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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헌치 이놈 반성 덜 했구나, 보안사에 다시 데려가!”

등록 2012-11-16 19:27

이헌치씨가 1996년 광복절 특사로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나오며 부인 박정숙씨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왼쪽) 두 사람이 15년 뒤인 2011년 1월13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판결 무죄를 선고받고 울면서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헌치씨가 1996년 광복절 특사로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나오며 부인 박정숙씨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다.(왼쪽) 두 사람이 15년 뒤인 2011년 1월13일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판결 무죄를 선고받고 울면서 기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23> 재일동포 간첩사건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 나는 남들이 술 마시느라 없앤 시간, 바둑 두느라고 없앤 시간, 돈을 버느라고 없앤 시간, 모든 시간을 서영이와 이야기하느라고 보낸다.” 피천득 선생님은 그의 수필집 <인연>에서 이렇게 썼다. 아마 당신이 30대 후반, 딸 서영이가 중학생일 때쯤 쓴 글 같다.

내가 그 나이 때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느라, 감옥에 있는 ‘간첩들’ 찾아다니느라 중학생 딸애 얼굴 보기 힘들었던 터라 이 글을 읽고 휴, 한숨도 나오고, 한편으론 ‘아이고, 무슨 남자가 저리 좀스럽대? 어린 딸더러 존경한단 소리까지 하고…’ 뭐 이런 생각도 했더랬다. 내가 마초인가?

수필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해외에 있던 일년을 빼고는 유치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일 서영이를 데려다 주고 데리고 왔다. 어쩌다 늦게 데리러 가는 때는 서영이는 어두운 운동장에서 혼자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는, 재수하는 아들 녀석 데리러 일년 동안이나 거의 매일 밤 11시에 차 몰고 학원에 갔다. 이제는 시집간 딸이 집에 왔다 갈 때면 대문 앞에 서서 그 아이가 골목길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본다.

피 선생님 딸 서영이나 내 딸 지은이는 그래서 행복하다.

성오는 그러지 못했다.

<남영동 1985>에 나오는 바로 그 고문

‘이성오’란 이름은 그 아버지가 보안사 지하 조사실에서 엄청 두들겨 맞고 물속에 머리를 처박히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순간에 지었다. 그리고 애 엄마에게 전해달라고 그 무서운 저승사자 수사관들에게 넘겨준 거다.

아니, 성오도 엄마 뱃속에서 함께 붙들려 와 일주일을 조사실에 있다가 엄마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국군 수도통합병원에 급히 실려가서 겨우 세상 구경을 했다. 그 애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이미 ‘간첩’의 아들이었다.

며칠 뒤인 1981년 11월11일치 모든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이런 기사가 실렸다. “재일교포 2세 고정간첩 둘 검거. 불순 근로자, 학생 등 연결 국가전복기도”.

그나마 뱃속의 성오가 아니었다면 엄마도 아버지를 간첩이라고 신고하지 않은 죄로 저승사자들의 무서운 닦달과 징역살이를 피할 수 없었을 게다.

성오 아버지 이헌치는 그때 겨우 29살이었다. 우리말과 글에 서툴렀던 그는 보안사 조사실에서 20일 가까이 영장도 없이 갇혀 있으면서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다 자백을 했다. 일본 오사카 전기공업대학 4학년 때인 1974년 12월 북에 가서 밀봉교육을 받았고, 1977년 한국에 와 삼성전자 등에 근무하면서 국가기밀을 빼돌렸노라고.

그는 보안사에서 조사받으면서 쓴 일기와 진술서, 보안사 수사관이 직접 쓴 사건 조작 각본들을 용케도 빼돌려 수십년간 간수해 오다가 훗날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10월10일 0시경 퇴근하는 나를 아파트 앞에서 끌고 와선 보안사 지하 밀실로 데려갔다. 거기서 수갑을 채우고 발을 의자에 묶고 사정없이 계속 때렸다. 3, 4일간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때리니까 중간중간에 정신을 잃었고 그러면 바께쓰로 물을 퍼부었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얼굴을 처박는 물고문도 몇차례 있었다. 강한 불빛이 비쳐서 주변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지하 심문실에서 대소변을 본 기억이 없다. 공포감 때문에 생리적 욕구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글로 읽으면 너무 밋밋하다. 얼마 전 <남영동 1985>란 영화를 보았다. 2시간 내내 ‘장의사’라 불리던 이근안 경감이 김근태를 물고문, 전기고문 하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이헌치를 비롯해 이런 고문을 당했던 수많은 나의 의뢰인들이 김근태의 얼굴에 겹쳐 떠올랐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옆자리의 처도 연신 훌쩍였다.

