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21일 오후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된 송두율 교수가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환영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송 교수 왼쪽이 필자.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22> 송두율 사건(4-마지막)
<22> 송두율 사건(4-마지막)
2003년 10월11일,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대략 네가지 방안이 나왔다. ⑴노동당 탈당 ⑵헌법 준수 ⑶독일국적 포기 ⑷처벌 감수.
노동당 탈당은 남북의 ‘경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헌법 준수’가 그날 밤새도록 가장 큰 논란거리였다.
이건 전향이라는 의견도 강력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겠으나, 우리 헌법은 송 교수 국적인 독일 기준에서 보아도 별로 흠잡을 데 없는 민주주의 헌법 아니냐. 노동당원 의구심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송 교수가 이 정도는 해주어야 앞으로 남쪽의 통일운동도 숨통을 틀 수 있다’는 의견이 더 많았다.
그리고 송 교수가 그간 제3자 입장에서 통일문제를 이야기해 왔는데,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받음으로써 직접 당사자가 되어 발언권을 얻자는 뜻에서 독일국적 포기와 처벌 감수 이야기가 나온 거였다. ‘통일을 훼방 놓는 악법을 몸을 던져 깨뜨리자.’
왜 정면돌파 못하고 전향시켰냐고?
나는 송 교수를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자세를 강조했다. “만에 하나 서울에 가서 체포되면 그건 송 선생님에게 고국이 드리는 꽃다발이라 여기세요.” 돌아보면 그때 말은 그리했지만 나나 송 교수나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순진한 바보들.
12일 일요일 새벽까지도 이 네가지 대안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홍형숙 감독의 다큐영화 <경계도시2>에는 당시 송 교수 방에서의 이 토론 장면이 들어 있다.
새벽 5시, 모임이 아무 결론 없이 깨지고 밤을 새운 우리 7~8명은 퀭한 눈으로 허탈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송 교수가 단독으로 그 네가지 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어려운 결정을 했다.
나중에 여러 기회를 통해,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우리 사회의 레드콤플렉스를 정면돌파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송 교수를 전향시킨 꼴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좀 도식적이고 그저 듣기 좋은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다.
노동당 탈당과 헌법 준수는 ‘경계인’에 부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수동적 선택이었다면, 독일국적 포기와 처벌 감수는 능동적·공세적 선택이었다.
‘보안법으로 처벌받음으로써 이 땅의 분단에 책임을 진다.’ 이게 송 교수가 그 안을 받아들인 핵심 이유였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송 교수를 설득했다.
검찰은 정치국 후보위원인 걸 인정하고 북의 내부정보를 자술하는 등 ‘참회 수준의 반성’이 있어야 전향이라 했다. 그리고 입국한 지 한달이 된 10월22일 송 교수를 구속까지 했다. 구속이란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있을 때 예외적으로 하는 건데, 아니 한달 동안 국정원·검찰에서 불구속으로 수사를 다 해놓고 이제 와서 구속이라니.
구속 상태에서 심리적 압박을 가해 전향시키기 위한 검찰의 꼼수였다.
더군다나 검찰은 20일 동안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하면서 변호인들 입회를 허용해 놓고는 정작 구속 이후에는 이마저 거부했다. 검찰은 변호인단 권기일 변호사가 입회 신청을 하자 노골적으로 속내를 드러내 보였다.
“송 교수가 개인적으로 턴(전향)할 생각도 내심 있는데 변호인이나 다른 사람들이 듣는 자리에서 진솔한 얘기를 못할 수도 있다. 송 교수와 일대일 면담 형식으로 대화를 하면서 진솔하게 이야기할 예정이다.”
그 뒤 10여차례 변호인 입회를 거부한 채 검사 신문을 했고 나중에 법원은 이 조사 결과는 위법하다며 증거에서 모두 배제해 버렸다.
