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3일 경북 김천시 봉산면 덕천포도원에서 만난 김성순 사단법인 한국포도회 명예회장이 영근 포도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는 55년째 포도를 키운 포도재배의 선구자다. 김천/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포도농사꾼 김성순
포도농사꾼 김성순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 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그는 포도농사꾼이다. 햇수로 55년째 포도를 키운다. 그의 농원 입구에는 충직한 지킴이처럼 30년생 둥치 굵은 포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엿가락을 배배 꼬아놓은 듯 세로로 주름진 나무껍질이 반질반질하다. 지난 30년간 천 번도 넘게 스쳤을 그의 손길의 흔적인 양.
지난 8월13일 경북 김천에 있는 덕천포도원을 찾았다. 한국 포도재배의 선구자 김성순 선생은 1929년생으로 85살의 고령이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 목소리가 낭랑했다.
“요놈은 잘 자랐고 요놈은 부실하네.”
슈퍼에서 박스에 담긴 포도송이만 봐온 도시 사람에겐 종이봉지에 싸인 채 주렁주렁 전등처럼 매달려 있는 포도 다발들이 봉인된 기밀문서처럼 수수께끼 같은데 그는 종이봉지만 보고도 잘 익은 놈과 덜 여문 놈들을 즉석에서 가려낸다.
“어떻게 아세요?”
“가지가 이렇게 길게 뻗어 나오면 열매가 잘 안돼요. 보여줄까요?”
종이봉지를 헤쳐 보니 그의 말대로 어떤 송이는 잘 여문 포도알이 고르게 달렸고 어떤 송이는 굵고 작은 알들이 성글게 섞여 있다.
1960년 처음 시작한 김성순의 포도농장은 오랜 세월 포도 재배 농민들의 체험학습장이자 종묘장이었다. 포도농민뿐 아니라, 그의 농장은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 생태주의자, 평화운동가, 동학연구자들이 수시로 다녀가는 단골 “순례지” 중의 하나다. 방문객들은 김성순의 농장에서 단순한 농사 지식만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삶의 섭리를 배워간다. 김성순의 포도농사에는 어떤 특별함이 있는 걸까? 육사의 시 ‘청포도’의 한 구절처럼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송이송이 여물어 가는 포도나무 아래서, 그의 독특한 포도철학과 팔십 평생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질소(N)와 탄소(C) 재배공식
땅 기름지면 질소 높아지고
햇빛 좋으면 탄소 많이 생겨
N은 물질이고 C는 정신이라 할만
물질 커지는 데 맞게 정신 커져야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하는 걸 기준으로 삼지 마라
내가 어제보다 얼마나 더
좋아졌느냐에 기준 둬야 한다” 옆가지 방해하는 힘센 놈, 좋은 열매 못 맺는다 -아까 하던 포도 얘기부터 다시 여쭙겠다. 왜 잘 자란 나무는 열매가 부실한가? “넝쿨이 무성하면 좋을 줄 알지만, 과수는 너무 웃자라면 수정이 잘 안 된다. 포도 이파리는 손바닥만 해야 적당한데, 비옥한 땅에 거름 많이 주면 마디가 죽죽 늘어나면서 이파리 하나가 호박잎만해진다. 그러면 포도 맛이 없거나 병에 약해지지. 그러면 너슬포도가 된다.” -너슬포도가 뭔가? “밀착해서 촘촘히 많이 붙어야 되는데,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이렇게 붙은 포도가 된단 말이다.” -거 참 신기하다. 왜 그럴까? “포도에도 주기가 있는데, 꽃 피기 전까지가 ‘영양생장기,’ 그다음 꽃 피고 포도알에 착색이 될 때까지가 ‘교대기’고 그다음 낙엽이 될 때까지가 ‘생식성장기’이다. 생장기에는 순(筍)의 힘이 좋아야 하지만 교대기에는 에너지가 순으로 안 가고 열매로 가도록 전환이 잘돼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자라는 게 능사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이 시대가 여름이 아니다. 여름엔 쭉쭉 자라는 게 좋은데, 이제 시대정신이 가을로 가고 있다. 양분을 열매로 보내든지 뿌리로 보내서 겨울 준비를 해야지, 계속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쪽으로 가면 어떡하나. 나무도 그렇게 되면 병약해지고 좋은 열매를 못 맺는다.” -시도 때도 없이 성장하려고만 하면 안 된다? “지금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해야 하는 시기다. 어떤 기업에서 광고 문구로 이 말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웃음) 그간 우리가 돈, 돈, 돈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아파트 잘 짓고 공장 팽팽 돌아가고 수익 늘리고… 그렇게만 하면 모두가 잘산다고. 근데 사실은 사람들 심성이 따라가질 못하는 거지. 포도로 치면 넝쿨만 무성하고 제대로 수정도 안 되고 열매가 안 달리는 격이다.” -인간 사회의 성숙은 무엇인가? “농사를 짓는 데 재배공식이 있다. 분모를 질소(N)로 놓고 분자를 탄수화물(C)로 놔서 ‘N분의 C’(C/N)라고… 땅이 거름지면 ‘질소’가 높아지고, 하늘의 햇빛을 잘 받으면 광합성 잘해서 ‘탄수화물’이 많이 생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뤄야 농사가 잘된다. 