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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장의위원 서열이 정치국 후보위원 서열이라고?

등록 2012-10-26 19:24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2> 송두율 사건(2)
사라진 북한 서기관 김경필,
범민련에서 전향한 전직 교수
둘의 친분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국정원은 그 교수를 통해
‘김경필 파일’을 얻어냈다
그리고 작전을 시작했다

‘장의위원 명단 23번째였으니
자동으로 정치국 후보위원’
이것만 갖고 국정원은 송 교수가
자백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송 교수는 자백한 적이 없었다

‘이미 서로 다른 상(相)이거늘 어찌 합쳐진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이렇게 설한다. 세상만물이 저 스스로 독립하여 절대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 실체란 건 없고 서로서로 기대어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게 연기(緣起)의 법이다.

자성이나 실체가 있다면 이 세상은 그 어떠한 변화도 없을 거고, 서로 합치는 일도 불가능하다.

송두율 교수는 통일문제를 이야기할 때 ‘연기’라는 개념이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는 ‘승공통일’이나 ‘적화통일’ 모두 연기나 상생의 이치를 저버린 거라 여겼다. 1991년 한길사에서 낸 <전환기의 세계와 민족지성>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와 다른 것이나 나에게 흡수되지 않은 것에 대한 관용은 ‘다자의 폭력없는 통일’의 가능성을 믿고, 변하지 않는 실체에 매달리지 않고, 모든 사물 사이의 관계와 과정을 중시하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첩보전을 방불케 했던 사건의 시작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세상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다.

2003년 10월 이 땅의 공안기관들이, 보수세력들이, 아니 온 나라가 드러내 보인 이 어리석음은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갔다.

당시 두 사람이 법정에서 각기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이들 중 누가 남한의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이었을까?

‘북한 사회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관료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이를 없애는 방법으로 합리적인 지배방식인 민주적 사회주의로 가는 방법도 있는데, 북한은 비일상적 카리스마 지배로 갔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역사발전은 인민대중이 끌어간다는 주체사상에 동의한다…주체사상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글을 썼고 앞으로도 쓸 용의가 있다.’

앞은 송 교수가 책에도 썼던 이야기이고, 뒤는 송 교수가 북의 스파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하러 나온 검사 쪽 증인의 법정진술이었다.

이 증인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 북한의 주체사상 이론을 대대적으로 전파하다 1997년 민혁당 사건으로 검거된 뒤 전향한 김영환과 똑같은 길을 걸은 운동권 동료였다. 그는 전향한 뒤 북한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국정원의 재정지원을 바란다는 소리도 했다. 나는 그가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은 여전히 옳다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데도 국정원이 잡아가지 않은 이유를 그때는 물론 지금도 도저히 모르겠다. 자기네 편이라서?

반면에 송 교수는 주체사상에 대해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이나 셸러의 철학적 인간학, 심지어는 독일 나치 집권 때의 우파민족주의 볼셰비즘 성향이 보인다고까지 평했다. 유물론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북한에 관념론이나 나치즘적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실제로 송 교수는 이 문제로 북의 주체사상 학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남쪽 공안기관들에 이런 건 전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공안기관들은 밥줄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화해와 관용의 시대에는 네 편 내 편 편가르기로 먹고사는 그들이 할 일이 없었다. 하긴 나를 비롯한 민변 소속 변호사들도 덩달아 공안기관 사람들과 비슷한 신세가 되었다. ‘개점휴업.’

국정원 공안부서 사람들에게 송두율 교수는 ‘구세주’인 셈이었다. 그들은 송 교수가 네 편 내 편 나누는 걸 거부하고 북에 들락날락하는 걸 오래전부터 주시해왔다.

송 교수 사건은 전향자의 간첩 고발에서 비롯되어 전향자들이 간첩으로 몰아간 사건이었다. 시작은 무슨 첩보영화 같다.

1999년 1월 북한의 베를린 주재 이익대표부 서기관 김경필이 처와 함께 사라졌다. 그는 독일을 비롯해 유럽에 거주하는 남쪽 출신 반체제 인사들을 접촉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북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김경필이 안기부(국정원) 끄나풀의 함정에 빠져 비밀요원들에게 납치된 거라고 비난했다.