송 교수는 우리 형사소송 절차에서 아주 중요한 기여를 했다. 변호인단은 변호인 입회를 거부한 것을 취소해 달라며 법원에 준항고를 했고,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모든 형사사건에서 피의자 신문 때 변호인들이 입회할 수 있게 되었다. 구속 수사를 받는 사람 처지에서 변호인이 옆에 있다는 건 엄청난 힘이 된다.
변호인들은 송 교수가 구속되자 엄청 걱정하기 시작했다. 10월24일 1차 변호인단 회의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려되는 것은 본인이 조사 과정에서 흔들리고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 변호인단은 매일 접견하면서 송 교수의 결의를 다지도록 촉구하고 위로하는 역할이 필요함.”
변호인들은 조를 짜서 접견하고 그 결과를 공유했다. 10월28일자 장경욱 변호사의 보고서. “전향 가능성 없음. 묵비권 이해도 높은 상태. 이 고생 하다 그냥 쫓겨날 수는 없다고 하심.”
사실 송 교수는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검사 말마따나 송 교수 자신이 처벌을 면하기 위해 전향해서 ‘북의 내부정보를 자술’할 수도 있었다.
송 교수의 독일국적 포기와
처벌 감수는 능동적 선택이었다
보안법으로 처벌받음으로써
분단에 책임을 진다는 게
그 안을 수용한 핵심 이유였다 2004년 7월 고등법원 판결은
송 교수의 완승이었다
나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다
나라가 망할 듯 떠들던 이들은
무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황장엽·오길남 등의 그 가련한 퍼레이드 나 살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로 어제의 친구를 다 분다. 황장엽, 최종수(가명), 오길남, 홍아무개가 줄줄이 송 교수 법정에 나와서 그랬다. ‘전향자들의 퍼레이드.’ 나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증언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 정말로 안쓰러웠다. 다들 남북 최고 명문 김일성대학이나 서울대를 나와 외국 박사학위까지 받은 지성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남북 대치의 최전선에서 정보기관의 관리를 받게 되었던고. 그들이 ‘우리 편이냐, 적이냐’ 식의 이분법적 전향을 한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더는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홍아무개를 제외하고는 신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증언을 했다. 오길남과 나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오길남은 1985년 독일에서 박사 받은 후 처자들 거느리고 북으로 이주했다가, 여의치 않자 1년 만에 처자식 버려두고 혼자 북을 탈출했다. 그러곤 윤이상 선생과 송 교수가 가족 송환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도 두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 “저 사람들이 나에게 월북 권유를 했다!” “증인은 1970년대 반독재활동을 할 때 남한 정부를 비판했지요?” “그렇습니다.” “1985년에는 이북으로 가서 북쪽 정권을 찬양했나요?” “거기 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럽니다.” “북에다 독일 사는 사람들 중에 안기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그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1986년 탈북을 해서는 북쪽을 비방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독일 교민들 중 누가 어떻게 친북활동을 했는지를 안기부에 세세히 이야기했다. 황, 최, 홍 모두가 대동소이했다. 남북 분단이 이 사람들의 한번밖에 없는 삶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거 송 교수와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송 교수 죽으라고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오길남은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송 교수)을 솔직하게 말해서 눈물 날 정도로 지금도 어제도 이런 걸 해야 하나 밤새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합니다.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해직교수라는 최종수는 이렇게 증언을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엄중한 자리에서 (송 교수님 재판에서) 증언을 서게 된 것을 인간적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피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먼저 바라겠습니다. 독일에서 한겨레출판사랑 책도 쓰고, 경계인으로 학자답게 활동하시면 좋았을 건데 왜 이렇게 들어오셔서 이렇게 엄동설한에 고생하시는지 참 인간적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최종수는 북한 김경필 참사와의 친분을 이용해 컴퓨터 파일을 빼내서, 참사 부부가 평양에 있는 자식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가게 만들었고, 그 파일을 안기부에 넘기고 자신의 친북활동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 대신 송 교수를 억지사촌 후보위원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엄동설한에 감옥에 있는 송 교수와 그의 처, 아들들에게 새해에 건강과 행운이 깃들라고 빌었다. 황장엽을 증인신문 하고는 비애를 느꼈다. 