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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남편이 아내 죽이는 ‘해피엔드’를 보니 가슴이…

등록 2012-09-28 13:43수정 2012-09-28 21:34

우유병과 부엌 싱크대의 스펀지 솔과 칫솔모. 검사와 1심은 “외할머니가 전날 우유병 3개를 주었는데 현장에서 2개는 전혀 쓰지 않은 새 병으로, 한개만 반쯤 우유가 들어 있는 채 발견되었으니 아이가 전날 밤 9시 우유 한 병을 먹은 상태에서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우유병을 자세히 보니 바닥에 우유가 말라붙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스펀지 솔과 칫솔모는 젊은 엄마가, 사용한 병을 직접 세척해 다시 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위쪽과 가운데). 경찰은 사건 발생 8개월 뒤인 1996년 2월에야 제3의 용의자 전영수(가명)가 자주 드나들던 여직원 아파트 앞 대로변 상가 슈퍼 주인의 사촌동생으로부터 그에게 맥주 2캔을 판 기억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 1심 법원에 냈다. 억지 알리바이였다.
우유병과 부엌 싱크대의 스펀지 솔과 칫솔모. 검사와 1심은 “외할머니가 전날 우유병 3개를 주었는데 현장에서 2개는 전혀 쓰지 않은 새 병으로, 한개만 반쯤 우유가 들어 있는 채 발견되었으니 아이가 전날 밤 9시 우유 한 병을 먹은 상태에서 죽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우유병을 자세히 보니 바닥에 우유가 말라붙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스펀지 솔과 칫솔모는 젊은 엄마가, 사용한 병을 직접 세척해 다시 쓰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위쪽과 가운데). 경찰은 사건 발생 8개월 뒤인 1996년 2월에야 제3의 용의자 전영수(가명)가 자주 드나들던 여직원 아파트 앞 대로변 상가 슈퍼 주인의 사촌동생으로부터 그에게 맥주 2캔을 판 기억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내 1심 법원에 냈다. 억지 알리바이였다.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1)…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3)
7시 출근 전 불을 냈다는데
연기가 처음 목격된 건 8시50분
겨우 장롱 한 칸을 태운 불이
두 시간 가까이 지속됐다고?
항소심은 불가능에 손을 들었다

남편이 처를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빠져나가며
어린 딸에게 우유를 먹이는
<해피엔드>의 마지막 장면
아, 또 이 사건 떠올릴 거 아닌가
실제로 우유병은 쟁점이었다

범인이 안방 장롱 안에 불을 지른 것은 변호인인 나에게 큰 선물을 준 셈이었다.

경찰, 검사, 그리고 1심 재판부는 장롱 화재를 남편이 범인인 근거라고 보았다.

‘피고인이 혐의 회피 방법 등을 고심하던 끝에 위 아파트에 서서히 타들어가는 방법으로 불을 놓아 수사에 혼선을 줄 목적으로 6월12일 07:00경 출근할 무렵에 밀폐된 위 아파트 장롱 중간 옷장에 있던 옷에 불을 붙이고 옷장을 약간만 열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런가. 검사 자신이 피고인 입장이었다면 무엇하러 불을 놓아 빨리 현장이 발견되게 하겠는가.

6월11일 밤, 제3용의자 전영수의 행적

처는 아침 출근하면서 9시경에 한살짜리 딸을 다른 동네에 사는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치과병원에는 9시30분쯤 도착했다. 처에게 사고가 생겨 출근을 못하면 어차피 9시 내지 9시30분쯤에는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만약 7시에 출근한 남편이 범행을 저질렀다면 가능한 한 늦게 발견될수록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불을 놓아 범행 현장이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되게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제3자가 범인이고 그가 혐의자 물망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처지였다면, 남편에게 혐의를 떠넘기기 위해 남편 출근시각에 가까이 현장이 빨리 발견되도록 불을 놓을 필연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최종 판결도 이러한 내 주장에 동의했다.

