이 분명하다…
7층 화장실 상황에 대한 진술들은 더 의심스러웠다. 최 교수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다는 김상원은 최 교수가 소변기에서 토하기에 비위가 상해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이에 소변기를 딛고 창문에 올라서 아래로 떨어졌다 했다. 그런데 자신이 최 교수 발목을 잡았었다고 했다가 또 그냥 스치기만 했다고 번복했다. 차철권도 최 교수가 투신하려 할 때 한동안 설득을 했다고 했다가, 자신이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떨어졌다고도 했다. 심한 고문으로 거동이 어려운 사람이 소변기 앞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창문을 열고, 창문 턱을 잡고 소변기 아래 부리 쪽에 한 발씩 차례로 올려 올라서고, 다시 소변기 맨 위로 올라서고, 거기서 창틀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몸을 던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마련. 그동안 옆에서 밀착감시를 하던 김상원은 무얼 했다는 건가.

일본 법의학자는 최 교수 앞이마와 왼쪽 발바닥, 양팔의 골절 부위는 피가 응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다음에 추락해서 생긴 상처라는 소견을 냈다.

당시 7층 조사실 옆방에서 자고 있던, 차철권의 직속 상관 안아무개는 의문사위원회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1973년 10월18일 밤 12시경쯤 차철권의 추궁 소리와 최종길 교수의 비명 소리를 들었고, 그 이후 다급하게 화장실 쪽에서 조사실 방향으로 2명 정도가 뛰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 약 30분에서 1시간 후쯤 김종한 계장이 내가 취침하고 있는 조사실로 들어와 7층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가 손짓으로 미는 흉내를 내면서 ‘여기서 최 교수를 밀어 버렸어’라고 해서 그 즉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와 비상출구로부터 약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시체를 확인하였던 것으로, 타살이 분명하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종한은 이미 사망해서 이 증언의 신빙성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사건의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의문사위원회를 떠났다. 몇 년 뒤 법원이 국가에 유족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명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랬다.

‘최종길은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하여 사망하였거나, 고문 등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피하려는 과정에서 사망하였거나, 또는 고문 등 가혹행위에 따라 의식불명 상태에 이른 최종길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수사관들이 건물 밖으로 던졌을 것으로 인정된다.’

최 교수의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던 중정 직원 김상원은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리고 진실을 들으러 멀리까지 찾아갔던 조사관을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했다. 기자에게는 ‘진실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차철권도 나이가 들어 자기 말마따나 머지않아 저승에서 최 교수를 만날 게다.

최 교수의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걸어 대학에서 민법을 가르치고 있다.

형 손잡고 남산 중정에 갔고, 형을 천인공노할 간첩이라고 적은 용지에 서명을 했던 슬프디슬픈 동생도 이 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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