그래도 일국의 정신적 지주가 된 주체사상을 터닦았다는 그에게서 나는 그 사상의 당부를 떠나 노학자의 자존심과 기개, 냉철한 이성을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법정도 무서워서 비밀리에 판사실에서 판사와 변호사, 검사로 엄격히 제한한 가운데 증인신문을 했다. 거기서 내가 본 건 그저 자존심을 잃은 한 늙은이였다. 실망이었다. 저런 사람을 의지해 나라가 서다니. 황장엽은 “만일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 아니라면 김일성을 단독면담하고 수일 동안 일거수일투족이 신문방송에 보도되겠습니까” 하고 진술했다. 나는 황석영, 문익환, 서경원, 문명자, 최홍 같은 이들도 김 주석을 단독면담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자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것 다 옳다고 생각하라요. 나는 답변 안 할 테니까’란 소리도 했다. 최소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북에서 후보위원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그가, 더구나 주체사상을 기초한 자신도 후보위원이 못 된 터에 독일 국적의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라 강변하는 데는 묻는 나도 한숨이 나왔다. 나중에 고등법원은 황의 증언을 배척했다. 변호인은 왜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되었나 송 교수가 구속되기 전 나는 소설가 황석영 선생에게 여론의 뭇매와 공안기관의 수사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위로와 조언을 부탁했다. 수유리 숙소 앞 포장마차에서 송 교수, 황 선생과 셋이서 소주를 엄청 마셨다. 그리고 집에 가다가 발을 헛디뎌 발가락에 금이 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매일 신문·방송에 목발 짚고 등장했다. 아이고, 오나가나 그놈의 술…. 황 선생은 ‘송두율을 위한 변명’이란 글을 썼다. “그가 독일에서 차 한잔, 술 한잔 값에 호주머니에 넣은 손을 오랫동안 빼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을 보아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후보위원) 서열과 이 가난을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2004년 3월 1심 법원은 송 교수가 후보위원 맞고, 책과 글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했고, 북으로 잠입·탈출을 했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다만 남북 학술행사를 중개한 부분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2004년 7월 고등법원은 사건의 핵심이었던 후보위원 부분과 책과 글을 쓴 부분, 남북 학술행사 주선 부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잠입·탈출죄, 그리고 노동당 가입 사실을 숨기고 황장엽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소송사기죄 두 부분만을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 교수의 완승이었다. 이런 대형 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나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니 거짓말쟁이니 온통 나라가 망할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세력과 언론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 무죄판결에는 관심도 없었다. 고등법원은 정말 기대 밖으로 훌륭하게 송 교수 사건을 정리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탈이념의 시대, 그리고 국가 간의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일은 우리 민족이 이념을 초월하여 서로 공고히 단결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꿈이요, 생존을 위한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시의부적절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켜 남과 북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내부적인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선언하면서 피고인 개인에 대해서는 우리의 숭고한 자유정신과 동포애로써 포용하는 쪽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막고 국민적 역량을 결집시켜 미래지향적인 국가발전과 평화적 통일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모름지기 법은 사회통제 수단으로서의 본래적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여 사회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사회통합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도록 운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008년 4월 대법원은 송 교수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후 북한 방문 부분도 무죄라며 파기환송하였고, 고등법원은 2008년 7월 그대로 무죄 부분을 추가하고 일부 북한 방문 등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했다. 송 교수는 2004년 석방되어 이 땅을 떠났다. 처벌받음으로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여 이 땅에 남고자 했던 그의 발버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이 땅에 갚을 빚도 없고, 우리는 그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한겨레 인기기사>