최종수(가명)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부산 어느 대학에서 교수를 하면서 본인 말로는 대학과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1992년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한다. 그 후 1993년 미국과 독일을 오가며 객원 연구원으로 있다가 1994년부터 베를린에 있는 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하며 ‘조국은 하나’라는 소식지를 편집하는 일을 해왔다.

그는 1994년부터 북쪽의 김경필 참사를 알게 되어 엄청 친하게 지내왔다. 나중에는 컴퓨터까지 서로 바꾸어 쓸 정도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글을 써서 소식지에 싣기도 하고 북의 김경필에게도 주었다.

전향한 최종수, 국정원에 큰 선물을 내놓다
그러던 중 1998년 2월 범민련 유럽본부는 최종수가 조직을 분열시키고 성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제명을 했다. 나중에 송 교수 1심 재판 때 변호인들은 최종수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증인은 유럽본부의 실무진 청년들에게 ‘북으로부터 돈을 받아 큰 자동차를 사자, 최신 컴퓨터를 사자, 북에 몰래 다녀오자, 학습조를 꾸며 주체사상을 학습하자’고 한 적이 있나요?”

“제가 한 게 아니고 모 유학생이 한 것을 우리가 거절했는데요.”

“청년들이 거부감을 일으켜 증인의 제명을 주장하면서 범민련을 탈퇴하는 등 (청년들로 하여금 증인) 스스로를 (안기부 공작원으로) 의심받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요?”

“전혀 그런 거 없습니다.”

나는 또 이렇게 물었다. “미국, 독일에서 끼니 때우기도 어려웠다면서 5년 동안이나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남한 체제에 불만이 생기면서 독일 범민련에 가면 숙식이 해결되니까 이건 뭐 빨갱이고 나발이고 하다 보면 좋은 수가 있겠지 하고 간 것입니다.”

최종수는 1999년 10월 자수한다며 귀국하여 국정원에 여러 가지 자료들을 내놓았다. 범민련 회원들 가입서 등등.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건 북의 김경필 참사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보고문서들이었다. 김경필은 최종수를 철석같이 믿고 이런 문서들 파일을 지우지도 않고 서로 컴퓨터를 바꾸어 사용하곤 했던 거였다.

거기엔 김경필이 교민들과 접촉한 사실이나 교민들의 동향을 상세히 평양에 보고하는 글들이 들어 있었다. 이게 최종수를 통해 국정원 손에 넘어갔으니 북의 입장에서 볼 때 김경필은 역적 중의 역적이었다. 북의 참사관 김경필은 처와 미국으로 망명했다.

첩보전에서 국정원이 승리한 거였다. 북의 참사관을 통해 본 유럽 교민들의 성향을 국정원이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남과 북,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개 관료들이란 윗선에 잘 보이려고 자신의 실적을 부풀리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사실이 많이 왜곡되곤 한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가 싫어서 그 반작용으로 북을 바라보게 된 교민들은 완전히 간첩으로 찍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 ‘김경필 파일’ 문서 속에 송 교수가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응로 화백이나 윤이상 선생이 그랬듯이 송 교수도 당연히 군사독재에 반대해왔고, 1996년 무렵에는 남북 학자들의 학술교류대회를 조율하러 북을 여러차례 드나들었던 관계로 김경필과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김경필은 북에 자신의 실적을 과장하는 보고를 해왔다. 자신이 북을 위해 송 교수를 잘 요리하고 있노라고.

2003년 9월 국정원 수사실무자들이 원장과 대통령의 해외교민들에 대한 화해와 관용 정책을 무너뜨릴 승부수로 송 교수를 점찍은 근거는 바로 김경필 파일의 이런 대목이었다.

1997년 4월 주체사상연구소장과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낸 황장엽이 남으로 왔다. 송 교수는 자신이 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아왔으므로 전향한 황장엽이 남쪽에 와서 송 교수를 어떻게 일러바쳤는지가 걱정되었다. 1998년 2월 송 교수는 김경필을 만나 이 이야기를 꺼냈다. 김경필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황이 (송 교수 자신이) 우리 당의 지도기관 성원이라고 하는 데 대하여 알고 있는가.’ 송 교수가 궁금해했다는 거였다.

