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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범행도구는 커튼줄…”

등록 2012-09-21 19:35수정 2012-09-23 13:59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는 제3자가 경비 몰래 드나들 수 있었다. 담을 딛고 들어갈 수 있는 3층 비상계단. 1심은 제3자가 경비 몰래는 들어갈 수 없는 걸 전제로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나는 항소심 재판부와 현장검증을 가서 3층 비상계단으로 제3자가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사건이 발생한 아파트는 제3자가 경비 몰래 드나들 수 있었다. 담을 딛고 들어갈 수 있는 3층 비상계단. 1심은 제3자가 경비 몰래는 들어갈 수 없는 걸 전제로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나는 항소심 재판부와 현장검증을 가서 3층 비상계단으로 제3자가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1)…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2)
경비실 뒤편 자전거보관소를 거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
경비실 뒤편 자전거보관소를 거쳐서 밖으로 나가는 통로
검사나 판사는 탐정이 아니다
“범행도구는 커튼줄일 수도…”
“7시 이전 발화됐을 가능성…”
1심 법원은 추정만을 가지고
남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경찰은 남편이 출근하는 척했다
비상계단을 통해 몰래 돌아와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출근한 게 밝혀지자
이번엔 계단이 막혀 있어서
제3자가 아파트 드나들 수 없다며
남편을 범인이라고 몰았다

‘이 쓸모없는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양평 생매장 사건 때 내가 맡았던 여자의 공동 피고인인 윤용필은 1992년 겨울에 장기를 기증하고 갔다. 오태환은 끝까지 억울하다고 항변했지만 결국 1994년 가을 교수대에 섰다. 나는 한동안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들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몇 해 뒤,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을 새로 맡아 변론하려니 심적 부담이 엄청났다. 피고인의 억울함을 확신할수록 어떻게든 사형은 막아야 했다. 아마 그때 1심을 뒤엎지 못했다면 남자는 1997년 12월30일 김영삼 정권이 23명이나 되는 사형수들을 처형할 때 그 죽음의 대열에 끼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발 사형집행을 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지금 다시 돌이켜 보아도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뛰고, 머리털이 솟구치는 거 같다.

‘심증 가나 물증 없어 무죄’라는 무책임한 보도
8년여 세월 동안 모두 5개의 재판부, 17명의 판사와 대법관들이 사형, 무죄, 사형, 무죄, 무죄를 오갔다. 정말 피가 마르는 일이었다. 사형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를 들 때 나는 늘 이 사건을 이야기한다. 판사들이 다들 나름 최선을 다해 재판을 했겠는데 결론은 천당과 지옥, 사형과 무죄라는 극단의 정반대 결론이 났다. 재판부 따라 죽음과 삶의 길이 갈린다? 이걸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도 ‘사형은 이제 그만’이다.

경찰이 사건 발생일인 1995년 6월12일 현장 감식 당시 목욕탕에서 발견한 피해자의 면 티셔츠. 경찰은 그럼에도 남자에게 “처의 면 티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계속 다그쳤다.
경찰이 사건 발생일인 1995년 6월12일 현장 감식 당시 목욕탕에서 발견한 피해자의 면 티셔츠. 경찰은 그럼에도 남자에게 “처의 면 티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계속 다그쳤다.
1만여 쪽이 넘는 기록을 보면서 나는 차근차근 무죄를 입증할 방도를 찾아 나갔다. 당장 1심 판결문을 보니 형사재판의 기본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사건은 직접증거가 전혀 없다. 두 모녀의 사망 시각과 화재 발생 시각이 남자가 출근한 아침 7시 전이냐 후이냐에 따라 범인이 남편인지 제3자인지 갈렸다. 그런데 검사가 주장한 사망 시각이나 화재 발생 시각 모두가 다 그저 ‘추정’일 뿐이었다. 이런 추정만을 가지고 섣부르게 살인범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건 처음부터 너무 위험한 발상이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은 검사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Proof beyond the reasonable doubt)을 다했는지에 달려 있다. 반대사실의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그저 확실성에 근접하는 고도의 개연성만 가지고 유죄를 선고해서는 안 된다고 책에 씌어 있다.

그런데 1심 판결은 그저 개연성만 가지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 6월11일 밤에서 12일 새벽 사이에 부부 사이에 ‘어떤’ 언쟁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범행도구는 커튼줄이 될 수도 있다.’