■ “내곡동 사저 차명매입은 불법증여 위한 것”
■ 종묘공원 성매매 할머니 “폐지 주울 바엔 할아버지…”
■ 새누리 김태호 “국민이 ‘홍어X’인 줄 아나” 막말
■ 강북 아파트 팔아도 강남 전셋집 못 얻는다
■ 정여사 말대로 파스 바꿔줘…털이 너~무 뽑혀
■ “마야문명 흥망 배경에 기후변화 있었다”
■ <강남스타일>에서 절간 스님까지 커피 열풍
2004년 7월2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법원 앞에서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송 교수를 석방한 고등법원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처벌 감수는 능동적 선택이었다
보안법으로 처벌받음으로써
분단에 책임을 진다는 게
그 안을 수용한 핵심 이유였다 2004년 7월 고등법원 판결은
송 교수의 완승이었다
나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다
나라가 망할 듯 떠들던 이들은
무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황장엽·오길남 등의 그 가련한 퍼레이드 나 살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로 어제의 친구를 다 분다. 황장엽, 최종수(가명), 오길남, 홍아무개가 줄줄이 송 교수 법정에 나와서 그랬다. ‘전향자들의 퍼레이드.’ 나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증언에 분노하면서도 다른 한편 정말로 안쓰러웠다. 다들 남북 최고 명문 김일성대학이나 서울대를 나와 외국 박사학위까지 받은 지성들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남북 대치의 최전선에서 정보기관의 관리를 받게 되었던고. 그들이 ‘우리 편이냐, 적이냐’ 식의 이분법적 전향을 한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더는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해. 홍아무개를 제외하고는 신변 보호를 이유로 비공개 증언을 했다. 오길남과 나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갔다. 오길남은 1985년 독일에서 박사 받은 후 처자들 거느리고 북으로 이주했다가, 여의치 않자 1년 만에 처자식 버려두고 혼자 북을 탈출했다. 그러곤 윤이상 선생과 송 교수가 가족 송환에 협조하지 않는다며 지금까지도 두 사람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고 있다. “저 사람들이 나에게 월북 권유를 했다!” “증인은 1970년대 반독재활동을 할 때 남한 정부를 비판했지요?” “그렇습니다.” “1985년에는 이북으로 가서 북쪽 정권을 찬양했나요?” “거기 가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럽니다.” “북에다 독일 사는 사람들 중에 안기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해주었지요?” 그는 아니라고 부인했다. “1986년 탈북을 해서는 북쪽을 비방하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그는 독일 교민들 중 누가 어떻게 친북활동을 했는지를 안기부에 세세히 이야기했다. 황, 최, 홍 모두가 대동소이했다. 남북 분단이 이 사람들의 한번밖에 없는 삶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거 송 교수와 좋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법정에서는 송 교수 죽으라고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오길남은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송 교수)을 솔직하게 말해서 눈물 날 정도로 지금도 어제도 이런 걸 해야 하나 밤새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합니다.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해직교수라는 최종수는 이렇게 증언을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엄중한 자리에서 (송 교수님 재판에서) 증언을 서게 된 것을 인간적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피고인과 그 가족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먼저 바라겠습니다. 독일에서 한겨레출판사랑 책도 쓰고, 경계인으로 학자답게 활동하시면 좋았을 건데 왜 이렇게 들어오셔서 이렇게 엄동설한에 고생하시는지 참 인간적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최종수는 북한 김경필 참사와의 친분을 이용해 컴퓨터 파일을 빼내서, 참사 부부가 평양에 있는 자식들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가게 만들었고, 그 파일을 안기부에 넘기고 자신의 친북활동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 대신 송 교수를 억지사촌 후보위원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엄동설한에 감옥에 있는 송 교수와 그의 처, 아들들에게 새해에 건강과 행운이 깃들라고 빌었다. 황장엽을 증인신문 하고는 비애를 느꼈다. 그래도 일국의 정신적 지주가 된 주체사상을 터닦았다는 그에게서 나는 그 사상의 당부를 떠나 노학자의 자존심과 기개, 냉철한 이성을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법정도 무서워서 비밀리에 판사실에서 판사와 변호사, 검사로 엄격히 제한한 가운데 증인신문을 했다. 거기서 내가 본 건 그저 자존심을 잃은 한 늙은이였다. 실망이었다. 