당의 지도기관 성원?

마침 1994년 7월 북이 발표한 김일성 주석 장의식 명단에는 김철수라는 이름이 23번째로 올라 있었다. 국정원은 김경필 파일과 장의식 명단, 이 두가지를 근거로 만약 송 교수가 ‘김철수’라면 당의 지도기관 성원인 서열 23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몰기로 하고 송 교수가 들어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이건 정말 큰 건이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을 잡았다면 남북화해고 뭐고 우리 공안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아마 이리 생각하지 않았을까.

1991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에 앞서 원로학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송두율 교수. 송 교수는 북의 주체사상 학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이는 남쪽의 공안기관에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에 앞서 원로학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송두율 교수. 송 교수는 북의 주체사상 학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이는 남쪽의 공안기관에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수사 관계자들을 정말 많이 칭찬해 주었다”
2003년 9월26일 오후 청와대 관계자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저녁에 만난 송 교수는 펄쩍 뛰었다. “독일 국적의 학자에 불과한 내가 북한 권력 서열 20위 안팎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니요. 북의 정치가 무슨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일의 앞뒤는 이랬다. 송 교수는 1994년 7월 김 주석 장의식 때 김철수란 이름으로 초청을 받았다. 그리고 <로동신문> 장의식 참석자 명단에 23번째로 김철수 이름을 올렸다. 송 교수는 국정원에서 이 두가지 사실을 시인하면서 자신이 높이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이야기했다. 한편 송 교수는 나중에 자신의 책에서 북의 정치서열을 분석하면서 장의위원 명단을 일응의 기준으로 삼았다. 당 서열상 비서 앞까지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 표시했다. 공교롭게도 장의식 명단 비서 앞은 ‘김철수’였다. 송 교수가 자백을 한 꼴이 된 거였다.

의전의 필요에서 만든 장의위원 명단 서열을 바로 권력서열로 간주한 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국정원은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억지를 부렸고, 송 교수는 학문적 오류를 범한 거라는 게 나중에 법정에서 밝혀졌다.

송두율 = 장의위원 명단 23번째 김철수≠정치국 후보위원.

송 교수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거였다.

그런데 국정원은 ‘송두율 = 장의위원 명단 23번째 김철수’라는 것만 가지고 송 교수가 후보위원임을 자백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송 교수는 자신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한 적이 없다. 청와대는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이 보고를 덜컥 믿었다. 하긴 당시 수사를 잘 챙겨보아야 할 국정원 고위관계자조차 보도 않는 걸 전제로 기자들에게 자랑까지 했다. “송두율로부터 정치국 후보위원 자백을 얻어냈다. 국정원으로서는 일대 개가를 올린 것이다. 내가 수사 관계자들을 정말 많이 칭찬해 주었다.”

그는 국정원을 국민의 민주적 통제하에 두라고 노무현 정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민주화운동 출신이었는데도 거꾸로 자신이 실무선에 통제를 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수사 실무자들이 송 교수가 정말 북의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믿은 건 아니라고 확신한다. 만약 그들이 정말 그렇게 믿었다면 아주 무능한 거였다. 어쨌든 그들은 아주 유능하게 기회를 잘 잡았다. 그리고 ‘공안’의 존재감을 확실히 과시했다.

9월30일 국정원은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청와대나 국정원 상부는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라는 보고를 받고 엄청 난감했을 거다. 그들은 송 교수가 독일 사람이고 하니 과거를 반성한다는 조건으로 다시 본국으로 추방하는 차선책을 연구했다. 그래서 국정원 송치 의견에 ‘기소의견’과 함께 조건부 ‘공소보류 가능 검토’ 의견도 냈다. 실무선의 공안세력과 상층 민주화운동세력이 뒤엉킨 엉거주춤한 상황이 잠시 전개되었다.

균형은 다음날인 10월1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를 계기로 깨졌다.

한나라당 간사이던 정형근 의원이 귀신같이 기회를 낚아챘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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