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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적이냐 내 편이냐, 오로지 둘 중 하나다

등록 2012-10-19 19:13수정 2012-10-19 21:39

2003년 9월22일 36년 만에 부인 정정희씨, 두 아들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송두율 교수(오른쪽에서 둘째). 그를 기다린 건 국가정보원의 촘촘한 그물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3년 9월22일 36년 만에 부인 정정희씨, 두 아들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송두율 교수(오른쪽에서 둘째). 그를 기다린 건 국가정보원의 촘촘한 그물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2> 송두율 사건(1)
2003년 9월 송 교수가 돌아오자
애초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던
국정원의 태도가 돌변했다
변호사 입회 약속도 저버렸다

며칠뒤 수사책임자의 전화
“송 교수가 노동당원인 걸 아세요?”
아니, 어쩌자고 그 얘기를
나도 아닌 국정원에 털어놓았나…
어쨌든 이 ‘순진한 자백’으로
온나라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염라대왕의 심판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나쁜 짓과 착한 일을 가르는 공정한 기준을 찾는 게 도무지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어진 이 세상만사를 어떻게 선과 악, 둘로 쫙 가를 수 있을 건가. 천당과 지옥 딱 두가지가 아니고, 이 세상사람 숫자만큼의 다양한 장소가 있어야 그곳에서 각 사람에게 맞는 상과 벌을 내릴 수 있겠다.

법도 그렇다. ‘사기’나 ‘대가’처럼 법조문에 나오는 단어 하나로 복잡한 사건의 실상을 ‘그에 해당된다, 혹은 아니다’라고 흑백을 가리는 건 차마 못할 일이다. 어느 정도면 남을 속일 마음이 있다고 보고 사기죄로 처벌할 건가. 곽노현 교육감이 상대방이 후보 사퇴한 대가로 돈을 준 건지, 경제 형편이 어렵게 된 걸 딱하게 여겨 준 건지, 마음속에 대가 생각이 몇 퍼센트 들어 있으면 처벌해야 하는 건지. 판검사는 물론 아마 곽 교수 자신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울 게다.

벼락치기 독일행, 송 교수를 데려오다
송두율 교수는 이걸 이렇게 표현했다. ‘이분법은 파울리가 말한 대로 악마적 속성을 지닌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오로지 혼란뿐이다. 신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배제인가 통합인가. 정(正)인가 반(反)인가. 우리는 더이상 예와 아니오라는 대답만으로 본질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대답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나 국가보안법은 이런 시작도 끝도 없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세계를 인정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이냐 내 편이냐. 오로지 둘 중 하나다. 남과 북에서 대접만 받아오다 보니 송 교수 자신도 이 가혹한 세상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걸 헤쳐 나갈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송 교수를 베를린에서 이 무지막지한 서울로 데려온 건 결과론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나는 그 대가를 확실하게 치렀다.

2003년 9월20일 아침. 나는 베를린 가는 비행기에 헐레벌떡 몸을 실었다. 불과 몇 시간 전 새벽까지 퍼마신 술이 전혀 깨지 않은 채였다. 검푸른 가을 하늘, 하얀 구름 위를 날고 있는 비행기 창문을 열 수도 없고, 술 냄새는 앞뒤좌우로 풀풀 퍼져가고. 그래도 주변 생각한 거 보니 정신은 좀 있었던 게지. 옆자리에는 서강대 박호성 교수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간밤 인사동인가 어딘가 소주집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나병식 상임이사를 만났다. ‘독일의 송두율 교수가 들어오면 국정원 조사를 받아야 하니 변호인으로 도와 달라.’ 이야기 도중 전화가 왔다. 송 교수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일 베를린 가서 송 교수를 만나 법적 검토를 해보고 서울로 동행해 오기로 결정되었다. 벼락치기 베를린행.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기념사업회는 친북인사로 찍힌 교민들을 매년 국내로 초청했다. 대개는 그냥 들어올 수 있었지만 송 교수는 최소한의 형식적 조사는 받아야 한다는 게 국정원의 입장이었다.

일부에서는 ‘국정원 조사는 무슨 조사냐, 그러려면 차라리 안 들어오는 게 낫다’며 반대를 했다. 기념사업회는 그래도 설마 노무현 정권 아래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현실을 낙관했다.

당시 국정원장은 민변에 들어 있는 고영구 변호사였고, 서동만 교수가 기조실장으로 있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국정원의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실권은 여전히 중정, 안기부를 거쳐 맥맥이 이어오는 세력들에게 있었다.

