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2) 황당한 담론들
멸치 하나 때문에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2) 황당한 담론들
멸치 하나 때문에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한국인 타령’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양상의 자기비하가 모여서 구성되는 하나의 복합적인 이야기 혹은 담론입니다. 앞의 글에서 저는 ‘한국인 타령’이 빈약한 객관적인 근거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이성적인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법칙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 마음의 법칙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지만 그에 앞서 담론이라는 것 자체가 갖는 몇 가지 속성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노동, 지식, 기술, 예술 등 인간이 가진, 혹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취급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떤 이야기나 담론 또한 일종의 상품이 됩니다. 다른 상품들과 다를 바 없이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고 그 가치 또한 시장의 수요 내지는 인기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런 상품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신문의 기사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기사의 목적은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목적과는 다르게 내용도 없이 독자들의 눈을 잡아끄는 것만이 목적인 기사도 허다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혀 차며
많은 이들이 막장드라마 봅니다
황당함과 약간의 경멸감 동반한
독특한 성질의 재미를 느낍니다
멸치 사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몇십년 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매우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은 늘 험했습니다
그 말대로 세상이 험해졌다면
지금쯤 대낮 거리 못 다닐텐데
선정적 제목으로 포장된 살인의 동기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06년 4월22일에 폭행치사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다수의 방송과 신문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중 한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찰서 수사과는 22일 ‘안주를 많이 먹는다’며 후배를 폭행해 숨지게 한, ○○에 사는 40대 A모씨에 대해 폭행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20일 오전 9시께 ○○군 ○○읍 모 사무실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마을 후배 B모씨가 자신이 얻어온 멸치 안주를 많이 먹는다며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다.” 이 기사의 제목은 “‘안주 많이 먹는다’ 후배 폭행해 숨지게 한 40대 영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렸는데, 맞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때린 사람은 체포되고, 경찰은 폭행의 동기를 물었습니다.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멸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화가 났다’였나 봅니다. 경찰은 이 진술을 폭행의 동기로 채택했고, 경찰서 출입 기자는 이 사건을 기사화했을 겁니다. 경찰과 기자에 의해, 멸치 때문에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엽기적인 담론이 생산되고 유통된 것입니다. 이 황당한 기사에 대한 인터넷 댓글은, 어이없다는 반응이 절대다수였습니다. 이 기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고 이 기사는 그저 하나의 가십거리가 되었을 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이없어한 것이 기사가 아니라 기사 속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댓글의 대부분은 ‘뭐 저런 사이코가 다 있냐?’는 식이었습니다.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으로 묘사된 이 사람은 이제 ‘사이코’가 되었습니다. 기사는 그렇게 소비되고 이 사건은 그렇게 정리되었습니다. 멸치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일 리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면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 그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를 비롯한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 기사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그걸 모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인터넷상에서 기사를 문제 삼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외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사의 형식을 빌렸더라도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 사실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이런 현상은,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다루어야 할) 신문의 기사마저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소설이나 영화 등 허구의 담론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소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구의 담론이 소비되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가지는 재미에 있습니다. 혹시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느냐는 생각이 드시면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전개에 혀를 차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봅니다. 막장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지만 판단을 유보하고 봅니다. 사실성에 대한 판단과 이야기의 흐름에 대한 생각을 유보하면 그때그때 자극적인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재미는 황당함과 약간의 경멸감을 동반한, 독특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은 인기는 얻을 수 있지만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냉소가 들어 있는 재미, 그것이 막장 드라마의 인기 비결입니다. 멸치 사건 같은 사회면 기사도 같은 재미를 줍니다. 막장 드라마처럼 이런 기사 안에는 막장 인물이 등장합니다. “명품 ‘된장녀’의 비극적 말로…빚 못 갚아 투신자살”, “美유학 살인범 공부만 하다 이런 일 생겼다”, “살인 부른 ‘게임 중독’…옆집 할머니 살해 700원 훔쳐”, “집단따돌림 스트레스 때문에 살인”. 이 모두가 실제 사회면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자살 혹은 살인의 동기가 선정적인 언어로 제목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동(소비에 대한) 조절 장애로 고통받았을 법한 한 여성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에 ‘된장녀’의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살인 사건들의 동기는 참으로 간단명료합니다. 