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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등록 2014-05-28 20:07수정 2014-05-29 11:24

세월호 침몰 참사 희생자 추모와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 촛불행동 참가자들이 24일 밤 서울 종각네거리에서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세월호 침몰 참사 희생자 추모와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범국민 촛불행동 참가자들이 24일 밤 서울 종각네거리에서 청와대 쪽으로 행진하려다 이를 막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사람이 중심이다] 한홍구 기고 / 역사와 책임 (3)
일본의 장점도 배우지 못한 친일파들

지금의 수구세력이 돈만 있고 양심도 염치도 능력도 없어서 그렇지, 지금 친일파 소리를 듣는 인사들이 전부 다 몰염치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국군 창군에 참여한 일본군 출신 중 가장 선배이며 고위직이었던 이응준은 미군정에서 참모총장을 맡을 것을 권유했으나 자신 같은 사람이 새 나라 새 군대의 간판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물러났고, 뒤에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낸 신태영은 아예 처음에는 군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응준과 일본 육사 동기로 역시 일본군 대좌였던 안병범은 당시 한국군의 최고령 대령이었는데 이승만이 다리를 끊고 도망간 뒤 패잔병들을 모아 유격전을 꾀하다가 실패하자 ‘적과 싸워 국토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죽어 마땅함’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인왕산에서 자결했다. 이제 국정원의 간첩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알았으면 악마이고 몰랐으면 바보 소리를 듣게 된 공안검찰도 처음부터 저 지경은 아니었다. 1964년 중앙정보부가 송치한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을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반공사상이 투철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기소하기를 거부했다.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1981년 이른바 연세대생 내란음모 사건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구상진은 어린 대학생들이 유인물을 만들다 잡힌 것을 안기부가 내란음모죄 기소의견으로 송치하자 적용 법령을 바꾸려 하다가 옷을 벗어야 했다. 그 빈자리를 메꾸어 ‘허위조서’까지 만들어 안기부 뜻대로 이들을 내란죄로 기소하여 안기부에 스카우트된 자가 바로 정형근이었다.

아시아의 약소국이었던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 열강에 끼게 되고 급기야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것은 우리에게는 큰 불행이었지만, 일본 보수세력 입장에서는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 강점을 발휘한 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야스쿠니신사에 가보면 그들식 전쟁기념관인 유슈칸이 있는데, 야스쿠니신사에 배향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영쇄부’를 펴놓은 것을 보면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대장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온다. 백범도 일제 경찰에게 밤새 모진 고초를 당하며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게 구원하겠다는 내가, 남의 나라를 한꺼번에 삼키고 되씹는 저 왜구와 같이 밤을 새워 일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라고 한 적이 있다. 친일파들은 일본과 친했고 일본을 위해 일했을지는 몰라도 일본의 보수세력 본류가 가진 살벌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도덕성과 희생정신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앞잡이 노릇만 했기 때문이다.