저런 사람을 의지해 나라가 서다니. 황장엽은 “만일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 아니라면 김일성을 단독면담하고 수일 동안 일거수일투족이 신문방송에 보도되겠습니까” 하고 진술했다. 나는 황석영, 문익환, 서경원, 문명자, 최홍 같은 이들도 김 주석을 단독면담한 사실을 아느냐고 묻자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것 다 옳다고 생각하라요. 나는 답변 안 할 테니까’란 소리도 했다. 최소한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북에서 후보위원이 얼마나 높은 자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그가, 더구나 주체사상을 기초한 자신도 후보위원이 못 된 터에 독일 국적의 송 교수가 후보위원이라 강변하는 데는 묻는 나도 한숨이 나왔다. 나중에 고등법원은 황의 증언을 배척했다. 변호인은 왜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되었나 송 교수가 구속되기 전 나는 소설가 황석영 선생에게 여론의 뭇매와 공안기관의 수사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위로와 조언을 부탁했다. 수유리 숙소 앞 포장마차에서 송 교수, 황 선생과 셋이서 소주를 엄청 마셨다. 그리고 집에 가다가 발을 헛디뎌 발가락에 금이 가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매일 신문·방송에 목발 짚고 등장했다. 아이고, 오나가나 그놈의 술…. 황 선생은 ‘송두율을 위한 변명’이란 글을 썼다. “그가 독일에서 차 한잔, 술 한잔 값에 호주머니에 넣은 손을 오랫동안 빼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을 보아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후보위원) 서열과 이 가난을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2004년 3월 1심 법원은 송 교수가 후보위원 맞고, 책과 글을 통해 그 역할을 수행했고, 북으로 잠입·탈출을 했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다. 다만 남북 학술행사를 중개한 부분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2004년 7월 고등법원은 사건의 핵심이었던 후보위원 부분과 책과 글을 쓴 부분, 남북 학술행사 주선 부분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잠입·탈출죄, 그리고 노동당 가입 사실을 숨기고 황장엽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소송사기죄 두 부분만을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송 교수의 완승이었다. 이런 대형 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받은 나는 법정에서 만세를 불렀다. 해방 이후 최대 간첩이니 거짓말쟁이니 온통 나라가 망할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세력과 언론들은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 무죄판결에는 관심도 없었다. 고등법원은 정말 기대 밖으로 훌륭하게 송 교수 사건을 정리했다. “지금은 바야흐로 탈이념의 시대, 그리고 국가 간의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일한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통일은 우리 민족이 이념을 초월하여 서로 공고히 단결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꿈이요, 생존을 위한 역사적 사명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시의부적절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켜 남과 북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고 우리 사회의 내부적인 갈등을 초래하고 있는 현실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법적 책임을 선언하면서 피고인 개인에 대해서는 우리의 숭고한 자유정신과 동포애로써 포용하는 쪽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막고 국민적 역량을 결집시켜 미래지향적인 국가발전과 평화적 통일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모름지기 법은 사회통제 수단으로서의 본래적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조절하여 사회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사회통합의 수단으로서 기능하도록 운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2008년 4월 대법원은 송 교수가 독일 국적을 취득한 이후 북한 방문 부분도 무죄라며 파기환송하였고, 고등법원은 2008년 7월 그대로 무죄 부분을 추가하고 일부 북한 방문 등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했다. 송 교수는 2004년 석방되어 이 땅을 떠났다. 처벌받음으로 민족의 고통에 동참하여 이 땅에 남고자 했던 그의 발버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이 땅에 갚을 빚도 없고, 우리는 그를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 “내곡동 사저 차명매입은 불법증여 위한 것”
■ 종묘공원 성매매 할머니 “폐지 주울 바엔 할아버지…”
■ 새누리 김태호 “국민이 ‘홍어X’인 줄 아나” 막말
■ 강북 아파트 팔아도 강남 전셋집 못 얻는다
■ 정여사 말대로 파스 바꿔줘…털이 너~무 뽑혀
■ “마야문명 흥망 배경에 기후변화 있었다”
■ <강남스타일>에서 절간 스님까지 커피 열풍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