이 기사들대로라면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렵다는 사람의 마음이 유서 한 장으로, 경찰의 조서 한 장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셈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허구성을 알지만, 이런 종류의 기사는 여전히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팔리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에 생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재미만 있으면 마음은 기꺼이 거짓을 눈감아 줍니다. ‘선풍기 담론’은 어떻게 살아남아 소비됐는가 누가 보더라도 헛소리라는 것이 명백한 담론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막장 드라마처럼, 허구라는 걸 알고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담론이 조금씩 복잡해지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인 예로 제가 앞글에서 지나가듯 언급했던 선풍기 담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선풍기 켜놓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저도 듣고 자랐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기도 해서 누군가 선풍기를 켜고 잠들어 있는 걸 보면 끄거나 방향을 돌리곤 했습니다. 유래가 불분명한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고유한 속설 내지는 미신으로 알려져 위키피디아에 선풍기 사망(Fan Death)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고 유튜브에는 풍자 동영상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해마다 여름이면 선풍기 사망 사고를 보도합니다. 2006년에는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선풍기가 위험하다는 내용의 공식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8월에는 다수의 언론이 선풍기 사망은 낭설일 뿐이라고 보도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8월12일에는 선풍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또 한 건의 기사가 여러 신문에 실렸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에는 나라 망신이라는 내용의 댓글도 눈에 띄지만 이 정도의 그릇된 믿음은 어느 나라에나 비일비재합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이 정도에 나라 망신 운운하는 것도 또 다른 자기비하입니다. 사실 선풍기 담론은 나름 그럴듯합니다. 질식, 저체온 등 사망의 원인에 대한 가설도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안 통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비웃는 외국인들이 전문가 의견을 참조하지 않고도 그렇게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선풍기 담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선풍기를 켜놓고 자다가 사망한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누군가 선풍기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그것이 설득력 있게 들려서 일종의 정설(?)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든, 한 번 만들어진 후에는 같은 상황에서의 죽음은 대략 선풍기 탓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타살이 의심되지 않는 한 사인을 밝힐 이유가 없으니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짓 담론이 생산되어서 유통되었고 우리는 그 담론을 소비했습니다. 그 결과는 온라인상에서의 국위선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선풍기 이야기처럼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거짓 판명을 받은 담론도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아직도 사실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가 복잡해지면 담론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무척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담론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인기입니다.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담론은 오래 지속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담론’입니다. 요즘 경기 안 좋고, 요즘 세상 험하고,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등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이 담론은 요즘이라는 단어의 효능에 힘입어 시대를 초월해서 늘 인기였습니다. 수십년 동안 한 번도 요즘 경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악의 불경기가 제 기억에는 너무 잦았습니다. 수십년 전에도 요즘 아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었고, 수십년 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늘 험했습니다. 그 이야기대로 점점 세상이 험해졌으면 지금쯤은 대낮에도 거리를 나다니지 못할 세상이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는 미화되고, 요즘은 항상 부정적 요즘 담론의 인기 비결은 자기애 혹은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나르시시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 다시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요즘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이야기와 잘 엮습니다. 반대로 과거는 항상 미화됩니다. 그래서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미화한 ‘그때를 아십니까?’가 장안의 화제였고, 살벌했던 80년대의 시위 현장마저 희화화해버린 <써니>를 필두로 ‘과거는 아름답다’고 외치는 영화들이 한동안 붐을 이루었습니다. 멸치 이야기는 어불성설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요즘 담론’과 엮이면 사정은 사뭇 달라집니다. 그 자체로는 말도 안 되는 멸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요즘 세상 험하다는 인기 담론의 증거로 채택되면 나름의 진실성을 획득합니다.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생산, 유통되는 이유이고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담론은 다른 여러 담론과 얽히고설키면서 더 큰 담론을 만들어냅니다. 멸치 담론은 요즘 담론과 엮이고, 요즘 담론에는 사회, 정치, 문화 영역의 다양한 담론들이 섞여 들어옵니다. 그중 무엇을 택해서 큰 담론을 엮어낼 것인지는 각자의 마음 생김새에 달렸습니다. 요즘 세상이 ‘보수 꼴통들’ 때문에 이 모양인지 ‘빨갱이들’ 때문에 이 모양인지는, 그러므로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인 타령’도 그렇게 여러 개의 작은 담론이 엮여서 만들어진 포괄적인 담론입니다. 이렇게 큰 이야기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음은 그 담론이 허구라는 것을 점점 잊어갑니다. ‘한국인 타령’ 정도의 덩어리가 되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느덧 담론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앞으로 저는 ‘한국인 타령’이라는 큰 담론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마음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자기비하는 이것 때문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멸치 이야기가 경찰 때문이라고, 또는 기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작가를 퇴출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수요가 존재하는 한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복잡한 현상에 대해서는 성급히 답을 내려 하지 말고 가능한 한 다양한 시각으로 그 현상을 바라보는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한국인 타령’도 그런 신중함과 참을성을 요구합니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담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담론이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혀 차며
