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세월호>와 1993년 <서해훼리호>
21년 전
어떻게 하면 이 먹먹함을, 이 분노를, 이 슬픔을 가눌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3년 10월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접하며 그 때 한겨레가 보도했던 내용을 찬.찬.히. 다시 보았습니다.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리조트에서 엠티를 즐기던 대학생이 숨지고, 해병대 캠프에서 보트를 타던 어린 학생들이 숨졌다. 사고 원인 대부분은 인재다. 언론의 보도경쟁, 정부와 여당의 호들갑, 망각과 무책임의 회로 속에서 다시 애꿎은 고교생들이 숨지고 있다. 이번 세월호 침몰은 인재라는 점에서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과 닮았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북 부안군 임수도 근해에서 벌어졌다. 221명이 정원인데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모두 362명이 탑승했다. 여기에 15리터짜리 새우액젓 600여 통과 낚시도구, 자갈 7.3톤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었다. 배의 무게중심보다 위쪽에 실었다. 복원력(평형상태가 깨졌을 때 다시 평형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약해졌다. 바람이 심했고 파도가 거칠었다. 배는 그대로 운항을 시작했다. 오전 9시50분께 왼쪽 스크루에 해면에 떠 있던 그물이 걸렸다. 선장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오른쪽에도 그물이 걸렸다. 속도가 크게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도가 배를 쳤다. 관리·운항 규정을 지켰다면 사고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과적으로 배의 복원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결국 서해훼리호는 오른쪽으로 전복됐다. 사고로 292명이 숨졌다. 이번 진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지기 전까지 최악의 해상 사고였다. 서해훼리호로 많은 것이 바뀐 듯이 보였다. 지금처럼 전국의 모든 언론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선주, 항만청 공무원, 해운회사 직원 등 4명이 기소됐다. 정부와 국회는 앞다퉈 재발방지책을 내놨다. 한동안 대형 해상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들 다수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규정을 무시하는 회사,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 관청, 재난 대처의 미숙함. 이 모두가 21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10분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승객 2백여 명(당시 해운항만청 추정)을 태우고 위도를 떠나 격포항으로 향하던 서해훼리(주) 소속 110톤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서해훼리호는 이날 오전 9시 출항예정이었으나 기상여건이 좋지 않아 40분 동안 출항하지 못하다가 운항을 강행한 뒤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서해훼리호에서는 항해사가 8일부터 휴가를 가서, 항로에 익숙하지 않은 갑판장이 대신 운항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침몰한 서해훼리호를 인양하는 모습.
검찰은 사고선박이 당시 나쁜 날씨 때문에 군산 쪽으로 방향을 잘못 잡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부안 격포 쪽으로 무리하게 방향을 잡으려다 침몰했다는 목격자 증언을 확보했다. 사진은 사고 소식을 듣고 격포항에 몰려든 주민과 실종자 가족들.
서해훼리호에는 위도 주민들과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전국 각지의 낚시꾼들이 타고 있었다. 10일 사고발생 직후 승선인원을 140여명으로 추정했던 경찰은 오후에 배의 넓이를 계산해 추정인원을 210여명으로 늘려 잡았다. 하지만 위도 주민과 낚시꾼들은 사고선박에 3백여명 이상이 탔다고 말했다. 사진은 탑승자들의 낚싯대와 아이스박스 등 유류품을 살펴보는 가족들.
정부는 사고 당일인 10월10일, 교통부장관을 본부장으로 하는 사고수습대책본부를 구성하고 내무부, 국방부, 교통부 장관과 해운항만청장, 해양경찰청장 등을 현지에 급파했다. 또 사고해역에서는 경찰 헬기 19대, 해경 함정 16척, 육군 헬기 12대, 해군 고속정 6척, 해군 함정 20척, 민간인 어선 30척이 출동해 구조활동을 벌였다.
서해훼리호 사고대책본부는 10월11일 오전부터 군 헬리콥터와 해난구조대, 잠수부 140여명을 동원해 본격적인 주검 인양작업에 나섰다. 한 관계자는 "배 안이 너무 어두워 실종자 수색이 어렵다"며 "선체를 뻘 속에서 건져 자세를 바로잡은 뒤 잠수요원들이 주검을 인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침몰된 배는 수심 20m 바다 속에 오른쪽으로 90도 정도 기울어진 채 갯벌에 절반 정도 박혀 있다고 전했다.