처는 1992년 치과병원을 차리면서 인테리어 공사를 해주었던 전영수(가명)와 몇 년 동안 돈거래를 해왔다. 전영수는 누나의 어음을 받아다가 남자의 처로부터 할인을 받아왔다. 전영수는 이렇게 빌린 돈이 5, 6천만원쯤 되는데 다 갚았다고 주장했다. 갚은 근거 자료는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돈을 꿔준 이는 죽어서 말이 없으니 다 갚았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사건 무렵 그는 부도가 난 상태였고 사건 3, 4일 전에는 병원으로 여러차례 전화를 걸었으나 남자의 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경찰 알리바이 조사 당시, 처음에는 사건 전날인 6월11일 밤 12시경 자신의 집에 갔다고 했다가 둔촌동 자신의 여직원 아파트에 가서 잤다고 번복했다. 그는 약혼녀가 있는데도 스물한살의 어린 여직원 혼자 있는 집을 밤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 아파트는 경비원이 밤에 여러차례 순시를 돌면서 외부 차량을 일지에 적었고 아침 9시가 넘으면 차창에 딱지도 붙였다. 그 전에는 전영수의 차가 일지에 몇 번이나 기재되어 있었지만 유독 6월11일 밤에는 기재가 없었다. 경비는 법정에서 만약 그날 밤 그 차가 있었다면 꼭 일지에 적혀 있었어야 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다음날 아침 9시에 그 집을 나와 약혼녀 집으로 갔다고 했지만 이 시간도 다른 증언들과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황당한 수사. 1심 재판에서 전영수의 알리바이가 문제가 될 듯하자 사건 후 무려 8개월이 지난 1996년 2월 검사는 경찰을 통해 그의 알리바이를 확인하도록 시켰다. 전영수는 6월11일 밤 여직원 아파트 앞 상가 슈퍼에서 맥주 2캔과 안주를 샀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그 슈퍼의 주인도 아니고 잠깐 가게 봐주러 왔었다는 사촌동생으로부터 6월 초순경 ‘손님들이 많아서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약 3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에게 맥주 2캔을 판 기억은 있’다는 진술을 받아 1심 법원에 냈다.

검사는 정말 이걸 전영수의 알리바이 증명이라고 믿었다는 건가. 그 슈퍼는 대로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슈퍼 주인도 아닌 사람이, 그 지역 주민도 아닌 전영수가 8개월 전에 맥주 산 것을 기억한다고?

그 사람도 그날이 딱 6월11일 밤이라고 특정하지는 못했고, ‘안경 쓴 사람은 맞고 이분(전영수)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봐주기식 수사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나는 내가 변호하고 있는 남자가 범인이 아닌 것만 밝히면 되는 것이고 굳이 제3자를 물고 들어가 혹 그 또한 억울한 상황에 빠뜨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변론서에는 그에 대한 의심을 제외했다. 지금도 그의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경찰과 검사가 남편 말고 다른 사람들의 범행 가능성에 대해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것만은 명백하다.

유치원 원장은 왜 30분 앞당겨 허위 회신했나
화재 발생을 처음 발견한 조아무개 경비원의 현장검증 모습. 남편이 범인이라면 굳이 불을 놓아 범행 현장이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되게 할 이유가 없었다.
화재 발생을 처음 발견한 조아무개 경비원의 현장검증 모습. 남편이 범인이라면 굳이 불을 놓아 범행 현장이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추정 사망시각과 추정 화재발생시각이 제대로 추정된 것인가.

이 정도 추정을 가지고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는 건가.

항소심에서는 이 두가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우선 화재가 언제 발생했는지가 집중심리되었다.

검사나 1심은 아침 8시20분쯤 아파트 조아무개 경비원이 7층에서 하얀 연기가 나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는 진술을 토대로 남자가 7시에 출근하면서 장롱에 지연 화재를 시도한 거라고 판단했다.

불은 안방 장롱 여러 칸 중에서 긴 옷들이 걸린 한 칸에서 나서 위를 뚫고 올라가 방 천장을 좀 태우고 꺼졌다. 옆 칸은 멀쩡했고 불이 난 칸의 옷도 일부만 탔다. 나는 이 정도 불이라면 발화 후 불과 몇 분 안에 끝난 걸로 보았다. 남자가 출근하면서 7시 전에 낸 불이 어떻게 8시20분 넘어까지 지속될 수 있는가. 장롱 문을 조금만 열어두면 1시간 반 이상 지연될 수도 있다고? 어디 한번 그렇게 해 보라지.

남자는 절대 범인이 아니다. 정말로 화재는 범인이 준 선물이었다.

경찰은 국과수에 ‘현장 상황으로 보아 7시 이전에 발화되어도 8시20분에 연기 등이 발견될 수 있는가’ 물었다. 이것도 짜맞추기식 수사의 전형이었다. ‘현장 상황으로 보아 몇시에 발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는가’ 이렇게 물었어야 했다. 더 나아가 검사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을 해서 남자의 유죄를 얻어내려면 7시 이후에는 발화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과학적 기법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장 상황을 근거로 남편 출근 전인 6시55분에 불인 난 건지, 출근 후인 7시5분에 불이 난 건지, 10분 차이를 어찌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이걸로 유무죄를 가리겠다는 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방서 화재신고 시각을 살펴보니 9시24분27초였다. 나는 조 경비원의 8시20분이란 진술도 경찰이 앞으로 당겨서 나온 진술이란 의심이 들었다. 최초 연기를 보고 1시간 뒤에 신고했다고?

사건 현장 옆집 707호 아주머니는 8시 반 남편 출근 때도 연기를 못 보았고 8시50분 출발하는 아들 유치원 버스 태우러 갈 때도 못 보았고, 아들 태워주고 와보니 9시5분경 연기가 보였다고 했다.

