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을 떠난 심리학자 오수성 전 전남대 교수가 지난 4일 광주 북구 심리건강연구소에서 한 인터뷰에서 “생각 한번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주변에 따뜻한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게 시간과 지식을 보태겠다”고 말하고 있다.
광주/안관옥 기자
[한겨레가 만난 사람] 강단 떠난 오수성 전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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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인 오수성 전 전남대 교수가 지난달 16일 전남대 용지관에서 열린 마지막 강연에서 “우리의 정신이 황폐해지고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청소년의 정신을 개혁하는 운동을 광주에서부터 시작하자”는 고별사를 하고 있다. 전남대 심리학과 제공
다음해 터진 5·18이 인생 바꿔
분노·미안·무력감에 술독 빠져
얻은 건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 -정년을 맞이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가? “광주에서 35년을 살았다. 전에는 한강을 넘으면 ‘아! 고향에 왔구나’ 했는데, 이제는 장성터널을 지나야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갈수록 서울이 더 낯설어, 여기서 삶을 마감하려 한다.” -광주에 살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을 얻었다. 심리학자로서, 상담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다. 상대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이곳에 살지 않았다면 5·18의 아픔, 호남인의 좌절을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당사자의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감 능력이 생겼다. 대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을 보면서 욕망을 절제하게 됐다.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면 그랬을까? 한편으로 나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광주의 주류가 아니고 경계인으로 살아왔다. 경계인으로서 외로웠지만 똑같은 상황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었다. 훨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갖게 됐고, 개인적으로도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18대 대선 뒤 광주시민들의 상심이 큰 듯하다.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치유해야 하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경험한 뒤 이명박 정부가 하는 것을 보고 시민들의 박탈감이 컸다. 이 때문에 정권교체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뤄지지 않아 허탈감과 좌절감이 넓게 퍼졌다. 마음속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경우도 봤다. 그런데 불평만 하고 고통 속에서 살 수는 없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고통은 흘려보내고 마음의 상처로 남기지 말아야 한다.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도리어 새 정부가 좋은 정치를 하도록 견제하고, 패배의 상처를 극복하고 도약할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영화 <레 미제라블>에 많은 시민들이 푹 빠졌다. 이런 심리의 바닥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가? “대선 패배 뒤 실의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영화에서 봤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절묘하게 맞물려 치유(힐링) 효과가 있었을 것 같다. 영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5·18을 연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절한 패배였지만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며 용기를 내는 부분에 공감했다. 시민들도 비록 패배했지만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민중한테 혁명을 갈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용감한 자들은 열심히 싸우고 죽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문도 하지 않았을까?” -‘5월 증후군’을 발표한 1990년과 2013년 현재를 비교한다면, 광주의 집단심리가 많이 달라졌나? “광주 시민들한테도 80년 5월이 트라우마로 작용했을 것이다. 직접 참여했든 전해들었든 죄책감과 미안함이 마음 깊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5·18 배상이 이뤄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희석됐다고 본다. 5월 증후군은 광주 시민들만 느낀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느끼는 경우가 있었다. 독일에서도 봤다. 80년 이후의 ‘5월 운동’이 이 증후군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죄책감과 자책감이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또다른 힘의 원천이었다고 본다. 81~90년까지 피해자 150명 면담
5월이면 불안한 ‘5월 증후군’ 밝혀
2004년 다시 600여명 체계적 조사
25%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지속 일부에서 5·18이 외면받고, 정신계승이 미진한 부분도 있다. 5월 정신의 핵심인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이 훼손된 면도 있다. 하지만 광주만의 정신은 바닥에 깔려 있는 듯하다. 그것을 어떻게 살릴지 교육운동이나 정신개혁이 이뤄졌으면 한다.” -5·18 피해자 조사를 시작한 계기는? “5·18 직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1년쯤 허송했을 때 전남대병원 정신과에 환자 심리평가를 갔다. 한 환자가 심리검사에서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 ‘사람은 모두 계엄군으로 그리고, 세금은 낼 필요가 없다’고 부러지게 주장했다. 심층면접을 해보니 5·18 때 충장로에서 고교생을 때리는 계엄군을 말리려다 구타당한 피해자였다. ‘아! 광주에서 이렇게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구나. 이런 분들을 찾아보아야겠다.’ 이렇게 시작했다.” -연구의 성과는? “초기에는 사례를 찾기가 어려워 애를 먹었다. 폭도로 몰려 피해를 감추던 시절이었다. 81~90년 150명을 만났다. 