땅은 좋은데 햇빛 못 받으면 (종이에 c/N라고 쓰면서) 꽃도 열매도 시원찮다. 반대로 땅이 거름지지 못한데 햇빛만 짱짱하면 (C/n라고 쓰고) 받쳐주는 힘이 약해 식물이 잘 못 큰다. 이게 자연의 섭리다. 난 C/N 공식이 사람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N은 물질이고 C는 정신이다. 물질이 커지면 거기 상응하게 C가 커져야 한다. 물질 토대가 너무 빈약해도 안 되지만 지금은 무질서하게 N(물질)만 커진 상태다. 이래선 성숙이 안 된다.” -성숙을 위해서 혼자 성장하는 가지를 억제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우리 통념은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 ‘되는 놈을 밀어주자’였다. 그것이 교육에서나 경제에서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문제다.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학급에 애들이 30명 있다. 그중엔 가만 냅둬도 공부 잘하는 놈이 있다. 가만두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놈이 있고. 이런 경우엔 잘하는 애들도 독려하되 이놈이 지 공부 좀 잘한다고 행여 다른 애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적절히 억제해줘야 한다. 약한 애들은 중간 정도로 따라올 수 있도록 부추기고 도와줘야 하고… 포도 키울 때 보면 다른 놈들보다 두세 배 옆으로 뻗어가면서 다른 놈의 성장을 억제해 버리는 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해서 저라도 열매를 많이 맺으면 모르겠는데 이래선 저도 좋은 열매를 못 맺는다. 포도 가지 중에 너무 도전적인 놈은 살짝 가지를 비틀어 놔야 한다. 꺾어내진 않지만 햇빛을 좀 못 보게. 아예 꺾어버리면 이 세력이 또 다른 데로 가서 다른 놈이 비정상적으로 자라버린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교사라면 뒤처지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더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사실 그게 쉽지 않다.” 대구사범 졸업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죽을 고비 김성순은 젊어서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 김한규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43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교사자격시험을 보고 대구칠성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앞날이 막막하고 답답했다. 다시 4학년으로 복학해서 졸업할 무렵인 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자주독립의 상징이던 백범 서거에 격분하여 가깝게 지내던 대구사범 동기 몇몇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협상 재개” 전단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며칠 구류 살고 나오겠지 했는데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10개월이 넘도록 재판도 못 받고 미결수로 있던 중 6·25가 터졌다. 7월 어느 날 같은 형무소에 있던 8100여명 중 3700여명이 불려나갔다. 제주도 4·3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목포, 보성, 안동 등지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올라온 2심 대기자들이었다. 무더운 여름, 4평짜리 비좁은 방이 미어터지도록 열댓 명씩 끼어 자다가 그중 절반을 불러내자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이름이 불리자 싱글싱글 웃으며 나간 이, 읽던 책을 들고 나간 이도 있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모두 학살당했단 얘길, 며칠 후 먼 친척뻘이던 간수한테서 나직이 전해 들었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지셨다. “어디 다른 데로 이감 가는 줄만 알았지. 왜 나는 안 부르나 생각도 하고… 구속된 지 1년 만에 종로초등학교에 천막 쳐놓고 임시법정이 열렸는데 공판에 나가 보니 동창들은 없고 나 한 사람뿐이었다. 판사가 ‘공범이 대여섯 명인데 어째 당신 혼자뿐이냐?’ 물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내가 알겠냐?”고 하니까 아무 소리 않더라.” -나머지 공범들은 어떻게 된 건가? “나중에 나도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알 도리가 없다. 동기 하나가 군대 갔다가 폐결핵으로 죽은 건 확인했고, 나머지는 통… 내 추측으론 아마 보석이 돼서 나왔다가 ‘보도연맹’(좌익전향자모임)에 가입되지 않았을까. 