경찰은 서해훼리호 여객선 침몰사실을 사건발생 5분 만에 신고 받고도 30분 뒤에야 헬기를 출동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군산해양경찰서가 사고 소식을 접한 것은 사건발생 5분 만인 10일 오전 10시15분이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난 10시45분께 전북경찰청 헬기 1대가 출동해 사고발생 55분만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또 경비함정 258함은 10시15분에 군산해양경찰서로부터 무전지시를 받고서도 1시간이나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다. 결국 경찰 헬기는 침몰한 지 1시간이 지나도록 조난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못해, 단 한명의 생존자도 구조하지 못했다. 사진은 인양한 주검을 유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군산 공설운동장으로 옮기는 모습.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하루가 지난 10월11일 오전 2시 현재 구조된 승객은 65명, 사망이 확인된 사람은 42명이었다. 서해훼리호는 구명보트와 조끼 등을 안전규정에 맞게 형식적으로 갖추고 있었지만, 사고가 발생하자 구명보트(12명 정원)는 한 대만이 제대로 작동했다. 사진은 유가족 확인을 위해 군산 공설운동장으로 옮겨진 주검들.
사고선박은 승객들이 작성해 내는 승선신고서를 부두에서 미리 받아 보관하지 않고, 배 안에서 승무원이 승객들의 명단을 파악해 여객명부를 작성했다. 승객명부가 없어 승선자 명단파악에 혼선을 빚었던 경찰과 행정기관은 사고발생 사흘째인 10월12일에도 여전히 승선인원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사진은 희생자를 확인하고서 오열하는 유가족.
슬픔은 깊이 흐른다
지나온 삶의 연륜이
주름진 얼굴만큼 깊어도,
슬픔은 결코 단련되지 않는다.
보고 듣고 말하리라
눈 있는 사람, 보고
귀 있는 사람, 듣고
입 있는 사람들 말하리라.
대명천지 이 날벼락을.
서해훼리호 사고는 현장을 목격한 민간 어선 선장이 부안군 곰소어업무선국에 조난사실을 맨 처음 타전했다. 서해훼리호에는 221명 정원을 훨씬 넘어선 362명이 탔다. 또 15리터짜리 새우액젓 600여 통과 자갈 7.3톤을 싣는 등 화물적재 규정도 어겼다. 더욱이 사고여객선은 출항 직전 한국해운조합의 운항관리사에게 무전으로 승선인원과 출항신고 등을 하도록 돼 있는 규정을 어기고 한 차례도 교신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은 탓에, 삶을 누려야 할 숱한 목숨이 한 순간에 스러졌다.
서해훼리호 침몰 이틀째인 10월11일 선장 백 아무개씨가 생존해있다는 주민들의 증언이 나와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검찰에 지명수배까지 됐던 백 선장(56)과 갑판장(42), 기관장(62)씨 등 승무원 3명은 15일 오후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포함한 침몰 선박 승무원 7명 모두 숨진 채 인양되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아흐레째인 10월19일 현재 선체에서 61구의 주검을 수습한 데 이어 표류사체 33구를 더 인양함으로써 사망자 수는 274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서해훼리호 승선 인원은 최고 364명에서 최하 344명까지 추정돼 사고 배는 당시 정원(승객 207명, 승무원 14명)의 1.5배에서 1.6배까지 승객을 더 태운 것으로 드러났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원인을 수사 중인 검찰과 경찰은 <나쁜 날씨에서의 무리한 운항>, <선박의 구조적 결함>, <운항자의 기술조작 미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10월11일 군산지방 해운항만청 관계자와 해운조합 군산지부 관계자 등을 불러 조사했다. 사진은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희생자 주검을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
한송이 꽃 떨어져도,
잠 뒤척이는 밤 있건만,
어찌할까, 어찌할까.
이렇게나 많이 스러진 생명들을.
6‧25 전쟁부터 시작해서 4‧19와 5‧16을 겪고, 그 끔찍했던 80년 봄 광주의 소식을 듣고 보고 접했던 이들도, 이런 처참함은 처음 본다고 했다. 험난했던 서로의 삶을 두런두런 나누다가도 다들 처음 본다고 입을 모았다.
