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여성학 강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한겨레, 1987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지음
정병훈 옮김, 한겨레, 1987
<한겨레>와 <중앙일보>가 “건강한 토론 문화와 청소년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기 위해 사설을 비교하는 ‘사설 속으로’를 읽었다. 이봉수 교수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전혀 한겨레답지 않은 기획”이라고 했지만(5월31일치 ‘시민편집인의 눈’) 나는 ‘한겨레다운 발상’이라고 본다.
그 기획을 환영하지 않는 논리 중에 “진보 신문의 정체성과 가치를 더욱 강화하라”는 입장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 의견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에 진보, 보수 신문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며 <중앙일보>가 아니라 다른 매체와 “균형을 잡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 기획에 대한 시비나 찬반 차원의 관심은 없다. 다만 균형, 논쟁, 비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방법에의 도전>(원제: Against Method)이 그리워졌다.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normal science)의 지위를 잃고 다른 과학으로 대체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고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그러므로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은 언제나 개종(改宗)의 역사이다. 과학 이론은 처음에는 자기 입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도그마(dogma, 독단)로부터 시작된다.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더 나아가 개종의 과정에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안한다. 그 방법은 이 책(<방법에의 도전>)의 부제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이다. 앎의 시도에 방법의 제한을 두지 말자는 것이다. <방법에의 도전>이 공부하려는 사람의 첫 필독서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339~343쪽)고 주장한다.
이는 독단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의 신화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은 현재의 법과 질서, 통념으로 구성되므로 이를 맹신하는 것은 과학 발전의 큰 걸림돌이다. 아나키즘은 어떤 방법도 “무엇이라도 좋다”(anything goes)는 완전한 개방성이다(22쪽).
이 책은 도그마를 지지한다. 도그마, 관점, 당파성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종합과 객관화를 위한 보충 노력은 무지의 결과다. 지성의 반대말은 절충, 균형, 원칙… 이런 사고들이다. 정론(正論)은 정론(定論)이 아니라 정론(政論)이다. 정론은 당위가 아니라 경합과 갈등으로 획득하는 가치다.
문제는 콘텐츠의 질이고 이것이 지식산업의 유일한 경쟁력이다. 진리는 그 콘텐츠가 관점(독단)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균형 패러다임에서는 관점의 의미와 효과를 알 수 없다. 인식은 자기 도그마가 무엇인지 아는 일이다. 자기 당파성도 모르고 상대방의 도그마도 모를 때, 균형감각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균형은 없다. 역사의 시작과 함께 저울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도그마는 한 개의 객관성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문은 각자의 도그마를 갖고 있다. 문제는 그 독단들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가이지 독단 자체는 죄가 없다. 정론지는 가능하지도 않지만 필요하지도 않다. 여러 독단들이 정당하게 논쟁할 수 있는 상태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지배 규범을 객관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자기 입장이 있는 집단은 편협하다고 낙인찍히기 쉽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에의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