경비원은 8시20분경 연기를 보고 710호에 바퀴벌레 잡는 연막탄 피웠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710호 아주머니는 9시10분 출발하는 딸 유치원 버스 태우러 나가다가 경비 인터폰을 받았다 했다. 그렇다면 8시20분이 아니라 8시50분경에 경비가 최초 연기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오창래 국장을 유치원 원장에게 보냈다. 원장으로부터 6월12일 당일 버스는 9시10분 출발이라는 확인을 받고 녹음도 해 왔다. 그리고 법원을 통해 사실조회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8시40분 출발이라고 답변이 왔다. 그렇다면 조 경비의 8시20분 연기 발견 진술이 엇비슷하게 맞는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원장 확인과 녹음을 해둔 것이지… 나는 이 회신이 잘못된 것이라며 9시10분 출발이라는 확인서와 녹취록을 법원에 냈다. 그리고 원장을 증인으로 부르자 실수로 8시50분이라 잘못 답변을 보낸 거고 9시10분 출발이 맞다며 정정을 했다. 원장은 미리 우리가 확인까지 해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시간을 30분이나 당겨 법원에 회신을 보낸 걸까. 경찰은 자신들이 여기에 간여한 바가 전혀 없다는 서면을 법원에 냈다.

그러고는 인권단체가 왜 몰래 녹음을 하느냐며 트집을 잡았다. 무슨 사생활을 몰래 녹음한 것도 아니고 확인서까지 써준 공적인 사실을 녹음한 걸 가지고. 30분 차이로 살인범이 될 수도, 지옥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아니던가.

나는 지금도 그 회신이 왜 그렇게 왔는지 의혹을 가지고 있다.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하다
영화 <해피엔드>의 포스터.
영화 <해피엔드>의 포스터.

어찌됐든 최초 화재발견시각은 8시50분 무렵임이 분명해졌다.

국과수는 조 경비가 안방 문을 연 시각 2시간 내지 2시간30분 전에 불이 났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보내왔다. 당시 안방문의 온도, 발화물질의 양, 문·창문의 틈새 정도를 입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 세가지는 모두 추정치였다. 정확한 수치를 누가 알겠는가. 추정치를 토대로 추정을 했다.

담당자는 법정에서 “아침 7시 이전일 가능성도 있다고 답변한 것은 질문이 7시 이전도 가능하냐고 물었기 때문이고 그런 질문이 없었다면 발화시간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증언했다.

7시 전에 낸 불이 겨우 장롱 한 칸의 옷 일부와 천장을 태우고 꺼졌는데 8시50분에야 발견된다는 건 전혀 타당성이 없었다. 최초 항소심도 ‘오히려 피고인이 집에서 나간 후 화재가 발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재판이 첫번째 대법원에 가 있을 때 나는 영화계에 있다는 어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 사건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거였다. 첫마디에 거절했다. 피고인 입장에서나 죽은 처의 친정 식구들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한참 뒤 <해피엔드>라는 영화가 나왔다.

그 영화는 남편이 처를 죽이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빠져나가면서 마지막에 아파트 거실에 누워 어린 딸에게 우유를 먹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나는 정말로 가슴이 탁 막혔다. 어렵게 어렵게 1심을 뒤집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 시점에 저런 영화가 왜 나오는 것인가. 저걸 보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사건을 또 떠올릴 거 아닌가. 대법관들이 영향 받는 거 아니야?

실제로 이 사건에서도 우유병이 쟁점이 되었다. 남자가 군에 가 있는 동안 어린 딸을 장모가 1년간 키웠는데 우유 2병을 밤 9시, 12시, 새벽 3시, 6시 네 번에 걸쳐 반 병씩 나누어 먹였다 했다. 검사와 1심은 외할머니가 전날 우유병 3개를 주었는데 현장에선 2개는 전혀 쓰지 않은 새 병으로, 한 개만 반쯤 우유가 들어 있는 채 발견되었으니 아이가 전날 밤 9시 우유 반 병을 먹은 상태에서 죽은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처가 매일 밤에 그날 하루 사용한 수저와 그릇들을 식기세척기로 닦는데 현장에는 수저와 그릇들이 세척기 안에 들어 있었으니 6월12일 아침은 아무도 먹지 않은 거고 결국 밤사이에 죽은 거라고 했다.

나는 항소심 현장검증에서 이 두가지를 중점적으로 보았다.

만세! 사용하지 않았다는 우유병을 자세히 보니 바닥에 우유 말라붙은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부엌 싱크대에는 우유병을 세척하는 데 쓰는 스펀지 솔과 칫솔모 같은 솔 2개가 있었다. 갓난이 때 할머니는 밤새 네시간마다 반 병씩 규칙적으로 먹였을지 몰라도 의사 일 하는 젊은 엄마가 한 살이 된 아이에게 꼭 그렇게 먹인다는 보장은 없었다. 자다가 아이가 칭얼대면 깨서 먹이고, 병도 닦아서 쓰고. 안 쓴 병이 몇 개니 몇 시까지만 먹었다는 판단 역시 합리적 의심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런 걸 사형선고의 증거로 쓸 순 없었다.

식기세척기도 그랬다. <다음주에 계속>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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