많은 이들이 막장드라마 봅니다
황당함과 약간의 경멸감 동반한
독특한 성질의 재미를 느낍니다
멸치 사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몇십년 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르장머리가 매우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은 늘 험했습니다
그 말대로 세상이 험해졌다면
지금쯤 대낮 거리 못 다닐텐데
선정적 제목으로 포장된 살인의 동기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2006년 4월22일에 폭행치사 사건 하나가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다수의 방송과 신문에 의해 보도되었는데, 그중 한 기사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경찰서 수사과는 22일 ‘안주를 많이 먹는다’며 후배를 폭행해 숨지게 한, ○○에 사는 40대 A모씨에 대해 폭행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20일 오전 9시께 ○○군 ○○읍 모 사무실에서 같이 술을 마시던 마을 후배 B모씨가 자신이 얻어온 멸치 안주를 많이 먹는다며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다.” 이 기사의 제목은 “‘안주 많이 먹는다’ 후배 폭행해 숨지게 한 40대 영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때렸는데, 맞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때린 사람은 체포되고, 경찰은 폭행의 동기를 물었습니다.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모르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멸치를 너무 많이 먹어서, 화가 났다’였나 봅니다. 경찰은 이 진술을 폭행의 동기로 채택했고, 경찰서 출입 기자는 이 사건을 기사화했을 겁니다. 경찰과 기자에 의해, 멸치 때문에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엽기적인 담론이 생산되고 유통된 것입니다. 이 황당한 기사에 대한 인터넷 댓글은, 어이없다는 반응이 절대다수였습니다. 이 기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고 이 기사는 그저 하나의 가십거리가 되었을 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이없어한 것이 기사가 아니라 기사 속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댓글의 대부분은 ‘뭐 저런 사이코가 다 있냐?’는 식이었습니다.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으로 묘사된 이 사람은 이제 ‘사이코’가 되었습니다. 기사는 그렇게 소비되고 이 사건은 그렇게 정리되었습니다. 멸치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일 리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면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 그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를 비롯한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 기사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그걸 모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막상 인터넷상에서 기사를 문제 삼은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외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사의 형식을 빌렸더라도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사실 여부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마치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 사실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이런 현상은,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다루어야 할) 신문의 기사마저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는 소설이나 영화 등 허구의 담론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소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허구의 담론이 소비되는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가지는 재미에 있습니다. 혹시 멸치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느냐는 생각이 드시면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전개에 혀를 차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를 봅니다. 막장이라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알지만 판단을 유보하고 봅니다. 사실성에 대한 판단과 이야기의 흐름에 대한 생각을 유보하면 그때그때 자극적인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재미는 황당함과 약간의 경멸감을 동반한, 독특한 성질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은 인기는 얻을 수 있지만 존경의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냉소가 들어 있는 재미, 그것이 막장 드라마의 인기 비결입니다. 멸치 사건 같은 사회면 기사도 같은 재미를 줍니다. 막장 드라마처럼 이런 기사 안에는 막장 인물이 등장합니다. “명품 ‘된장녀’의 비극적 말로…빚 못 갚아 투신자살”, “美유학 살인범 공부만 하다 이런 일 생겼다”, “살인 부른 ‘게임 중독’…옆집 할머니 살해 700원 훔쳐”, “집단따돌림 스트레스 때문에 살인”. 이 모두가 실제 사회면 기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자살 혹은 살인의 동기가 선정적인 언어로 제목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동(소비에 대한) 조절 장애로 고통받았을 법한 한 여성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후에 ‘된장녀’의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살인 사건들의 동기는 참으로 간단명료합니다. 이 기사들대로라면 열 길 물속보다 알기 어렵다는 사람의 마음이 유서 한 장으로, 경찰의 조서 한 장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셈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허구성을 알지만, 이런 종류의 기사는 여전히 생산되고 유통됩니다. 팔리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에 생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재미만 있으면 마음은 기꺼이 거짓을 눈감아 줍니다. ‘선풍기 담론’은 어떻게 살아남아 소비됐는가 누가 보더라도 헛소리라는 것이 명백한 담론은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막장 드라마처럼, 허구라는 걸 알고 즐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담론이 조금씩 복잡해지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대표적인 예로 제가 앞글에서 지나가듯 언급했던 선풍기 담론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선풍기 켜놓고 자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저도 듣고 자랐습니다.