전쟁 나고 보도연맹 사람들 대부분이….” -학살되었으니까. “그렇게 죽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 -실제로 좌파였나? “아니다. 문학을 좋아해서 서로 책 빌려주고 빌려보고 하는 사이였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로맹 롤랑의 <매혹된 영혼>, 그런 이와나미 문고의 고전들….” 삶과 죽음이 순간의 차이로 엇갈렸다. 만 스물에 구속되어 혼자 살아남았지만 삶은 죽음만큼 암울하고 허무했다. 김성순은 20대 초반의 참담한 복역 생활을 훗날 시의 형식을 빌려 회고했다. “간잽이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부산 서면 연필공장 주먹밥 먹으면서/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누구에게 감사할 줄도 몰랐다.“(1995년 정농회지에 실린 김성순 시 중에서) 1951년 4월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자마자 “총알받이 면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공군기술하사관에 지원해 3년간 근무했으나 뒤늦게 국가보안법 전력이 드러나면서 불명예제대하고 다시 육군 제3보충대에 소집되어 4년여를 근무했다. 58년 서른살이 되어 제대한 그 앞에 놓인 것은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의 자리였다. 먹고사는 일부터 걱정이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국가보안법 빨간 딱지 붙은 처지에 공직이나 교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한 것이 농사였다. 아버지가 틈틈이 개간해온 김천의 하천 부지에 농사를 짓겠다고, 갓 시집온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리어카를 샀다. -자발적 의사라기보다는 떠밀려 시작한 셈인가? “나란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시대는 어떻게 바뀔까.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의지할 데도, 호소할 데도 없었다. 일본놈 밑에서 나고 자라 조선말 한번 쓸 때마다 교실 뒤 게시판에 매일 그래프로 표시당하면서 크다가, 해방을 딱 맞고 나니 허무하더라고. 알고 보니 태극기도 있고 임시정부도, 김구 선생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그러면 이젠 참 제대로 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어야지,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뛰어든 일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시대의 폭풍 앞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거다. 그러곤 7년 동안 졸병 생활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다 귀찮아, 희망이 어딨어?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는 심정으로 농사라고 시작을 했다.” 첫해에는 수박과 참깨를 심었는데 홍수에 반 넘게 물에 잠기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동네 꼬마들이 서리를 해가는 통에 폭삭 망했다. 이웃 주민의 권유로 포도농사를 시작한 건 이듬해인 60년부터였다. 겨우 내내 언 땅에 구덩이를 파고 하루에 네 번씩 32킬로미터를 걸어 김천 시내를 오가며 리어카 가득 인분을 실어 날랐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겠다. 명색이 사범학교 나온 인텔리인데. “그게 문제였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도 그런데, 똥장군을 싣고 다니자니… 참 내 인생이 비참하구나! 근데 처음 시작할 때가 문제지, 딱 마음먹고 시작하고 나니 ‘똥배짱’이 생기더라.(웃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3~4년이 지나면서 하천가의 척박한 1000여평 땅에서 쌀 100가마분의 수입이 올랐다. 땀 흘리는 일이 힘들긴 해도, 농업만큼 정직한 직업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체험한 기간이었다. 포도농사를 시작한 지 10년 뒤인 1970년엔 더 좋은 땅 2500평을 구해 현재의 덕천포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빠짐없이 농정일지를 쓰고 포도재배법을 연구하는 한편, 농학자 류달영 선생의 <소심록> <유토피아의 원시림>,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 <씨알의 소리> 같은 책들을 꼼꼼히,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차차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허공에 떠 있던 발이 처음으로 땅 위에 닿는” 기분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을 살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70년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교육을 