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항쟁 때 아들 잃은 이근례씨
“세월호 때문에 마음의 병 다시 도져
어린 생명들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
“세월호 때문에 마음의 병 다시 도져
어린 생명들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
“저 생때같은 학생들을 어쩔 거나, 그 차가운 바닷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1980년 5월에 아들을 잃은 이근례(77·광주시 남구 월산동)씨는 “세월호 때문에 병이 다시 도졌다”고 말했다.
2012년 10월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생긴 뒤 꾸준히 미술·음악치유를 받으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왔는데, 또다시 불안증세가 나타났다. 세월호 참사 방송을 보고 울던 이씨 등 오월 어머니들은 지난달 음악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수업을 하지 못했다. 대신 “어린 생명들이 힘든 시간을 잘 버티고 무사히 돌아오라”고 기도했다.
이씨는 세월호 참극을 보면서 또다시 아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1980년 5월19일 재수생이었던 아들 권호영(1962년생)은 거리로 나갔다. 일주일 뒤인 26일께 집에 들어와 아침밥을 먹고 나간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사망·실종자 명단에 아들의 이름은 없었다. 2001년 10월 무명열사로 묻힌 주검 11기와 행방불명자 가족들의 유전자(DNA) 검사를 통해 21년 만에 아들의 주검을 수습했다. “저거이 기냐, 저 뼈다구가 우리 호영이냐….” 머리와 무릎에 총알이 관통한 아들의 주검 앞에 이씨는 오열했다.
“내 새끼 찾았다고 씨언(시원)한 마음이 없어. 묏(묘)을 팠을 때도 우리 애기가 그때 입고 있던 옷 같은 것은 하나도 안 나오고 다 벗고 뼈다구만 있더라구, 지금도 뫼 앞에서 ‘참말로 니가 내 새끼냐’고 못된 맘만 묵어져. 남의 새끼를 내 새끼라 하는가 자꼬 그 마음만 들어가.”
그래서 그는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실시한 미술치유 프로그램에서 ‘나만의 보석상자’를 만들었다. “우리 아들 혼, 혼을 넣고 싶어, 혼을 꼭 건져서 담아 갖고 놔둘 것이여….” 이씨는 아들의 주검을 찾아다니며 겪었던 20여년의 슬픔을 보석상자에 응축해 표현했다.
20여년 전 영혼결혼식을 통해 5·18 행방불명자 윤순애(당시 20살)를 며느리로 맞았지만, 며느리의 주검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꿈에라도 한번 보고 싶어, 내 새끼….”
광주/정대하 기자
이근례씨
이슈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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