이헌치는 이런 고문에도 잘 버텼다. 그러다가 일순 무너졌다. 연행 닷새 뒤인 10월15일 보안사 수사관들은 그를 군 병원에 데리고 가서 막 태어난 아들 얼굴을 보여주었다. “너, 딴소리 안 하면 2년 정도 고생하고 집에 갈 수 있어. 안 그러면 너도 네 처도 끝이야. 너 평양 갔다 왔지?”

“네.”

보안사는 잡아온 지 보름 가까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억지 자백 진술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헌치는 1974년 12월 평양에 가서 3천명 정도 들어가는 만수대 예술극장 공연을 보았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만수대 극장은 그 2년 뒤인 1976년에 지어졌다. 1974년 당시에는 700석 규모의 모란봉 극장밖에 없었다. 보안사가 1981년 수사 당시를 기준으로 일을 꾸미다 보니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있지도 않은 만수대 극장에서 무슨 공연을 보았다는 겐가. 영화 <남영동 1985>에도 똑같은 장면이 나온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북은 남파간첩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남파간첩이 잡히질 않자 새로운 루트를 개척했다. 이후 재일동포 간첩사건이 급증했다.

1993년께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에 이런 사건들이 밀려들었다. 이장형, 강희철, 신귀영 등 장기복역 중이던 일본 관련 간첩사건들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오창래는 정말 헌신적으로 이 일에 매달렸다. 전국 감옥과 일본, 그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20건가량 기초 조사를 했다. 그리고 1994년 11월 ‘천주교 조작간첩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헌치씨가 감옥에 있던 1990년, 아홉살이던 아들 성오군이 그린 <엄마! 아빠 언제 석방돼?>.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제2회 공연부터 포스터 그림으로 사용돼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올해 서른한살인 성오씨는 얼마 전 결혼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헌치씨가 감옥에 있던 1990년, 아홉살이던 아들 성오군이 그린 <엄마! 아빠 언제 석방돼?>.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제2회 공연부터 포스터 그림으로 사용돼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올해 서른한살인 성오씨는 얼마 전 결혼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북에서 밀봉교육 받고
한국에 와 국가기밀을 빼돌렸다”
엄마 뱃속에서 함께 끌려왔다가
군 병원에서 태어난 아들을 보고
그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자백했다 

평양에 갔다고 자백을 했지만
그 기간 그는 연구실에 있었다
만수대 극장에도 갔다 했지만
극장 지어지기 2년 전이었다
1심 사형, 2·3심에선 무기징역
똑같이 당한 재일동포가 100명

필적은 다른데 내용이 같은 두 개의 진술서

2005년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이장형, 강희철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법무법인 덕수의 최병모 변호사와 이정희, 김재영 변호사가 오랜 세월 고생을 한 끝에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신귀영 사건은 1995년께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 부산 회원인 문재인 변호사를 중심으로 3번의 재심 도전 끝에 무죄를 받았다. 국가기구인 과거사위원회가 나서서 진상을 밝힌 덕을 보았다.

천주교인권위원장이던 나도 여러차례 일본을 오갔다. 1995년 6월 신귀영, 이헌치 사건을 조사하러 갔다. 이헌치가 1974년 12월 평양에 갔다고 자백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 기간에 대학 연구실에서 졸업논문 준비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이걸 확인해 줄 수 있는 지도교수를 만나러 간 거였는데 허탕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오래전에 미리 약속을 해야 한단다. 신귀영 형만 겨우 만났던가 그랬다.

그때 오창래 국장과 도쿄 와이엠시에이호텔에 묵었는데 특파원 친구와 만나 술 한잔하고 돌아왔더니, 세상에, 호텔 문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게 아닌가. 새벽 1시쯤이었던 것 같다. 아니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셔터를 내리는 숙박업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호텔 현관에서 새벽까지 꼼짝없이 그 비를 다 맞았다.

이헌치는 고등학교 때까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친구 하나 없이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대학에 가면서 나카야마라는 일본 성을 버리고 이헌치라는 조선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지도교수는 처음 맞은 조선인 제자라서 그의 졸업논문 실험 시절을 정확히 기억했다. 그때가 이헌치가 ‘아직 지어지지도 않은 평양 만수대 극장에서 공연을 보았다는’ 1974년 12월10일 어간이라고. 그의 대학 동기 7, 8명도 그때 헌치가 같이 학교에 나와 있었다고 증언했다.

결정적인 증거 또 하나. 이헌치는 자신을 북에 보내고 지령도 내렸다는 공작원을 대학 선배인 나카야마 도시오로부터 소개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런데 대학에 문의를 해 보니 학적명부에 그런 사람은 아예 없었다.

이헌치는 보안사에서 써 준 진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꼈다. 나중에 재심에서 나는 필적이 전혀 다른, 똑같은 내용의 진술서 두개를 법원에 제출했다.

