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적어도 법 위반 행위라고 선언한 것은 의의가 있지 않나.”
10일 오후 2시 서울중앙지검 13층 브리핑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내용을 2012년 대선에 활용한 정문헌(48) 새누리당 의원을 벌금 5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고 발표하던 윤웅걸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그래도 기소는 했다’며 민망한 듯 웃었다. “정상 간 대화록을 빼돌려 선거에 활용한 행위가 겨우 약식기소할 정도로 경미한 사안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이 거듭되자 긴 설명 끝에 내놓은 답이었다. ‘무혐의 처분을 하라는 압박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소는 했으니 인정해달라’는 얘기로 들렸다.
그런 민망함 때문일까?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례적으로 촬영을 불허했고, 설명자료도 배포하지 않았다. 기자들의 항의로 마지못해 내놓은 자료는 피의자들의 간단한 혐의 내용과 처분 결과만 적은 A4 용지 두 장이 전부였다.
피의자가 여당 쪽인 ‘대화록 유출’ 사건과 동전의 앞뒷면 관계인, 피의자가 야당 쪽인 ‘대화록 실종’ 사건 수사결과 발표 때는 어땠나? 검찰은 56장짜리 설명자료와 이를 요약한 7장짜리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발표 장면은 생중계됐다.
여당에 호재로 작용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아르오(RO·혁명조직) 사건’ 수사결과 발표 때도 그랬다. 대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수남 당시 수원지검장(현 서울중앙지검장)은 공보담당자인 차장검사를 제치고 직접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 덕(?)에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영전했다는 말까지 듣는 김 지검장은 그 사건에 견주어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록 유출’ 사건 수사결과 발표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수사결과를 활용하고도 ‘그래도 기소는 했다’고 자위하는 검찰에 묻고 싶다. 이제 국가기밀을 선거에 활용해도 되는가? 2012년 12월11일 국정원 직원의 댓글 공작 제보를 받은 민주당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법률 판단은 국민에게 향후 행동지침을 제공해줘야 한다”며 이렇게 반문했다. “민주당은 선거사범을 대하는 가장 모범적인 방식을 따랐다. 경찰과 선관위를 불렀고 직접 문을 따고 들어가지 않은 채 계속 나오라고 요구했다. 검찰 판단대로라면 이제 불법 선거운동 현장을 적발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난해 6월 검찰은 오피스텔 안에 있던 국가정보원 직원 김하영(30·여)씨를 ‘죄가 있다’며 기소유예 처분했다. 그런데 그 죄를 적발하려 한 야당 의원들을 줄줄이 감금죄로 기소하는 게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검찰 역사를 돌이켜보면, 고위직 몇몇이 엄정해야 할 형벌의 잣대에 ‘정치적 이해’를 적용시킬 때마다 검찰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역설적인 사실은 정권 입맛에 맞춰 검찰권을 이용한 사람은 조직이 망가지든 말든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
2017 ‘잠룡’들이 움직인다 [21의 생각 #278]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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