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the) 친절한 기자들]
“칸트의 3대 비판서가 종합 베스트셀러 50위권에 올라오는 현상은 극히 이례적이다.” “7년 정도 업계에서 일했지만, 사운드북이 베스트셀러로 올라온 것은 처음 봤다.”
21일부터 도서의 할인 폭을 15%로 제한하는 ‘도서 정가제’ 확대 시행을 앞두고,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변’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전체 22위,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1> <실천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이 각각 26위, 31위, 35위(이하 19일 낮 12시 기준)에 올랐습니다. 니체와 칸트의 저서는 생전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인문 고전들입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가운데 정가의 50%에 이르는 파격 할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온라인 서점의 책 판매 페이지들. 온라인 서점 화면 갈무리
왜일까요? 소비자들 사이에서 도서정가제 전 ‘책 사재기’ 열풍이 부는 까닭입니다. 보통 책 사재기라고 하면 출판사에서 자사 도서의 베스트셀러 순위를 올리기 위해 암암리에 일반 독자인 척 다량을 사들이는 행위를 일컬었는데요, 이번엔 독자들이 직접 움직이고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들이 정가제를 앞두고 50~90%에 이르는 ‘파격 할인’ 행사를 실시하고 있는 데다, 오래 두고 볼 책이라면 미리 구입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이 요동쳤습니다. 특히 고전 반열에 오른 책들이 새삼 인기를 끌었습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등이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량 상위권으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가격대가 비싼 전집도 평소보다 잘 팔렸습니다. 전집의 장르는 고전과 교양, 학습서를 망라합니다. ‘예스24’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가 10위에 올랐습니다.
도서정가제 강화를 목적으로 한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을 두고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반대 성명을 내자 국내 주요 출판사가 출고 정지로 맞대응에 나섰다. 소비자 사이에서도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박미향 기자
박태근 알라딘북 MD는 “평소 읽어야지 생각했던 책들, 언젠가는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책들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예를 들어 <총, 균, 쇠>가 반값 할인으로 하루에도 몇백부씩 주문이 들어오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1998년에 출간된 <총, 균, 쇠>는 752페이지짜리 인문서로, 꾸준히 팔렸던 책이긴 하지만 다시 조명받고 있다는 겁니다.
성향은 좀 다르지만, 유·아동 도서들도 소비자들의 책바구니에 부쩍 많이 담기고 있습니다. 역시 출판사의 파격 할인폭이 큰 탓이지만, 아이가 자라는 동안 두고두고 볼 수 있다고 판단한 학부모들이 도서정가제 시행 전에 미리 사두겠다고 결심한 영향도 있습니다. 예스24의 경우 전체 50위권 가운데 6위, 7위, 27위, 28위, 31위, 37위, 40위, 43위, 46위, 47위가 아동 서적(19일 오전 기준)입니다. 윤미화 예스24 콘텐츠미디어팀 대리는 “28, 37위의 스티커북이나 55위에 오른 사운드북처럼 평소 전체 베스트셀러 진입을 생각하지 못했던 책들의 약진도 눈에 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같은 ‘책 사재기’ 반짝 붐에 힘입어 SNS에서는 오래 두고 볼 만한 책들을 추천하고 자신만의 ‘북 리스트’를 공유하는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름난 북 블로거들이나, 출판사 관계자들의 페이스북 혹은 트위터 등에 자신이 산 책과 추천 책을 널리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온라인 서점 관계자는 “평소 유아를 위한 동화책을 추천해 온 서천석 ‘행복한 아이 연구소’ 소장이 최근 트위터에 소개한 책은 곧바로 베스트셀러로 진입하는 등 판매량에 빠르게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 눈에 띈다”고 말합니다.
일반 누리꾼들 사이에서도 “도서정가제가 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 세계문학 가운데 이 책만큼은 소장해야 한다는 책 있으시면 제보 부탁드립니다”(인스타그램 @jung****) 처럼 자신의 취향을 밝히고 비슷한 책을 추천받고 싶다는 게시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네이버 ‘맘스홀릭’ 같은 육아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12월 출산 예비맘인데 아이 책은 도통 감이 안오네요. 3~4살까지 볼 수 있는 책 추천해주세요”(Gree****) 같은 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서정가제 시행 뒤 몇개월 동안 실질적인 책 가격 상승에 따른 판매 급감 현상이 나타날 것을 예상하고 있는 일부 출판사들도 재고 위주로 할인 행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평소 할인을 잘 하지 않던 학술 전문 출판사까지 할인에 나서자, 소비자들의 조바심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출판사들은 재고를 활활 태우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활활 태운다”(@Jeon****) “○○사 마지막 할인에 뭔가 쫓기는 기분이 들어서, 무료 배송 받아보겠다고 책을 열권 주문했다”(@alvi****) 는 ‘비명’ 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한편에선 경쟁적인 ‘파격 할인’ 판매에 대한 우려도 나옵니다. 온라인서점가에서 할인 폭이 큰 책들 위주로 잘 팔리다보니 양서와 상관없이 ‘파격 할인’에 이름부터 올리고 보는 형태의 상술이 덩달아 나타나고 있는데요, 이는 출판물에 정당한 가치를 돌려주자는 도서정가제의 근본 취지에 역행한다는 지적입니다.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이번 기회에 한 몫 잡으려는 온라인 서점의 상술에, 출판사들이 제 살 깎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재고 떨이’라는 긍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저렴한 가격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18개월 뒤 가격 재산정이 들어갈 때까지 신간을 찾지 않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책 시장을 망쳐놓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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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부 누리꾼들을 중심으로 ‘책 사재기 반대’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놓고 읽지도 않을 책인데도 ‘마감 임박’ 분위기에 말려 구입하는 행태를 막아보자는 취지입니다. “얼마 전까지 책 사재기에 조금 열을 올렸었는데, 중심을 지키기로 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후에도 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정가로 사면 그만큼 책을 쓴 이와 출판계에 더 도움이 되지 않겠나.”(@ facl****) “도서정가제 한다고 미리 그 많은 책을 사둘 필요가 있을까? 천천히 두고 사면 될 것을…. 몇권이라면 모를까.”(@mast****)
도서정가제 시행 전에 책을 정말 미리 사둬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원래부터 사려던 책이 있었다면 주저하지 말아야겠지만, 읽지도 않을 책을 미리부터 사들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할인이 당연한 것처럼 돼버린 온라인 서점 구매층에 맞춰 미리 책값부터 올려놓고 봤던 것이 출판계의 풍토였습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제대로 유통망 감독이 이뤄진다면, 책값 ‘거품’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출판 유통망이 정상화돼 ‘좋은 책에 제 값을 지불하고 아깝지 않은’ 때가 오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을 쓰는 저자와 번역가들, 편집자들에게 올바른 대가가 돌아갈 수 있다면,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겐 ‘무료 배송’보다 더 반가울 일일 것입니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