수료하고, 정농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등 농민을 위한 권익운동에 앞장섰고 유기농법 확산과 생협운동에도 관여했다. 1980년 창설된 ‘사단법인 한국포도회’의 창립멤버로 이후 13년간 회장직을 맡아 무농약 포도재배기법과 포도가공기술을 전파했고 지금도 이 단체의 회지 <포도>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젊은 시절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스스로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시나? “내가 농가 출신도 아니고, 농대는커녕 농고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농업을 안 만났더라면, 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지도 못했을 거다. 농업이 내게 준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겸손함과 기다림을 가르쳐주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것이 농사다. 농사가 나를 치유해준다.” -사실 요즘은 전 국민이 치유를 필요로 한다. 세월호 사건이나 윤 일병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문제다. 누군가는 책임지고 진상 규명하고 고칠 건 고쳐야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나 자신부터 엄밀하게 거울에 비춰봐야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하는 걸 기준으로 삼지 말라. ‘내가 어제보다 오늘 얼마나 더 좋아졌나’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자기수련을 사회개혁보다 우선에 두는 건가?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나고 사회적인 현상은 현상이다… 이렇게 보기 쉬운데 실은 이게 전부 연결되어 있다.” 99마리 양 놔두고 한 마리 양 찾아야 할 이유 그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이 쓴 화결시(和訣詩)를 꺼내어 한줄 한줄 주석을 곁들여 설명한다. ‘지지엽엽 만만절’(枝枝葉葉萬萬節)이란, ‘가지가지 잎새마다 만만 마디로 얽힌 한 나무’라는 뜻이라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 생명이라고… 40여년간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성순은 2006년 해월 최시형의 추도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동학연구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기독교와 천도교의 섭리는 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동학에서 인내천을 얘기하는데 요즘 경악할 만한 사건들을 보다 보면 인간이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가 회의가 든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이 쓴 책 중에 제일 인상에 남는 글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누군가 날 팔 것이다’ 그 놀라운 얘기를 하셨을 때 제자들이 저마다 예수 옆에 가서 ‘접니까?’ ‘접니까?’ 했다는 거다. 누군가 배신자가 생겼다면 ‘큰일 났네, 누굴까?’ 걱정을 해야 하는데, ‘저는 아니지요’ ‘나만 아니면 돼’ 했다는 얘기지. 예수님이 ‘내가 이 빵을 건네주는 사람이다’ 얘기하고 유다에게 주는데, 그때 유다의 표정이나 심정이 어땠겠나. 유다가 그길로 나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때까지 3년을 열두 제자로 같이 다녔으면서 아무도 그를 붙드는 놈이 없었다는 거다.” -유다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열두 제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제자들도 유다를 붙들고 ‘뭐 때문에 그러니?’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하고 토론하고 했어야 했는데… 함석헌 선생은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셨다. 난 그걸 읽으면서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는 건, 100분의 1이 깨져 나가는 게 아니고 전체가 다 망가졌다는 뜻이라는 걸.” 하나의 상실은 전체의 붕괴이며, 그 전체를 복구하는 건 하나에서 시작한다. 김성순의 호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의 항보(恒步). 빠른 것의 부박함과 비집고 솟아오르는 것의 허망함을 그는 깊이 경계한다.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으려면 날마다 돌아보고 비춰보며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거북이는 욕심이 없으니 오래 산다
기인 호흡으로 숨 쉬고
10년 100년 단위로 세상을 바라본다.
