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기자들
잊혀지는 것과의 싸움입니다. 전두환(83) 전 대통령 얘깁니다. 전 전 대통령은 지난해 이맘때까지 추징금 1672억원을 내지 않고 버텼습니다. 재산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2013년 10월에 추징시효가 완료되면 전 전 대통령은 돈을 내야 할 의무에서 해방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이 거짓이라는 게 2004년 검찰 수사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전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전재용(50)씨가 외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채권 가운데 73억여원어치가 전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안대희(59) 전 대법관이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으로 수사를 이끌었고, 유재만(51) 변호사가 중수2과장으로 실무 수사를 맡았습니다. 당시 검찰은 수많은 ‘전두환 재산 은닉 조력자’들의 계좌를 추적하고 진술을 받아내는 집요한 수사를 펼쳤습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5월20일부터 잇달아 전 전 대통령 은닉재산을 찾자는 크라우드소싱 방식의 기획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시민들이 방대한 원자료(로데이터)를 분석해 취재에 참여하는 취재기법입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지시로 검찰이 추징 수사에 나섰습니다. 이와 별도로 <한겨레>는 서울중앙지검을 상대로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검찰의 2004년 재용씨 수사기록 가운데 개인정보를 뺀 나머지 부분을 공개하라’며 정보공개를 청구했습니다. 검찰은 지난해 6월12일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전 전 대통령 재산 은닉 핵심 조력자들이 기록 공개에 대해 거부의사를 밝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사생활의 비밀’도 비공개 근거로 들었습니다.
<한겨레>는 검찰의 비공개 결정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습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인 법무법인 ‘이공’의 박주민 변호사가 흔쾌히 무료로 소송대리를 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한겨레>는 지난해 6월21일 검찰의 비공개 결정이 부당하다는 준항고를 제기했습니다. 여전히 검찰 수사기록 공개의 값어치가 있다고 봤습니다.
2004년 검찰 수사기록에는 전 전 대통령이 광범위한 차명·가명 계좌를 만들어 비자금을 은닉한 수법과 조력자 명단이 나옵니다. 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 납부를 피하고 재산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반쪽짜리 금융실명제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금융실명제법은 차명계좌를 만들어준 금융회사 직원에게만 과태료 500만원을 부과하는 처벌 조항을 둘 뿐, 정작 가짜 계좌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명의신탁자와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명의수탁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없었습니다.
결국 지난 5월2일 처벌 조항을 강화한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앞으로 재산을 숨기거나 자금세탁을 목적으로 차명거래를 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2004년 검찰 수사기록에는 전두환 조력자들의 불법 차명거래 실체가 담겨 있습니다. 금융실명제가 정착하기 위해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울 만한 공익성이 있다고 <한겨레>는 봤습니다. 재산은닉과 무관한 금융거래 정보를 빼고, 판결을 통해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인정된 금융·계좌 수사기록만 ‘선별해서’ 공개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은 통째로 공개 거부를 한 것이지요.
서울중앙지법 형사31단독 송영복 판사는 지난 4월29일 <한겨레>가 낸 준항고에 대해 “검찰의 비공개 결정은 정당하다”며 기각 결정했습니다. 전 전 대통령 등 당시 검찰에서 ‘진술하였거나 계좌, 채권 또는 수표 거래를 포괄적으로 추적당한 사람들’ 35명이 <한겨레>의 정보공개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컸습니다. 불법행위와 무관한 금융거래까지 밝혀지는 것은 사생활의 비밀을 침해한다는 근거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법원도 수사기록 공개의 공익성은 인정했습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미납 추징금 환수 필요성과 집행 과정에 관한 국민의 알권리,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의 실태 파악 및 공개라는 공익은 크다”고 밝혔습니다. 또다른 성과도 있었습니다. ‘포괄적으로 계좌추적을 당한’ 35명 안에 그동안 언론에 한번도 보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조력자 10여명의 명단이 들어 있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 5월7일 1심 결정에 불복해 재항고장을 제출했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조력자 10여명의 실체를 앞으로도, 주구장창, 탐구할 계획입니다. 1980년대 금융·채권 계통에서 활동하신 독자분들 가운데 명단이 궁금하신 분께는 메일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신 명단을 보시고 취재의 힌트를 부탁드립니다. 이상, 지난해 전두환 특별취재팀장이었음이 잊혀지고 있는 토요판 고나무 기자였습니다. 꾸벅.
고나무 토요판팀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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