피해자 대부분이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다. 정신분열증, 기질적 정신장애를 겪거나, 트라우마로 알코올 중독이나 우울증을 얻은 이들도 많았다. 전두환 정권 때 폭도로 몰려 외상이 훨씬 진전됐다. 사회적 지지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트라우마에는 중요하다. 지지해주면 회복도 빠르고 발병도 단축되는데, 5공 시절에는 피해 사실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어서 증세가 더 깊어졌다. 이 때문에 90년대 명예회복이 된 뒤에도 만성화해 깊고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폭행이나 전쟁의 피해자가 겪는 트라우마와 유사할 만큼 심각했다. 자연재해보다는 인간에 의한 폭력으로 남은 상처가 더 심한데, 5·18 피해자도 그랬다. 명예회복 뒤 5월 연구가 뜸해졌는데, 2004년 한해에 5·18 피해자 8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매우 아팠다. 다시 전체 피해자 4000여명의 10~15%를 각종 심리지표를 통해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25년이 지났어도 25%가량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치유클리닉을 만들 것을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서 폭도 내몰려
피해사실 못꺼내 증세 악화
인간을 극도로 망가뜨리는
국가폭력·고문자 뿌리뽑아야 -기억에 남을 만한 사례는? “조사를 했지, 치료를 하지 않아 변화를 추적하기는 쉽지 않았다. 5·18기념재단이 1박2일 치유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는데 참여자가 적었다. 그 가운데 정말로 힘든 상황을 겪은 이를 봤다. 5·18 당시 누이동생이 죽고 자기는 겨우 살아났다. 형편이 어려운데도 트럭을 몰며 장사해 다른 사람을 돕고 있더라. 이런 것이 5월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승화하는 행동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자기도 고통을 당했지만 이웃을 도와주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아름다운 과정이었다. 5·18 피해자들이 그렇게 치유됐으면 좋겠다.” -지난해 발족한 광주트라우마센터에 바람이 있다면? “뒤늦게나마 설립돼 기쁘다. 재단법인을 설립해 독립기관으로 운영했으면 한다. 그래야 전문가를 제대로 뽑고 예산을 적절하게 집행할 수 있다. 5·18 피해자는 가장 어린 사람도 50살에 가까워졌다. 트라우마센터는 5·18 피해자뿐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를 치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대만·타이·네팔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됐으면 한다.” -국가폭력을 막으려면 국가나 시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폭력이 인간을 얼마만큼 황폐하게 만드는지, 고문이 개인을 얼마만큼 망가뜨리는지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하다. 어떤 명분으로 했든 고문자들을 찾아내 처벌해야 한다. 고문경관 이근안에 대한 처벌이 미적지근하게 끝나는 바람에 교훈을 남기지 못했다. 국가가 반인륜적 범죄를 뿌리뽑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공익적 고발자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시민들은 감시하고 고발하고 다시 국가폭력이 일어나지 않게 연대망을 만들어 대응해야 한다.” 다문화·새터민 등 관심지대 확장
따뜻한 마음 갖게 하는 인성교육
우울증 극복 프로그램 개발 등
지식 기부로 5월 정신 이어갈 것 -10여년 전부터 다문화가정, 탈북새터민, 성매매여성, 도박중독자 등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다양한 집단이 있다. 소외받는 비주류 집단이라 정신장애를 겪어도 주목받지 못한다. 96~99년 아동보호시설에서 6~18살 아이들의 심리적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는 개인상담과 집단상담을 했다. 이때 심리학자가 해야 할 일이 뭐냐, 문제가 많다고 떠들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18 상처를 치유하는 일뿐 아니라, 사회의 관심과 손길이 필요한 곳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광주정신재활센터와 심리건강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재활센터는 정신과에서 퇴원한 환자를 돕는다. 우리 사회의 편견으로 사회적응에 어려움이 많다. 증상이 가라앉은 사람들을 사회로 복귀하도록 돕는 것이다. 무료여서 예산이 늘 빠듯하다. 센터를 유지하려고 심리건강연구소를 사단법인으로 세웠다. 연구소는 유료로 특정 집단의 정신건강을 연구하거나 심리평가·심리상담·심리치료 등을 한다.” -한때 광주전남 연어사랑 시민모임을 이끌었던데? “1998~2004년 섬진강에 어린 연어를 풀어 돌아오게 하는 모임에서 활동했다. 가장 신나게 했던 것 같다. 김원중·정용주씨 등 가수들이 와서 노래해주고, 아이들이 몰려들어 즐거워하고.… 그때가 내 인생의 정점이었던 듯하다. 연어사랑 모임은 내 삶에서 중요하다. 되돌아보면 맨날 투쟁적이었다. 90년대 후반 강릉 남대천에 갔다. 그 지역 생태연구가와 함께 현장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돌아와서 섬진강에 연어가 회귀했다는 기록을 확인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보자고 뛰어들었다. 평소 환경을 말하면서 골프 치러 다니는 환경운동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어를 보면서, 연어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즐거웠다. 어린 연어가 3~4년 뒤 100배쯤 커서 돌아오는 것을 맞이하면서 너무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전문성이 필요하다보니 행정이 개입하게 됐고, 방류 행사도 도지사가 참석하니까 평일로 잡더라. 이 바람에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갈 수 없게 됐고, 참여자들도 관심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돌아보면 말 그대로 신명나는 환경운동, 자발적인 생명운동이었다. 아직까지 아이들이 그렇게 많이 참여하고 기뻐하는 행사를 본 적이 없다.” -인생 이모작 계획은? “올해 전반기엔 대학원 강의를 하나 맡았다. 하반기엔 네팔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을 가려 한다. 매주 사흘은 연구소에서 도우려 한다.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중증 우울증이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지식을 기부하고 싶다. 심리학자가 해야 할 일은 곳곳에 널려 있다. 그런 일을 즐겁게 맡겠다. 사람들이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도록 인문교육을 하는 방안을 구상해보겠다. 5월 정신과도 연결되는 일이다.”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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