계엄군이 광주로 쳐들어온 5월27일
시민군 300명이 죽음을 기다렸다
“시민 여러분, 우릴 기억해주십시오
우린 폭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과 부역자 처벌로 망가진 것은 좌익만이 아니었다. 아니, 좌익은 남쪽에서만 멸균실 수준으로 사라졌을 뿐, 북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명맥을 유지했다. 이 땅에서 진짜 사라진 것은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우익이었다. 남북협상을 중간파가 했다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비추어 보면 백범 김구는 극우, 우사 김규식은 합리적 우파나 잘해야 중도 우파 정도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다리 끊고 도망갈 때 서울에 남았다가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등의 인사들이 양심과 부끄러움과 합리성을 지니고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질 줄 아는 우익인사들이었다.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우익 중에서 백범은 암살되고, 나머지 지도급 인사들은 끌려가고,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학살당하고 부역자로 처벌받으며 낙백해버렸다. 우익이라면 당연히 민족을 내세워야 하는데 이 땅의 자칭 우익들은 3·1절에도 성조기 들고 나오는 부류들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한국의 진보는 원래 진짜 보수였다. 극우파 김구의 수행비서였던 장준하는 김구가 남북협상에 나서자 공산주의자와 무슨 협상이냐며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 함께 떨어져 나왔고, 이승만 정권의 국무총리가 된 이범석이 직책상 당연히 좌익 전향자들을 포용하는 태도를 보이자 좌익들에게 관대하다며 이범석과도 갈라선 강골 극우파였다. 신의주 반공학생 의거의 사상적 배후 함석헌,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시절 우익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군장교였던 문익환과 박형규, 반탁학련이란 극우파 학생조직의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 7년간 국군장교로 복무한 리영희, 반공포로 김수영, 유학생의 열에 아홉이 미국에 잔류하던 시절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납북당한 것을 잊지 않고 군에 복무하기 위해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온 백낙청 등등은 어느 모로 보나 보수의 가치를 충실히 지킨 양심적인 인물들이었다. 일제의 주구들이 우파요, 애국자를 자처한 험한 시대에 까마귀 노는 물을 피한 백로들이 시간이 흐르며 진보가 되었다.

그래도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 않은 이유

이승만 같은 자들이 선장을 하고, 김창룡, 원용덕, 노덕술, 박종표, 이근안 같은 자들이 선원질을 한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이 와서 구해준 덕분일까?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에게는 자기가 의주까지 가서 불러온 명나라 군대가 나라를 구해준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순신이 있었고, 나라의 녹을 먹은 적이 없으면서도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장들이 있었다. 장수만 있어서 어찌 의병전쟁이 되겠는가. 역사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이 이 나라를 지켰고, 다시 세웠다.

전두환의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쳐들어온 5월27일 새벽, 도청에는 시민군이 300명이나 남아 죽음을 기다렸다. 지금까지 돌아가는 꼴을 보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살아남았다. 그렇지만 그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거기 남은 바보는 없었다. 누가 너는 꼭 남아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도 없었고 집에 간다고 잡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집에 가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여학생들, 고등학생들은 눈을 부라리고 악을 써서 도청에서 내보냈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남은 것이 아니었다. 지는 싸움을 피할 수 없었기에, 다 총을 놓고 집에 가버리면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내주는 것이기에, 그냥 남았다. 특별한 직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광주시장도 아니었고 이름난 교수나 문화인도 아니었고, ‘사’자 돌림 전문가도 아니었다. 시민군 중대장, 소대장이라서 남은 게 아니라 남은 사람 중에서 새로 중대장, 소대장이 임명되었다. 남은 사람들 중에는 죽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이 된 윤상원 같은 지식인 출신도 있었고, 더러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다수가 철가방, 구두닦이, 날품팔이, 용접공, 웨이터, 식당 보이 등 박정희가 ‘똘마니’라고 비하해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그 ‘똘마니’들이 위대한 광주시민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집에 간 사람들도 “광주시민 여러분,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라는 애절한 호소를 들으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키워가며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긴 새벽을 보냈다. 5월26일 밤 “나는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던지는 사람들이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누구나 광주의 자식이 되어 온몸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은 사무장 양대홍은 부인의 애타는 전화에는 응답하지 않고 끝내 퇴선 지시를 내리지 않은 무전기를 꼭 쥔 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구명조끼가 모자라자 “내 거 입어” 하고 선뜻 벗어준 학생, 그 와중에 아기부터 탈출시키던 아이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끼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아이들 곁에서 선생 노릇 하고 싶어했던 교감 선생님, 아이들과 함께 가라앉은 선생님들, 그리고 겨우 매점에서 물건 파는 어린 알바생이면서 “선원은 맨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 거야”라며 세월호의 악마들, 대한민국호의 악마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보인 박지영… 이들이야말로 구조변경에 노후수명연장에 과적에 규제완화에 온갖 비리와 뇌물로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우는 대한민국호가 여태껏 가라앉지 않고 항해할 수 있는 숨은 복원력이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 더 이상 대한민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끝>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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