귀국 다음날 아침 국정원에 출두하는 송두율 교수. 변호를 맡은 필자의 얼굴이 그 뒤로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귀국 다음날 아침 국정원에 출두하는 송두율 교수. 변호를 맡은 필자의 얼굴이 그 뒤로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난 세월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를 마구 짓밟는 바람에 해외 교민들 중 상당수가 그 반작용으로 북에 눈길을 돌렸다. 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일본, 미국, 유럽의 교민들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남의 정보기관은 이런 교민들을 잠재적 간첩으로 보고 동향을 일일이 체크했다. 그 와중에 만들어진 여러 간첩단 사건들로 수많은 교민, 유학생들이 인생이 절단 나는 고초를 겪었다.

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때도 그랬을까. 긴 세월 지나고 우리 후손들은 지금의 이 남북 대립을 어찌 생각할까.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베를린에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술기운이 좀 가셨다. 송 교수 댁에서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학자로서 뛰어났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바로 독일로 유학을 가 불과 5년 만인 28살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38살의 나이에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했다. 본국인들도 마흔살이 훨씬 넘어서도 따기 어려운 이 자격을 가진 이는 전국에 500명뿐이고 동양인으론 처음이었다.

그때 논문 제목이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비교연구>. 세계적으로 한때를 풍미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아도르노와 하버마스 교수 밑에서 배웠다.

독일 대학에서 소련, 중국 그리고 쿠바나 북한 같은 후진국 사회주의를 가르쳤다.

자연스레 여러차례 북한을 오갔다. 다른 독일 교수들 같았으면 도대체 이게 무엇이 문제랴.

촘촘한 그물을 쳐놓고 기다린 국정원
스물셋 어린 나이에 김포공항을 떠날 때, 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했다. “부디 세계인이 되거라.”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법한 얘긴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 땅에서 난 그 누구도 분단의 굴레를 벗어나 세계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송 교수에게 북을 들고 나면서 학문적 활동 말고 무슨 문제 될 일은 없었는지 물었다. 전혀 없다고 했다. 다음날 서울로 출발했다.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다시 그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그는 무슨 꼬투리 잡힐 일이 있었다면 서울 갈 생각을 했겠느냐며 아무런 문제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공안기관의 맥맥이 전통을 이어온 국정원은 촘촘한 그물을 쳐놓은 채 송 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접근하자 송 교수는 창문 저 아래 펼쳐지는 산천을 열심히 내려다보았다. 약관 스물셋에 이 땅을 떠나 아버지 말씀대로 ‘세계인’이 되어 36년 만에 돌아오는 그 감격의 순간. 비행기 사무장이 다가오더니 맨 마지막에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비행기 문 바로 앞에 국정원 수사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포영장을 받아왔지만 변호인이 자진출두를 보장해 주면 집행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마라고 했다. 이어 독일 영사가 다가왔다. 송 교수와 그 가족들은 독일 국적이었다. 영사는 국정원 조사 때 변호사가 입회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국정원의 확인을 받았다는 거였다. “잘되었군요.”

출국장으로 나오니 정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수많은 카메라와 사람들…. 취재 기자들과 환영인파가 뒤엉켜 송 교수나 그 처, 아들 둘은 정신을 못 차렸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이 돌아왔다. 송 교수 가족은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송 교수와 나는 아침 일찍 국정원에 갔다. 그런데 그때부터 국정원의 태도가 돌변했다. 변호사 입회는 안되고 접견만 가능하다는 거였다. 이게 어찌된 영문이지. 애초 그저 형식적인 조사만 하고 넘어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독일 영사와 기념사업회 나병식 이사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두 사람은 각자 독일과 한국 정부에 상황을 알렸다. 독일대사는 국정원이 왜 두 나라 사이의 약속을 안 지키는 거냐며 한국 정부에 항의를 했다. 오후 2시에 송 교수를 접견하고 나와 대기실에 있는데 5시쯤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지금 변호인 입회를 하고 계신 거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입회라니요. 아닌데요.” 그는 크게 화를 내며 경위를 조사해서 알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직감을 했다. 이 상황이 보통이 아니로구나. 청와대나 국정원 상부는 송 교수를 화해와 관용의 차원에서 원만하게 한국에 안착시키려 하는데 실무 수사책임자들은 송 교수를 엮어 넣으려 하는구나. 송 교수는 그저 머리 좋은 골샌님이라 이런 험한 힘겨루기 판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더구나 그는 수십년 동안 이 나라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도 쉽지 않아서 돌아가는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되는 터였다.