거북이는 말이 없다
온몸으로 땅을 안고 산다
급할수록 돌아간다
날마다 자기를 돌아본다.”(김성순 시, ‘거북이의 노래’ 중에서)
녹취 김연지(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땅 기름지면 질소 높아지고
햇빛 좋으면 탄소 많이 생겨
N은 물질이고 C는 정신이라 할만
물질 커지는 데 맞게 정신 커져야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하는 걸 기준으로 삼지 마라
내가 어제보다 얼마나 더
좋아졌느냐에 기준 둬야 한다” 옆가지 방해하는 힘센 놈, 좋은 열매 못 맺는다 -아까 하던 포도 얘기부터 다시 여쭙겠다. 왜 잘 자란 나무는 열매가 부실한가? “넝쿨이 무성하면 좋을 줄 알지만, 과수는 너무 웃자라면 수정이 잘 안 된다. 포도 이파리는 손바닥만 해야 적당한데, 비옥한 땅에 거름 많이 주면 마디가 죽죽 늘어나면서 이파리 하나가 호박잎만해진다. 그러면 포도 맛이 없거나 병에 약해지지. 그러면 너슬포도가 된다.” -너슬포도가 뭔가? “밀착해서 촘촘히 많이 붙어야 되는데,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이렇게 붙은 포도가 된단 말이다.” -거 참 신기하다. 왜 그럴까? “포도에도 주기가 있는데, 꽃 피기 전까지가 ‘영양생장기,’ 그다음 꽃 피고 포도알에 착색이 될 때까지가 ‘교대기’고 그다음 낙엽이 될 때까지가 ‘생식성장기’이다. 생장기에는 순(筍)의 힘이 좋아야 하지만 교대기에는 에너지가 순으로 안 가고 열매로 가도록 전환이 잘돼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자라는 게 능사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이 시대가 여름이 아니다. 여름엔 쭉쭉 자라는 게 좋은데, 이제 시대정신이 가을로 가고 있다. 양분을 열매로 보내든지 뿌리로 보내서 겨울 준비를 해야지, 계속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쪽으로 가면 어떡하나. 나무도 그렇게 되면 병약해지고 좋은 열매를 못 맺는다.” -시도 때도 없이 성장하려고만 하면 안 된다? “지금은 성장이 아니라 성숙을 해야 하는 시기다. 어떤 기업에서 광고 문구로 이 말을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웃음) 그간 우리가 돈, 돈, 돈 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나. 아파트 잘 짓고 공장 팽팽 돌아가고 수익 늘리고… 그렇게만 하면 모두가 잘산다고. 근데 사실은 사람들 심성이 따라가질 못하는 거지. 포도로 치면 넝쿨만 무성하고 제대로 수정도 안 되고 열매가 안 달리는 격이다.” -인간 사회의 성숙은 무엇인가? “농사를 짓는 데 재배공식이 있다. 분모를 질소(N)로 놓고 분자를 탄수화물(C)로 놔서 ‘N분의 C’(C/N)라고… 땅이 거름지면 ‘질소’가 높아지고, 하늘의 햇빛을 잘 받으면 광합성 잘해서 ‘탄수화물’이 많이 생긴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뤄야 농사가 잘된다. 땅은 좋은데 햇빛 못 받으면 (종이에 c/N라고 쓰면서) 꽃도 열매도 시원찮다. 반대로 땅이 거름지지 못한데 햇빛만 짱짱하면 (C/n라고 쓰고) 받쳐주는 힘이 약해 식물이 잘 못 큰다. 이게 자연의 섭리다. 난 C/N 공식이 사람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N은 물질이고 C는 정신이다. 물질이 커지면 거기 상응하게 C가 커져야 한다. 물질 토대가 너무 빈약해도 안 되지만 지금은 무질서하게 N(물질)만 커진 상태다. 이래선 성숙이 안 된다.” -성숙을 위해서 혼자 성장하는 가지를 억제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우리 통념은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 ‘되는 놈을 밀어주자’였다. 그것이 교육에서나 경제에서 효율을 높이는 방식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문제다. 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학급에 애들이 30명 있다. 그중엔 가만 냅둬도 공부 잘하는 놈이 있다. 가만두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놈이 있고. 이런 경우엔 잘하는 애들도 독려하되 이놈이 지 공부 좀 잘한다고 행여 다른 애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적절히 억제해줘야 한다. 