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기도 해서 누군가 선풍기를 켜고 잠들어 있는 걸 보면 끄거나 방향을 돌리곤 했습니다. 유래가 불분명한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고유한 속설 내지는 미신으로 알려져 위키피디아에 선풍기 사망(Fan Death)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고 유튜브에는 풍자 동영상이 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해마다 여름이면 선풍기 사망 사고를 보도합니다. 2006년에는 한국소비자보호원이 선풍기가 위험하다는 내용의 공식 의견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8월에는 다수의 언론이 선풍기 사망은 낭설일 뿐이라고 보도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8월12일에는 선풍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또 한 건의 기사가 여러 신문에 실렸습니다. 유튜브 동영상에는 나라 망신이라는 내용의 댓글도 눈에 띄지만 이 정도의 그릇된 믿음은 어느 나라에나 비일비재합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이 정도에 나라 망신 운운하는 것도 또 다른 자기비하입니다. 사실 선풍기 담론은 나름 그럴듯합니다. 질식, 저체온 등 사망의 원인에 대한 가설도 있습니다. 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안 통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비웃는 외국인들이 전문가 의견을 참조하지 않고도 그렇게 자신 있는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선풍기 담론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선풍기를 켜놓고 자다가 사망한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누군가 선풍기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그것이 설득력 있게 들려서 일종의 정설(?)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든, 한 번 만들어진 후에는 같은 상황에서의 죽음은 대략 선풍기 탓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타살이 의심되지 않는 한 사인을 밝힐 이유가 없으니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없었을 테고,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거짓 담론이 생산되어서 유통되었고 우리는 그 담론을 소비했습니다. 그 결과는 온라인상에서의 국위선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선풍기 이야기처럼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거짓 판명을 받은 담론도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아직도 사실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가 복잡해지면 담론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무척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담론의 생명력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인기입니다.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담론은 오래 지속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요즘 담론’입니다. 요즘 경기 안 좋고, 요즘 세상 험하고,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등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이 담론은 요즘이라는 단어의 효능에 힘입어 시대를 초월해서 늘 인기였습니다. 수십년 동안 한 번도 요즘 경기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악의 불경기가 제 기억에는 너무 잦았습니다. 수십년 전에도 요즘 아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었고, 수십년 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늘 험했습니다. 그 이야기대로 점점 세상이 험해졌으면 지금쯤은 대낮에도 거리를 나다니지 못할 세상이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는 미화되고, 요즘은 항상 부정적 요즘 담론의 인기 비결은 자기애 혹은 나르시시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나르시시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때 다시 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요즘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이야기와 잘 엮습니다. 반대로 과거는 항상 미화됩니다. 그래서 그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미화한 ‘그때를 아십니까?’가 장안의 화제였고, 살벌했던 80년대의 시위 현장마저 희화화해버린 <써니>를 필두로 ‘과거는 아름답다’고 외치는 영화들이 한동안 붐을 이루었습니다. 멸치 이야기는 어불성설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요즘 담론’과 엮이면 사정은 사뭇 달라집니다. 그 자체로는 말도 안 되는 멸치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요즘 세상 험하다는 인기 담론의 증거로 채택되면 나름의 진실성을 획득합니다. 그것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이 여전히 생산, 유통되는 이유이고 담론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담론은 다른 여러 담론과 얽히고설키면서 더 큰 담론을 만들어냅니다. 멸치 담론은 요즘 담론과 엮이고, 요즘 담론에는 사회, 정치, 문화 영역의 다양한 담론들이 섞여 들어옵니다. 그중 무엇을 택해서 큰 담론을 엮어낼 것인지는 각자의 마음 생김새에 달렸습니다. 요즘 세상이 ‘보수 꼴통들’ 때문에 이 모양인지 ‘빨갱이들’ 때문에 이 모양인지는, 그러므로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한국인 타령’도 그렇게 여러 개의 작은 담론이 엮여서 만들어진 포괄적인 담론입니다. 이렇게 큰 이야기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마음은 그 담론이 허구라는 것을 점점 잊어갑니다. ‘한국인 타령’ 정도의 덩어리가 되면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느덧 담론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립니다. 앞으로 저는 ‘한국인 타령’이라는 큰 담론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마음의 법칙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자기비하는 이것 때문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멸치 이야기가 경찰 때문이라고, 또는 기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의 작가를 퇴출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수요가 존재하는 한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복잡한 현상에 대해서는 성급히 답을 내려 하지 말고 가능한 한 다양한 시각으로 그 현상을 바라보는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한국인 타령’도 그런 신중함과 참을성을 요구합니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담론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담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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