군산 공설운동장에서 희생자 주검 도착을 기다리던 유가족 5백여 명은 10월12일 오후 공설운동장 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서 "당국의 안일한 사태수습 태도로 사체인양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며 밤늦게까지 항의농성을 벌였다. 이에 대해 경찰은 전경 4개 중대를 현장에 배치해 유족들의 시내 진출을 막았다.
서해훼리호 유가족들은 10월12일부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사후대책 논의에 들어갔다. 유족들은 또 지역별로 부회장과 상임위원을 각각 7명씩 선출한 뒤 장례, 보상, 사고원인 규명 등 3개 전담반을 구성해 조직적인 활동을 펴나가기로 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유가족 400여 명은 10월24일 전체 유가족 회의를 열고 앞으로 모든 문제를 정부쪽과 협의해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회의 뒤 발표한 성명에서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정부당국의 책임이 크다며 "사고수습이 보상이 아닌 배상 차원에서 범정부적으로 책임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부가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의 경질만으로 사고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9일째인 10월19일, 군경합동구조단은 11구의 주검을 추가 인양해 총 292명의 희생자 가운데 285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차가운 생명이 떠오르기를, 남은 가족들이 평소 고인이 입고 신었던 옷과 신발을 물가에 펼치고서 기원하고 있다.
이 아이들의 눈망울에 비친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죽고 사는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 월명사의 <제망매가> 중에서 -
군경합동구조단은 10월17일 오전 10시40분부터 본격적인 서해훼리호 인양작업에 나서 30분 만에 침몰한 선체를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침몰 사고 일주일 만인 10월17일 오전에 인양된 서해훼리호는 높은 파도와 거친 바람 때문에 배꼬리 쪽에 묶은 인양선 쇠밧줄이 서로 부딪치며 끊어져 이날 밤 11시10분께 다시 침몰했다.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 훼리호는 침몰 17일만인 1993년 10월27일에 곳곳이 부서지고 긁혀서 짓이겨진 모습으로 최종 인양되었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의 마지막 실종자의 주검은 11월2일 오후 5시10분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부안군청 소속 어업지도선이 발견했다. 이로써 희생자 292명의 주검을 모두 거두게 되었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가 난 지 23일 만에 희생자 주검을 모두 인양한 것은 해난사고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과로 꼽힌다. 이는 군과 경찰, 위도주민들, 그리고 대대적인 표류사체 수색작업에 나선 어민과 공무원들의 끈질긴 노력 덕분이었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중에서 -
살아남은 자의 슬픔
설령 꿈에서라도 생각한 바 없는데, 나는.
살갑게 나를 대해준 당신도 그러했을 터인데.
당신과 나는 왜 이리 헤어지게 되었나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메울 수 없는,
이 별리(別離).
누가, 누가 당신과 나를 이렇게 갈라놓았나요.
21년 후 "방송 보도내용이 외적인 볼거리 제공에 치우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사체인양과 유가족의 오열장면, 구조대의 헌신적 활동과 위도주민의 훈훈한 모습 같은 흥미를 자극하는 내용 중심의 보도가 되다 보니 해상교통체계의 허점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 제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 이번 사건도 지금까지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로 미루어볼 때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큰 사고일수록 국민안전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서울YMCA 좋은 방송을 위한 시청자모임(1993년 10월24일) "이번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것이, 그때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론 보도를 보면, 구조물품 안전점검을 회사가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는데 검사도 안 하면서 전부 다 검사한 걸로 되어 있었죠. 그러나 사고가 나자 막상 하나도 (구명정이) 안 터졌죠. 구명정에는 비상식량과 의약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대체 20여년 전하고 뭐가 달라졌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지금 수사기관에서 어떻게 수사하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를 빨리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결국 법적 문제가 생길 것이고, 형사적·법적 책임을 가리거나 책임을 추궁할 때 중요한 게 증거입니다 … 가슴이 아픕니다. 전부 인재입니다. 성수대교 사건도 인재고요. 근본적으로 이런 사건들을 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교훈을 못 얻고 있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야만이 왜 반복되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희수 변호사(2014년 4월19일)