약한 애들은 중간 정도로 따라올 수 있도록 부추기고 도와줘야 하고… 포도 키울 때 보면 다른 놈들보다 두세 배 옆으로 뻗어가면서 다른 놈의 성장을 억제해 버리는 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해서 저라도 열매를 많이 맺으면 모르겠는데 이래선 저도 좋은 열매를 못 맺는다. 포도 가지 중에 너무 도전적인 놈은 살짝 가지를 비틀어 놔야 한다. 꺾어내진 않지만 햇빛을 좀 못 보게. 아예 꺾어버리면 이 세력이 또 다른 데로 가서 다른 놈이 비정상적으로 자라버린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교사라면 뒤처지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더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사실 그게 쉽지 않다.” 대구사범 졸업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죽을 고비 김성순은 젊어서 교사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친 김한규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43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교사자격시험을 보고 대구칠성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앞날이 막막하고 답답했다. 다시 4학년으로 복학해서 졸업할 무렵인 49년 6월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자주독립의 상징이던 백범 서거에 격분하여 가깝게 지내던 대구사범 동기 몇몇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남북협상 재개” 전단을 뿌리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며칠 구류 살고 나오겠지 했는데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대구형무소에 갇혔다. 10개월이 넘도록 재판도 못 받고 미결수로 있던 중 6·25가 터졌다. 7월 어느 날 같은 형무소에 있던 8100여명 중 3700여명이 불려나갔다. 제주도 4·3사건 관련자를 비롯해 목포, 보성, 안동 등지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올라온 2심 대기자들이었다. 무더운 여름, 4평짜리 비좁은 방이 미어터지도록 열댓 명씩 끼어 자다가 그중 절반을 불러내자 오히려 홀가분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이름이 불리자 싱글싱글 웃으며 나간 이, 읽던 책을 들고 나간 이도 있었다. 그날 이후 이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모두 학살당했단 얘길, 며칠 후 먼 친척뻘이던 간수한테서 나직이 전해 들었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지셨다. “어디 다른 데로 이감 가는 줄만 알았지. 왜 나는 안 부르나 생각도 하고… 구속된 지 1년 만에 종로초등학교에 천막 쳐놓고 임시법정이 열렸는데 공판에 나가 보니 동창들은 없고 나 한 사람뿐이었다. 판사가 ‘공범이 대여섯 명인데 어째 당신 혼자뿐이냐?’ 물어서 ‘그걸 왜 나한테 묻냐? 내가 알겠냐?”고 하니까 아무 소리 않더라.” -나머지 공범들은 어떻게 된 건가? “나중에 나도 백방으로 알아봤는데 알 도리가 없다. 동기 하나가 군대 갔다가 폐결핵으로 죽은 건 확인했고, 나머지는 통… 내 추측으론 아마 보석이 돼서 나왔다가 ‘보도연맹’(좌익전향자모임)에 가입되지 않았을까. 전쟁 나고 보도연맹 사람들 대부분이….” -학살되었으니까. “그렇게 죽지 않았을까… 추측만 할 뿐.” -실제로 좌파였나? “아니다. 문학을 좋아해서 서로 책 빌려주고 빌려보고 하는 사이였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로맹 롤랑의 <매혹된 영혼>, 그런 이와나미 문고의 고전들….” 삶과 죽음이 순간의 차이로 엇갈렸다. 만 스물에 구속되어 혼자 살아남았지만 삶은 죽음만큼 암울하고 허무했다. 김성순은 20대 초반의 참담한 복역 생활을 훗날 시의 형식을 빌려 회고했다. “간잽이 굴비처럼 줄줄이 묶여/ 부산 서면 연필공장 주먹밥 먹으면서/ 살아남은 자의 기쁨을/ 누구에게 감사할 줄도 몰랐다.“(1995년 정농회지에 실린 김성순 시 중에서) 1951년 4월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자마자 “총알받이 면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공군기술하사관에 지원해 3년간 근무했으나 뒤늦게 국가보안법 전력이 드러나면서 불명예제대하고 다시 육군 제3보충대에 소집되어 4년여를 근무했다. 58년 서른살이 되어 제대한 그 앞에 놓인 것은 아홉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의 자리였다. 