국정원 앞에서는 변호사들도 주눅이 드는 판에 송 교수는 딱 걸린 먹잇감이었다. 수사 실무자들은 독일과의 약속이나 정부 차원의 교민정책은 알 바 아니고 빨리 한 건 해내면 그다음에는 아무리 국정원장이고 대통령이고 어쩌랴는 계산인 걸로 보였다.

수사 실무진, 대통령과 국정원장을 가지고 놀다
아니나 다를까? 수사팀은 변호사 입회를 따돌리고 어리숙한 송 교수를 이리저리 찔러가면서 원장에게는 변호사 입회중이라고 허위보고를 하고 이를 믿은 원장은 독일 대사관과 청와대에 ‘오후 2시 현재 변호사 입회중’이라고 알렸다. 국정원장도 대통령도 허수아비. 김대중 정권 5년이 지났고 다시 노무현 정부가 남북화해의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아래 실무진에는 바뀐 정권의 철학과 신념이 전혀 녹아들지 못한 상태였다.

수사과장은 그날 밤은 송 교수가 국정원에서 자야 한다고 나에게 통보를 했다. 그리고 밤 10시쯤 다시 전화가 왔다. “송 교수 데리고 나가세요.” 왜 끝까지 변호사 입회를 안 시켰느냐고 묻자 “변호사님이 동의했다던데요, 아닙니까?” 하고 둘러대는 게 아닌가.

그 다음날과 다다음날도 국정원은 입회를 거부했다. 애초 입회를 안 시킨다고 화를 내던 독일 대사관과 청와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아마도 수사팀에서 양쪽에다가 송 교수 혐의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고하고 수사를 위해 변호사 입회는 안 된다는 식으로 양해를 얻은 게 아닌가 추측했다. 범죄 혐의를 잡았다는 데야 독일대사고 청와대고 어쩔 건가. 실무진이 윗선을 가지고 노는 걸로 보였다.

9월26일 그날은 조사가 없었다. 오랜만에 사무실에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있는데 국정원 수사책임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을 때 몇번 업무상 협조를 구해서 안면이 있었다.

“김 변호사님, 송 교수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던 걸 알고 계세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변호인이 의뢰인이 노동당원인 것도 모르세요?” “….”

아이고, 이거 야단났구나. 나는 송 교수를 만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아, 예. 1973년엔가 당시 ‘사회주의 비교’를 전공하던 제가 후진국 사회주의를 보러 북에 갔을 때 북에 들어오는 전제조건으로 입당원서에 서명하라고 해서 좀 고민하다가 써주었는데 통과의례라 여기고 그 뒤론 잊어버렸죠. 그게 그리 큰 문젭니까?”

“아니,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그것도 국정원에서 꺼내놓은 겁니까.” 나는 눈앞이 아득해 왔다. 이걸 어쩔 것이냐. 내가 독일에서 그렇게 물어볼 때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 미리 먼저 밝히고 들어오거나 무슨 대책을 세웠을 터인데. 변호인인 나에게는 얘기도 않고 떡하니 국정원에 가서 그 얘길 털어놓았다고?

아무리 이 나라를 40여년간 떠나서 독일 국적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그렇지. 얼굴은 독일 흰둥이가 아니고, 60년 세월 원수처럼 으르렁대고 있는 분단국 노랭이 아니던가.

국정원이 입당원서를 가지고 윽박지른 것도 아니고, 구속되어 심리적 억압 상태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출퇴근하면서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그 얘길 왜 먼저 국정원에 꺼내놓았단 말인가. 사실 집권 여당의 김대중 대통령과 야당이던 박근혜 의원을 비롯해 경제, 언론, 종교계, 사회단체 사람들이 수도 없이 북엘 갔다왔고 조선노동당의 고위인사들이 수없이 남으로 왔다. 미리 밝혔더라면 별 문제가 될 일도 아니었다.

송 교수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이건 뒤집으면 그가 노동당원으로서 정체성이 전혀 없었다는 걸 잘 보여주는 거였다. 자신이 노동당원으로서, 무슨 켕기는 일을 했다면 변호인인 나에게도 아니고 자신을 잡아먹으려 드는 국정원에 자발적으로 먼저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이 ‘순진한 자백’으로 온 나라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송 교수와 나의 앞길은 그만 깜깜해졌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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