‘07:00 이전에 발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물의 온도는 미지근한 정도였다.’…

이건 판결문이라기보다는 추리소설로 읽혔다. 탐정이나 경찰은 초동 단계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해야 한다. 하지만 검사 단계에 오면 그게 아닐 가능성도 있을 경우 섣불리 기소를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법관에 이르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으면 칼같이 무죄를 선고하라는 게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다. 그런데 ‘일 수도 있다’고? 그럼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판사는 탐정이 아니다.’

나는 언젠가 중견법관 연수 때 판사들에게 이런 강의를 했다.

두 번의 고등법원 재판에서 나는 사망 시각이나 화재 발생 시각 모두 7시 이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반대사실을 적극적으로 입증했다. 외국 저명 법의학자도 부르고 실제 화재실험도 했다.

당시 몇몇 언론들은 재판 내용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막연히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어 무죄’라는 식으로 보도를 했고 나는 이게 재판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노심초사했다. 그중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정도가 심해서 담당 피디를 고소할 준비까지 했다. 그런데 바로 그 피디 자신에게 억울한 일이 생겨 내가 도와주게 되는 바람에 차마 고소는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런 보도들은 사회 분위기를 안 좋게 만들어 첫번째 고등법원 무죄판결이 대법원에서 파기되는 데 일조를 한 게 아닌가 싶다.

경찰은 부부 사이가 처음부터 계속해서 안 좋았다는 쪽으로 몰아가려고 억지를 썼다. 어느 부부나 대개는 서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초기에 갈등이 좀 있게 마련이다. 경찰은 4, 5년 전 갈등이 나타나 있는 일기나 편지만을 몇 개 골라내서 증거로 냈다. 그 이후 사건 직전까지 사이좋게 지낸 정황들이 너무 많았는데도 이건 싹 무시했다.

항소심에서 현장검증을 나갔을 때 나는 다른 편지들을 많이 찾아냈다.

‘당신, 저를 믿고 밀어주고 감싸주고 편들어 줘야 돼요. 안 그러면 으앙…울어버릴 거야.’

남자가 1995년 5월 제대하고 개업 준비를 하다 6월12일 사건이 일어난 거였는데, 나는 직전 3, 4월 두 달 동안의 통화내역을 조회해 보았다. 두 달 동안 남자는 처에게 69통, 처는 남자에게 115통, 매일 3통씩 전화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부부가 싸우느라고 매일 이렇게 열심히 전화를 해댄 걸까.

무려 27시간 동안 잠 안 재우고 조사
남자는 사건 일주일 전 처와 딸 그리고 장모까지 모시고 괌 여행도 다녀왔다. 그 뒤에는 부부가 출근도 않고 하루 종일 집에서 야한 동영상을 빌려다 보기도 했다.

장모는 평소 남들에게 “성품이 착실하고 남에게 나쁜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착한 사위”라고 말해왔다. 사건 당일 첫 조사 때도 “부부 사이가 너무 좋습니다. 잉꼬부부로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도와주고 빨래를 널어주는 모범적인 사위”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사위 쪽으로 수사가 진행되자 그 뒤로는 여러차례 법정에 나와 사위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정반대 증언을 했다. 딸을 잃은 어머니 심정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변호인의 입장에서 이 불쌍한 할머니가 참으로 난감했다.

‘처음 신혼 때 집사람이 학교를 다니면서 제 동생들과 저를 뒷바라지하느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집사람과 동생들하고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중간자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해서 여동생은 누나 집에, 남동생은 몸이 허약해서 집으로 내려가서 직장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처가 가장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제 남동생이 병이 심해져 죽은 후 제가 자책감으로 상당기간 저나 집사람이 힘들었었습니다. 그때 부부가 같이 담배를 피웠던 적도 있습니다.’

남자는 사건 이틀 뒤 경찰 자술서를 쓰면서 결혼 초기 처와 시동생 사이 갈등같이 다른 사람들은 알 리 없는,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려고 사체를 더운 물에 담가놓고 발화 시간도 조절했다는 노회한 범인이 갑자기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왜 먼저 경찰에 꺼내놓는다는 건가.

