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수개월 동안 여중생과 동거하며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40대에 무죄를 선고해 누리꾼 사이에 논란이 뜨겁다. 한겨레 자료사진
[더(the) 친절한 기자들]
수개월 동안 여중생과 동거하면서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40대에 대해 대법원이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 취지로 판결한 사건(
▷ 관련 기사 : 여중생과 ‘동거’ 40대 남성 성폭행 혐의 무죄)을 두고 누리꾼들 반응이 뜨겁습니다. “서로 사랑했는데 신고는 왜 했겠느냐”, “지켜줘야 할 성인이 자기 딸 같은 아이에게 무슨 짓이냐” 등으로 판결과 달리 형사처벌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입니다. 이 남자, 형사처벌해야 하는데 대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어서 못한 걸까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도를 어떻게 손봐야 할까요? 그리고 1·2심은 대체 왜 유죄로 판단했을까요?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형사처벌하지는 않습니다. 아래 네 가지 경우에 해당할 때만 처벌을 받습니다.
① 미성년자를 폭행·협박해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경우입니다. 당연히 아동·청소년에 대한 강간죄로 처벌받습니다.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라는 중형에 처해집니다.
단, 미성년자의 자유의사에 따라 성관계를 가진 경우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이 경우 나이와 처한 상황에 따라 법률 적용이 조금씩 달라지는데요. 우선
② 미성년자가 13살 미만인 경우, 무조건 처벌받습니다. 형법 305조는 ‘13살 미만의 사람에 대하여 간음한 자는 강간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의제강간’ 조항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15살이라서 이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③ 미성년자가 13살 이상~19살 미만인 경우, 자유의사에 의해 성관계를 했어도 속아서 했다고 인정되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됩니다.
④ 미성년자가 13살 이상~19살 미만인 경우, 자유의사로 성관계를 했어도 대가가 있었다면 성매매로 인정돼 처벌받습니다. 이번 사건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검찰은 피고인의 죄가 ① 번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랑하는 사이’였으므로 ‘폭행·협박으로 강간한 경우’(① 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피고인은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한번 재판을 받게 됩니다. ② 번과 ④ 번에는 해당하지 않으므로 검찰은 ③ 번으로 공소장을 변경해 볼 수 있습니다.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는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유명한 연예인을 소개해주겠다”며 불러내 차에 태운 뒤 추행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법원이 이미 “차에서 추행당한 뒤 같은 날 저녁에 피고인을 다시 만났고 그날 또다시 위력으로 추행당했고 며칠 뒤 승용차 안에서 강간당했는데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강간·추행 당했다는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지적한 이상 이 같은 피고인의 행동이 ‘위계에 의한 추행죄’로 인정받을 가능성 역시 크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1·2심은 왜 피고인을 유죄로 판단했을까요? 1·2심 유죄 근거를 들여다보면 대법원의 무죄판결에 대해 좀 더 정확한 비판이 가능할지 모릅니다.
우선 대법원은 무죄 판결의 이유로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했습니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보낸 많은 접견서신 등에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쓰여있고, 피고인을 사랑한다, 많이 보고 싶다, 함께 자고 싶다, 고맙다, 힘내라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피고인의 비위에 맞춰 허위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점을 근거로 강간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대법원과 달랐습니다. 2심 재판부는 “편지를 보면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의심이 가기는 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자신이 그러한 내용으로 편지를 적지 않으면 피고인이 자신에게 크게 화를 내곤 했기 때문에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나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 등을 참고하여 마음에도 없는 내용을 적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진술은 신빙성이 높다. 따라서 편지내용만으로는 연인관계라고 믿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편지를 쓴 건) 기소된 강간행위 이후의 일”이라며 연인관계로 발전하기 전에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강간행위’가 벌어진 시점은 피의자가 다른 범죄로 수감된 2012년 5월 이전이고, 피해자가 연애편지를 쓴 건 피의자가 수감된 2012년 5월 이후라는 말입니다.
1심 재판부도 ‘연인관계였다’는 주장에 대해 “부모 또래이자 병원에서 우연히 알게 된 남성을 며칠 만에 이성으로 좋아하게 되어 원만하게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 비추어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대법원이 ‘연애편지’만을 근거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결론을 내린 건 아닙니다. 피해자와 피고인은 처음 만난 뒤부터 피고인이 구속될 때까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카카오톡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피고인을 오빠, 자기, 남편으로 호칭하면서 연인 사이에나 주고받을 법한 일상생활 이야기, 사랑한다는 내용, 보고 싶다는 내용,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내용 등이 담겨 있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피고인의 비위를 맞추려고 허위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문자메시지를 보낸 횟수, 내용, 형식 등에 비춰보면 피해자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점에 대한 판단도 대법원과 1,2심 재판부 판단이 달랐습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점에 대해서 “세부적인 부분을 제대로 되살리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일관되고 구체적이다. 일부 내용의 불일치나 모호함은 중학교 3학년의 피해자가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2심 재판부도 “진술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재범 위험성을 인정하면서 “피해자를 간음하던 시기에도, 길거리 등에서 먼저 접근한 여성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이성관계를 가지려고 시도했다. 그 중에는 심지어 초등학생·중학생도 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판단 끝에 1심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이)범죄로 넉넉히 인정된다”고 밝혔고, 2심 재판부도 “1심 판단은 정당한 것으로 수긍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법원과 매우 다른 결론입니다.
피해자 만13살이 기준인 ‘의제 강간’에 해당 안돼
2012년 기준 나이 만16살로 올리자는 개정안 발의
자, 이제 마지막입니다. 복잡한 사실관계 판단은 모두 미뤄두고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어른이 15살 소녀를 임신시켰으면 형사처벌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합의만 이뤄진다면 형법상 의제강간 조항 적용 대상자를 ‘13살 미만’에서 ‘16살 미만’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고쳐놨다면, 이번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신빙성 등을 따질 필요도 없이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됐을 겁니다.
실제로 2012년 의제강간 적용 나이를 만 13살 미만에서 16살 미만으로 올리자는 형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습니다. 성에 대한 판단력에서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별 차이가 없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민법 등 다른 법률에서는 만 19살 미만까지 음란물 차단, 술·담배 금지, 계약 제한 등의 규제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행위에 대해서만 유독 관대하다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보고서를 보면, 일본·스페인·아르헨티나는 13살 미만, 독일·중국·오스트리아는 14살 미만이 기준입니다. 독일은 교육·생활보호를 위해 위탁된 미성년자는 16살 미만, 교육·보호·업무·고용관계에서 종속성을 남용한 경우와 친·양자의 경우는 18살 미만으로 보호연령을 높였습니다. 영국과 스위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16살 미만입니다.
당시 법무부와 법원행정처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나이를 올리면 △중학생들끼리 좋아서 성관계를 맺어도 처벌 대상이 돼 과잉 처벌 우려가 있고 △신체·성의식 발달로 13살만 돼도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돈을 주거나 위계·위력을 사용해 성관계를 하면 이미 처벌을 하고 있는데, 스스로 결정해 성관계를 하는 것까지 처벌하는 게 옳으냐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고로 여성가족부는 나이 차이가 몇 살 정도 나는 경우에만 상대방을 처벌한다는 식으로 절충안을 만들 수도 있다는 입장입니다.
김원철 기자
wonchu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