그는 보안사에 잡혀온 지 한달이 넘어 검사에게 송치되었다. 검사 앞에 간 그는 북에 간 적도, 간첩을 한 적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야, 이놈 반성 덜 했구나. 다시 데려가!” 나중에 한나라당 의원이 된 정형근 검사였다.

보안사에 다시 끌려와 이런 소릴 들었다. “너 북에 간 거 부인하면 네 처도 실형선고받고 너는 영원히 가족 못 본다. 인정하면 2, 3년 안에 가족 품에 돌아갈 수 있다.”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첫날 재판에서 다 인정하고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그날 이헌치의 제일 맏형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렇게 증언했다. “저를 포함한 가족들은 피고인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가족의 정을 끊을 각오로 있습니다. 피고인의 처벌은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이므로 처와 자식에 대해 최소한의 보조는 할 생각입니다.”

아아, 이게 형이 할 소린가. 나중에 둘째 형으로부터 들은 말에 따르면, 맏형은 일본 야쿠자들로 구성된 한 반공단체의 이사였고, 조직에서 그렇게 해야 동생이 살 수 있다고 시켜서 그랬다는 거였다. 이 일로 맏형과 다른 동생들은 연락을 끊고 지냈다.

둘째 형은 헌치를 살리려고 형제들 돈 모아 우익 민단 지부장, 보안사 사람들 만나서 밥 사주고 술 사주느라 수백만엔을 썼다 했다.

수사관·검사·판사들에게 끝까지 책임 물을 것

그런데 웬걸, 두번째 재판 날 판사들은 이헌치에게 날벼락을 내렸다. “사형.”

사형이라니? 도대체 어떤 간첩행위를 하였기에?

“부평공단은 물가가 비싸서 국민 불만이 많다. 박 대통령의 남북대화 제의는 국민의 환영을 못 받고 있다. 예비군은 직장중대와 일반중대로 편성되어 있다. 삼성 직원 수는 1만3000명이다. 연 수출은 300억원이다. 삼성전자 기구조직표. 구두닦이는 배우지 못하여 성장하면 깡패가 된다.” 기구조직표는 보안사가 삼성전자 기술과장 대리인 이헌치 집에서 가져온 거였다.

그래도 그중 제일 군사기밀 비슷한 게 하나 있었다. “부평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들이 20~30미터 간격으로 트럭에 분승, 스몰라이트만 켜고 10분간 서울 방면으로 이동. 군 부대이동은 야간통행금지 시간 내에 한다.”

2010년 재심 때 나는 웃음을 참아가며 이헌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어마어마한 비밀을 어떻게 탐지했소?” “어느 날 밤 담배 피우려고 아파트 문 앞에 나갔더니 군인 트럭들이 그렇게 지나가데요.”

다시 1982년 항소심. 검사가 소개해준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무죄 주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했다. 평양을 갔다 왔고 간첩을 했다고 인정하고 다만 지하당 결성 같은 건 안 했다고 사정을 하는 게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헌치는 항소이유서를 그런 식으로 썼다. 대학 선배의 강권에 못 이겨 방북했노라고.

과거에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변호사가 피고인을 허위자백시켜 검사를 도와준다. 부인하면 당신은 더 죽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에서 같은 편 전문가라는 변호사가 이러니 어느 피고인이 그 말을 감히 거스르리. 지금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변호사는 항소, 상고하면서 핵심은 딱 몇 줄 썼다. 지하당 조직은 사실 오인이고, 피고인이 북한 공작원의 마수에 걸려들어 호기심에서 북한에 다녀온 것이니 선처하시앞.

이헌치는 고등,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처는 남편을 일러바치지 않은 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보안사 수사관들은 이헌치를 엮은 공로로 포상금을 무려 1400만원씩이나 받았다. 지금 돈으로 1억5000만원쯤 되려나. 훈포장도 받았다.

이헌치는 감옥에서 두차례 자살을 기도했고, 조폭들과 교도관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고, 살인범에게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그는 지금쯤 세계 굴지의 삼성전자 임원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1988년, 2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96년 광복절 특사로 15년 만에 풀려났다.

그 아들 성오는 태어난 지 15년 만에 아버지 품에 처음 안겼다. 그리고 그 가족들은 이 끔찍한 나라를 떠났다. 성오 아버지 이헌치는 철공소 공원으로, 어머니는 식당 허드렛일로 성오를 학교 보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는 전에 천주교인권위원회가 못다 한 숙제를 훌륭하게 마쳤다. 그 덕에 나는 재심을 맡아 두 내외는 얼마 전 무죄를 받았다. 이헌치처럼 당한 재일동포들이 100여명.

나는 이 사건 수사관, 검사, 판사들 모두에게 끝까지 그 책임을 물으려 한다.

그리고 참, ‘감옥’에서 태어난 성오는 얼마 전 장가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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