6월11일 밤에서 다음날 새벽 사이에 살인까지 벌일 정도로 부부싸움을 했다면 그 야심한 시각에 이웃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경찰은 세밀히 수사를 했고, 실제로 910호 부부싸움 소리를 들은 사람들까지 나왔지만 정작 사건이 난 708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은 6월17일 오후 2시부터 다음날 오후 5시까지 무려 27시간 동안 남자를 잠도 재우지 않고 조사했다.

“202호 아주머니 진술에 의하면 남편인 당신이 그 아주머니에게 ‘안방에서 불이 났어요?’ 하고 물었다는데 그랬나요? 불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 상식인데 어떻게 안방에서 불이 났냐고 물어보는가요.”

네가 범인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이건 허위사실을 전제로 유도신문을 한 것이었다. 실제로 202호 아주머니는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었다.

남자는 만 하루 이상 잠을 못 잔 상태에서 경찰이 자꾸 추궁을 하자 “(이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다가) 제가 그때 가족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았다면 정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라고 답변한 걸로 적혀 있었다. “(이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다가)”라는 기재는 마치 남자가 범행을 숨기려고 애쓰다가 제대로 된 신문에 걸려 답변이 궁색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경찰의 의도였다.

그날 이런 식 신문은 계속되었다. “현장 감식 당시 처의 면 티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요” “그런 옷이 2개인데 왜 발견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바로 진술인이 거짓 진술하는 것 아닌가요. 그럼 그 옷이 어디 갔단 말인가요.”

사실 6월12일 현장 감식 당시 목욕탕에서 면 티 1벌을 발견한 바 있었다. 그래놓고는 왜 면 티가 없느냐고 계속 다그쳤다. 남자가 “불이 나서 탄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자 “화재 현장에는 완전히 타서 재가 된 옷은 없고 그 옷은 면 종류인데 어떻게 타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요”라고 몰아댔다.

남자가 6월11일 저녁과 12일 아침에 무얼 먹었는지, 처가 아침에 샤워를 했는지, 샤워 후 무슨 옷을 입고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조사해서 남자에게 혼란을 주고는 마치 범인이 횡설수설하는 양 진술조서의 모양새를 만들어 갔다.

제3 용의자 알리바이는 허술하게 수사
더 황당한 정황도 있었다.

제3자가 경비원 모르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건 제3자의 범행 가능성을 따지기 위한 중요한 변수였다.

당초 당일 아침 7시에 남자가 출근하는 걸 1층 김아무개 경비원이 보았다. 그런데 그와 교대한 조아무개 경비가 8시에 남자가 나가는 걸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경찰은 남자가 7시에 출근하는 척 나갔다가 경비 몰래 비상계단을 통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범행을 하고 8시에 나갔다는 방향으로 조사를 했다.

그래서 당초 김아무개 경비원으로부터 ‘쓰레기장 옆에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비상계단과 통로를 통해 708호에 갈 수 있습니다’라는 진술을 받아 두었다.

그런데 남자가 7시에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게 확실히 밝혀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처가 7시 전에 죽었고 이 아파트에는 1층 경비실에 들키지 않고는 제3자가 출입을 할 수가 없다면서 따라서 남편이 범인일 수밖에 없다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니 ‘우측 1층 끝부분에 비상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나 철제 방범망으로 막아 열쇠를 채워놓아 출입을 못 하도록 되어 있다’는 식으로 실황조사서를 당초와는 정반대로 꾸몄다.

남자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똑같은 비상계단을 놓고도 그리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가 불가능하다고 했다가 수사기관 편한 대로였다.

실제로 1심은 제3자가 경비 몰래는 들어갈 수 없는 걸 전제로 남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나는 항소심 재판부와 현장검증을 가서 담을 딛고 3층 비상계단으로 제3자가 얼마든지 출입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뿐 아니라 경비실 뒤편으로 장애인 보도가 있고 이쪽으로는 경비실 창문이 없어서 경비원 모르게 드나들 수 있었다. 실제로 나도 여러차례 경비원 모르게 현장을 드나들었다.

두 번의 고등법원과 최종 대법원도 이 점을 인정했다.

한편 범인이 둘일 수는 없으니 남편을 범인으로 찍은 이상, 당초 용의선상에 올랐던 제3자에 대해서는 내가 보기에 너무나도 허술한 알리바이 수사 끝에 면죄부를 주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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