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자녀 의혹은 올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당사자 가족과 혼외자녀 의심 학생 가족에겐 평생 상처로 남을 일입니다. 소설가 이외수씨의 혼외자녀 양육비 청구소송도 입길에 올랐습니다.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혼외자녀의 상황도 안타깝지만 부인과 아들의 상처를 생각하면 어떤 처신이 옳았을지 고민도 됩니다. 이런 일이 없는 게 가장 좋겠지만 이미 벌어졌다면 어떻게 하는 게 현명한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아? 아버지에 대한 원망, 분풀이 너한테 하게 될까 봐 화도 마음대로 못 내셨어. 널 키우면서 도 닦은 거나 마찬가지야. 엄만 처음부터 널 받아들이지 말아야 했어. 아빠하고 이혼했어야 했어.”
남편의 불륜에 분노한 누나가 혼외자녀인 남동생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자신을 미워하던 작은누나와 달리 늘 감싸줬던 큰누나의 폭언에 남동생도 무너진다. “날 동생으로 사랑한 게 아니었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란 존재가 누나들한테 고통 준 게 미안해서 그래.” 14일 방송된 문화방송 주말드라마 <사랑해서 남 주나>의 한 장면이 이준성(가명)씨에겐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
이씨는 세상의 기준으론 ‘성공한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해 서울 유명 대학을 나왔고, 사업도 성공해 돈도 많이 벌었다. 내조에 충실한 아내, 사랑스러운 세 아이와 건실한 가정도 꾸렸다. 사회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이 이씨도 뿌듯했다. 하지만 가끔 그 자신감이 도를 넘쳐 과시욕이나 오만함으로 변질하기도 했다. 사업하는 남자라면 나가서 돈도 좀 쓰고, 내키면 유흥을 즐기는 게 뭐가 대수냐는 생각이 그렇다.
돈 잘 벌어다 주면 최고의 남편, 아빠 아니냐는 건 이씨만의 생각이었다. 1주일에 2~3일씩 사업 접대를 핑계로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아내는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탈이라 넘기기엔 다른 여자의 흔적도 잦았다.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존재였다며? 그런 당신을 낳은 아버지가 싫었다며? 그런데 이러다가는 어디서 애 하나 만들어 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당신 아버지처럼 당신도 살고 싶어?”
이씨는 또 다른 세상의 기준으론 혼외자녀였다. 유부남인 아버지와 미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집에 왔지만, 출장이 잦아 그렇다는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아버지는 전국에 회사를 갖고 있었다.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풍족했다. 가끔 오는 아버지는 용돈을 쥐여주며 “공부 잘해라”, “엄마 말 잘 들어라” 정도의 말만 건넸을 뿐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안 건 고등학교 때였다. 친척 어른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어머니께 수차례 물었다. 어머니는 부정했지만 한번 금이 간 신뢰가 다시 쌓이지 않았다. 세상의 입장에서 인정될 수 없는 부도덕한 관계의 증거이자 결과물이 된 자신. 그것은 존재론적인 낙인이었고, 존재의 의미를 더듬던 사춘기 때 버티기 힘든 삶의 무게로 다가왔다. 의지로도 극복할 수 없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비난은 10대 소년을 죽음 앞까지 내몰았다.
죽지 않고 살았던 건 가정 상황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의 위로 덕분이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행여라도 누가 알아보고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극도의 공포심을 가졌던 이씨에게 비난 대신 다가온 따뜻한 말 한마디. 이씨는 ‘낳아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태어나게 해서 왜 나를 괴롭게 하나’라는 분노로 자신을 파괴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태생적인 콤플렉스를 벗어나는 길은 후천적인 노력뿐이었다. 학생 때는 ‘내가 공부를 이만큼 잘하는데’, 대학 졸업 뒤에는 ‘내가 돈을 이만큼 잘 버는데’라는 자부심 하나로 자괴감을 밀어냈다.
쳐다도 볼 수 없었던 큰어머니가 집안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못 본 체 넘어가 준 것도 자존감을 불어넣어 줬다. 평생 집에서 살림만 해온 큰어머니는 이씨의 존재를 알고서도 이혼하지 않았다. 이혼 뒤 혼자 살 것이 걱정됐을 것이다. 아버지의 경제력과 성공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것이었다. 혼외자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알겠나. 큰어머니는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무엇보다 큰집에는 아들이 없었다. 큰집 누나들과는 나이 차이도 꽤 났는데, 이씨가 장성할수록 누나들은 늙어갔다. 사위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바깥사람이다. 40대가 넘어가면서 가족 행사의 중심에는 이씨가 있었다. 다만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지면서 ‘유산’ 문제가 터져나왔다. 자주 만날 일도, 대놓고 비난한 적도 없는 큰집 가족들은 유일한 아들인 이씨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본 자녀가 있는데 혼외자녀한테 더 주는 게 말이 됩니까?” 매형들의 지적에 이씨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평생 혼외자녀라며 무시받았는데, 돈으로라도 보상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젠 어린애도 아니고, 내 가정도 꾸린 마당에 본가와의 관계는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그 열등감을 모두 극복했다 여겼다. 하지만 아내의 폭탄 발언은 새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굴레를 확인시켰다. 성공에 집착해 가족을 돌보지 못한 건 성공만이 혼외자녀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라 여긴 탓이었다. 돌고 돌아 다시 마주한 출생의 비밀이 그와 그의 가족의 삶까지 흔들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태어난 혼외자녀 수는 1만144명이다. 통계 수집이 시작된 1981년 이후 가장 많았다. 혼외자녀의 존재는 본 가정에는 큰 상처다. 반대로 자신이 원치도 않았는데 얻은 혼외자녀라는 낙인은 당사자에게는 평생의 불행이다. ‘접점’이 가능할까.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이 말했다. “당사자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오명과 결핍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성장을 할 수 없어요. 그렇다고 당사자 입장을 고려하면 본 가족을 엄청난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고요. 당사자는 태생보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게 중요하고, 부모로서는 진정한 사과가 필요할 겁니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몇 날이고 잠을 뒤척이게 한 가족과의 갈등, 가족 앞에서 차마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진짜 속마음, 남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가족의 비밀이 있다면 gajok@hani.co.kr로 보내주세요. ‘가족관계 증명서’는 독자들께서 보내준 글로 채워집니다. 미안하거나 고마운 마음에 가족에게 하고 싶은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다면 편지(원고지 6장 분량)로 써주세요. 채택된 사연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