먹고사는 일부터 걱정이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국가보안법 빨간 딱지 붙은 처지에 공직이나 교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시작한 것이 농사였다. 아버지가 틈틈이 개간해온 김천의 하천 부지에 농사를 짓겠다고, 갓 시집온 아내의 결혼반지를 팔아 리어카를 샀다. -자발적 의사라기보다는 떠밀려 시작한 셈인가? “나란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시대는 어떻게 바뀔까.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의지할 데도, 호소할 데도 없었다. 일본놈 밑에서 나고 자라 조선말 한번 쓸 때마다 교실 뒤 게시판에 매일 그래프로 표시당하면서 크다가, 해방을 딱 맞고 나니 허무하더라고. 알고 보니 태극기도 있고 임시정부도, 김구 선생도 있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는 게… 그러면 이젠 참 제대로 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들어야지,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뛰어든 일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시대의 폭풍 앞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거다. 그러곤 7년 동안 졸병 생활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다 귀찮아, 희망이 어딨어?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는 심정으로 농사라고 시작을 했다.” 첫해에는 수박과 참깨를 심었는데 홍수에 반 넘게 물에 잠기고, 그나마 남은 것들은 동네 꼬마들이 서리를 해가는 통에 폭삭 망했다. 이웃 주민의 권유로 포도농사를 시작한 건 이듬해인 60년부터였다. 겨우 내내 언 땅에 구덩이를 파고 하루에 네 번씩 32킬로미터를 걸어 김천 시내를 오가며 리어카 가득 인분을 실어 날랐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겠다. 명색이 사범학교 나온 인텔리인데. “그게 문제였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것도 그런데, 똥장군을 싣고 다니자니… 참 내 인생이 비참하구나! 근데 처음 시작할 때가 문제지, 딱 마음먹고 시작하고 나니 ‘똥배짱’이 생기더라.(웃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3~4년이 지나면서 하천가의 척박한 1000여평 땅에서 쌀 100가마분의 수입이 올랐다. 땀 흘리는 일이 힘들긴 해도, 농업만큼 정직한 직업이 없다는 걸 온몸으로 체험한 기간이었다. 포도농사를 시작한 지 10년 뒤인 1970년엔 더 좋은 땅 2500평을 구해 현재의 덕천포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빠짐없이 농정일지를 쓰고 포도재배법을 연구하는 한편, 농학자 류달영 선생의 <소심록> <유토피아의 원시림>,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보는 한국 역사> <씨알의 소리> 같은 책들을 꼼꼼히,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차차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허공에 떠 있던 발이 처음으로 땅 위에 닿는” 기분이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생명을 살리고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70년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교육을 수료하고, 정농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등 농민을 위한 권익운동에 앞장섰고 유기농법 확산과 생협운동에도 관여했다. 1980년 창설된 ‘사단법인 한국포도회’의 창립멤버로 이후 13년간 회장직을 맡아 무농약 포도재배기법과 포도가공기술을 전파했고 지금도 이 단체의 회지 <포도>의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젊은 시절과 현재를 비교해보면 스스로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시나? “내가 농가 출신도 아니고, 농대는커녕 농고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농업을 안 만났더라면, 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지도 못했을 거다. 