슬픔은 결코 훈련되지 않습니다. 설령 반복되더라도,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저희 한겨레와 우리 사회가 21년이 지나도록 재발 방지책 마련에 소홀했기에 또 다시 이런 참담함을 맞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해훼리호와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장철규 기획위원 chang21@hani.co.kr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는다. 리조트에서 엠티를 즐기던 대학생이 숨지고, 해병대 캠프에서 보트를 타던 어린 학생들이 숨졌다. 사고 원인 대부분은 인재다. 언론의 보도경쟁, 정부와 여당의 호들갑, 망각과 무책임의 회로 속에서 다시 애꿎은 고교생들이 숨지고 있다. 이번 세월호 침몰은 인재라는 점에서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과 닮았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북 부안군 임수도 근해에서 벌어졌다. 221명이 정원인데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모두 362명이 탑승했다. 여기에 15리터짜리 새우액젓 600여 통과 낚시도구, 자갈 7.3톤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었다. 배의 무게중심보다 위쪽에 실었다. 복원력(평형상태가 깨졌을 때 다시 평형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약해졌다. 바람이 심했고 파도가 거칠었다. 배는 그대로 운항을 시작했다. 오전 9시50분께 왼쪽 스크루에 해면에 떠 있던 그물이 걸렸다. 선장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시 오른쪽에도 그물이 걸렸다. 속도가 크게 줄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도가 배를 쳤다. 관리·운항 규정을 지켰다면 사고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과적으로 배의 복원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결국 서해훼리호는 오른쪽으로 전복됐다. 사고로 292명이 숨졌다. 이번 진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어지기 전까지 최악의 해상 사고였다. 서해훼리호로 많은 것이 바뀐 듯이 보였다. 지금처럼 전국의 모든 언론이 취재 경쟁을 벌였다. 선주, 항만청 공무원, 해운회사 직원 등 4명이 기소됐다. 정부와 국회는 앞다퉈 재발방지책을 내놨다. 한동안 대형 해상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들 다수가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오판이었다. 규정을 무시하는 회사,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 관청, 재난 대처의 미숙함. 이 모두가 21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주름진 얼굴만큼 깊어도,
슬픔은 결코 단련되지 않는다.
귀 있는 사람, 듣고
입 있는 사람들 말하리라.
대명천지 이 날벼락을.
잠 뒤척이는 밤 있건만,
어찌할까, 어찌할까.
이렇게나 많이 스러진 생명들을.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 월명사의 <제망매가> 중에서 -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 곳이 어드메뇨 -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 중에서 -
살갑게 나를 대해준 당신도 그러했을 터인데.
당신과 나는 왜 이리 헤어지게 되었나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메울 수 없는,
이 별리(別離).
누가, 누가 당신과 나를 이렇게 갈라놓았나요.
21년 후 "방송 보도내용이 외적인 볼거리 제공에 치우치는 한계를 드러냈다. 즉 사체인양과 유가족의 오열장면, 구조대의 헌신적 활동과 위도주민의 훈훈한 모습 같은 흥미를 자극하는 내용 중심의 보도가 되다 보니 해상교통체계의 허점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대안 제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 이번 사건도 지금까지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로 미루어볼 때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큰 사고일수록 국민안전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서울YMCA 좋은 방송을 위한 시청자모임(1993년 10월24일) "이번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것이, 그때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언론 보도를 보면, 구조물품 안전점검을 회사가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는데 검사도 안 하면서 전부 다 검사한 걸로 되어 있었죠. 그러나 사고가 나자 막상 하나도 (구명정이) 안 터졌죠. 구명정에는 비상식량과 의약품이 다 들어 있습니다. 대체 20여년 전하고 뭐가 달라졌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지금 수사기관에서 어떻게 수사하는지 모르겠지만, 증거를 빨리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송한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결국 법적 문제가 생길 것이고, 형사적·법적 책임을 가리거나 책임을 추궁할 때 중요한 게 증거입니다 … 가슴이 아픕니다. 전부 인재입니다. 성수대교 사건도 인재고요. 근본적으로 이런 사건들을 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교훈을 못 얻고 있다면 어쩌자는 것인가'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야만이 왜 반복되는가' 자문하게 됩니다."
- 서해훼리호 침몰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희수 변호사(2014년 4월19일)
슬픔은 결코 훈련되지 않습니다. 설령 반복되더라도,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슬픔을 강요하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저희 한겨레와 우리 사회가 21년이 지나도록 재발 방지책 마련에 소홀했기에 또 다시 이런 참담함을 맞게 되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서해훼리호와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장철규 기획위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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