농업이 내게 준 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다. 겸손함과 기다림을 가르쳐주고,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것이 농사다. 농사가 나를 치유해준다.” -사실 요즘은 전 국민이 치유를 필요로 한다. 세월호 사건이나 윤 일병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 “우리 시대의 가장 아픈 문제다. 누군가는 책임지고 진상 규명하고 고칠 건 고쳐야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나 자신부터 엄밀하게 거울에 비춰봐야지.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느냐’ 하는 걸 기준으로 삼지 말라. ‘내가 어제보다 오늘 얼마나 더 좋아졌나’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자기수련을 사회개혁보다 우선에 두는 건가? “두 가지는 연결되어 있다. 나는 나고 사회적인 현상은 현상이다… 이렇게 보기 쉬운데 실은 이게 전부 연결되어 있다.” 99마리 양 놔두고 한 마리 양 찾아야 할 이유 그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선생이 쓴 화결시(和訣詩)를 꺼내어 한줄 한줄 주석을 곁들여 설명한다. ‘지지엽엽 만만절’(枝枝葉葉萬萬節)이란, ‘가지가지 잎새마다 만만 마디로 얽힌 한 나무’라는 뜻이라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하나로 이어진 것이 생명이라고… 40여년간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성순은 2006년 해월 최시형의 추도식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동학연구자가 되었지만 그에게 기독교와 천도교의 섭리는 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동학에서 인내천을 얘기하는데 요즘 경악할 만한 사건들을 보다 보면 인간이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가 회의가 든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이 쓴 책 중에 제일 인상에 남는 글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누군가 날 팔 것이다’ 그 놀라운 얘기를 하셨을 때 제자들이 저마다 예수 옆에 가서 ‘접니까?’ ‘접니까?’ 했다는 거다. 누군가 배신자가 생겼다면 ‘큰일 났네, 누굴까?’ 걱정을 해야 하는데, ‘저는 아니지요’ ‘나만 아니면 돼’ 했다는 얘기지. 예수님이 ‘내가 이 빵을 건네주는 사람이다’ 얘기하고 유다에게 주는데, 그때 유다의 표정이나 심정이 어땠겠나. 유다가 그길로 나가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이때까지 3년을 열두 제자로 같이 다녔으면서 아무도 그를 붙드는 놈이 없었다는 거다.” -유다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열두 제자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제자들도 유다를 붙들고 ‘뭐 때문에 그러니?’ 밤을 새워서라도 설득하고 토론하고 했어야 했는데… 함석헌 선생은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셨다. 난 그걸 읽으면서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는 건, 100분의 1이 깨져 나가는 게 아니고 전체가 다 망가졌다는 뜻이라는 걸.” 하나의 상실은 전체의 붕괴이며, 그 전체를 복구하는 건 하나에서 시작한다. 김성순의 호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의 항보(恒步). 빠른 것의 부박함과 비집고 솟아오르는 것의 허망함을 그는 깊이 경계한다.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찾으려면 날마다 돌아보고 비춰보며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거북이는 욕심이 없으니 오래 산다
이진순 언론학 박사·희망제작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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