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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추·상추·산나물 팔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등록 2015-06-05 18:52수정 2015-12-22 14:57

지난달 28일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산나물 밥집 ‘소녀방앗간’의 벽을 배경으로 팔을 벌려 섰다. 언론에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명의 리더’로 소개되기도 한 그는 인터뷰에서 “모든 리더는 공공의 이익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은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달 28일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산나물 밥집 ‘소녀방앗간’의 벽을 배경으로 팔을 벌려 섰다. 언론에서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명의 리더’로 소개되기도 한 그는 인터뷰에서 “모든 리더는 공공의 이익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은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생생농업유통 김가영 대표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던 꼬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다란 탑에 돈을 잔뜩 쌓아놓은 도널드 덕이 금화 속에서 수영을 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는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도 돈으로 샤워를 해봐야지! 아이는 저금통을 털어 그걸 몽땅 10원짜리 주화로 바꿨다. 금화와 가장 비슷한 색깔의 동전이었다. 빨간 함지박에 동전을 가득 쏟아놓고 의기양양하게 들어가 앉았다. 근데 웬걸, 맨살에 닿는 동전은 배기고 아프기만 했다. 도널드 아저씨는 이게 뭐가 좋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 돈이 많으면 행복해? 왜 행복해?”

엉뚱하고도 집요했던 아이는 자라서 기업가가 되었다. ‘지리산친환경농산물유통’과 ‘생생농업유통’의 대표이자, 산나물 밥집 ‘소녀방앗간’의 이사, 김가영(29)은 올해로 농산물 유통업 경력 10년차의 중견 기업인이다. 언론에서는 그를 “연간 매출 30억원대”를 올리는 청년창업가이며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명의 리더” 중 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돈 많이 버는 성공적 기업인으로 소개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매출액 말고 생산 규모로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지난달 28일, 서울 성수동의 ‘소녀방앗간’에서 만난 김가영은 잿빛 티셔츠에 면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소개를 하자면 그는 경북 청송과 예천, 전북 남원과 고창, 강원도 태백과 전남 곡성 등지에서 연간 고추 3톤, 산나물 1톤, 된장 3톤, 상추 400톤가량을 생산 거래하는 농산물 유통업자다. 상근 직원만 19명. 그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의 이력을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렇다. 1986년 서울 출생. 선린인터넷고교 졸업. 2005년 이화여대 입학. 2015년 현재, 아직 졸업 못한 재학생. 취미는 레고와 자전거 타기, 그리고 할머니들과 밭에서 노래하고 춤추기.

“저희 엄마 상처받지 않게 이쁘게 좀….”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수한 차림새로 다니는 그가 선머슴 같아 보인다고 어머니가 속상해하시니 예쁘게 좀 찍어 달라고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인터넷고 재학중 창업상 휩쓸고
웹디자인회사 창업한 사업가
정작 정보통신 쪽 접어두고
‘도깨비 농사’ 짓다 농산물 유통
주왕산 산나물로 밥집도 차려

“서울 애들은 세련되고 멋있어요
근데 밥은 쓰레기밥을 먹어요
내려가면 할머니들은 가난하고
못배웠지만 밥은 잘 해먹어요
왜 서로 하나씩 비어야 하죠?”

생생농업유통 김가영 대표
생생농업유통 김가영 대표
‘덜 나쁜 유통업자’되는 게 목표

-화장하고 곱게 단장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대학교 1학년 때는 저도 그랬어요. 근데 농사를 지으면 그게 안 된다는 거 아실 거예요. 땀범벅인데 무슨 화장을 해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영 어색하고 쑥스럽다면서 그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주방과 홀을 오가며 일하는 직원들이랑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럽게 킥을 날린다.

“아, 웃지 마 쫌!”

그 말에 모두 참았던 웃음보를 터뜨린다. 대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 투명한 유리창을 타고 길게 스며든 아침 햇살이 젊은이들 웃음소리처럼 화사했다. 밥집 중앙에는 경북 청송에서 직송해 온 쌀과 잡곡, 건나물과 매실청, 간장, 된장 등이 놓인 진열대가 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벽면에는 나물 뜯는 할머니들의 사진과 짤막한 소개 글이 붙어 있다.

할머니들은 수많은 풀들 사이에서 먹을 것들만 똑똑 끊어서 삶고 말리고 데쳐 나물찬을 내지요. 수십 해의 봄마다 보들보들 피어난 산나물들을 뜯어 삶을 지탱해 왔습니다.(‘소녀방앗간에서 전하는 첫 번째 이야기’ 중에서)

-지난번 우연히 이 식당엘 왔다가 바로 옆자리에서 배용준을 봤어요. 아유, 이런 한류스타가!(웃음) 근데 여기 직원들은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하데요. 그런 유명인이 오면 사진 찍고 사인 받아서 벽에 붙여놓는 것 아닌가요?

“저희는 사실 그런 데 별 관심 없어요.”

-관심 없어요?

“그런 거 좋아했으면 저희가 이렇게 모여 살 수도 없었을 거예요. 동네 분들이 우리보고 무슨 게릴라 집단 같다고 그러세요. 우리끼리 하루 종일 깔깔대고 재밌어요. 우리가 뭘 완벽하게 이룰 수 있다곤 생각 안하지만, 우린 목표가 있거든요. ‘덜 나쁜 유통업자’가 되는 것.”

-덜 나쁜 유통업자?

“네. 덜 나쁜 거요, 착한 거 말고.”

김가영이 생각하는 ‘덜 나쁜 유통업자’란 무엇일까? 선린인터넷고 재학 중이던 열일곱 살에 이미 김가영은 ‘이누스’라는 웹디자인회사를 창업해서 버젓이 사업자등록증까지 낸 사업가였다. 2003년 청소년 창업아이디어 경진대회 최우수 장관상, 신기술 콘퍼런스 일반기업 대상, 여성창업경진대회 은상까지 받았던 그가 정보통신 쪽을 접어두고 젊은이들 다 빠져나간 농촌에 눈을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우리 농업의 미래는 어떤 것이고, 그에게 기업이란, 성공이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자리를 옮겨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밥집 근처 주택가, 그와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숙소로 얻어둔 집이 있었다. 대표이사 명패도 없는 2층 거실이 그의 사무실이었다.

-여기서 주로 지내나요?

“서울하고 청송에서 반반씩 지내요. 중간중간 다른 지역에도 들르고… 늘 떠돌아다녀서 ‘주거 불명’이죠.(웃음)”

-왜 하필 청송이죠? 개인적인 연고가 있나요?

“아뇨. 없어요. 우연히 강연 갔다가 거기서 ‘청송시니어클럽’이라고 지역단체 하시는 분들 만났는데 정말 사심 없이 좋은 분들이셔서 마음도 잘 맞고….”

-유통업 차원에서 본다면 청송이 사업에 그리 유리한 곳은 아닐 텐데. 교통도 불편하고 수도권에서 먼 편이고….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청송으로 한 거예요.”

-왜?

“서울 애들은 참 세련되고 멋있어요. 근데 밥은 쓰레기밥을 먹어요. 내려가면 할머니들은 가난하고 못 배웠는데 밥은 잘 해먹어요. 그게 슬펐어요. 왜 이 (농촌)지역 사람들이랑 서울 젊은이들이랑 하나씩 비어서 살아야 하나? ‘농업을 살린다’ 하는 거창한 뜻이 아녜요. 그냥 할머니들이랑 우리랑 둘 다 애틋했던 거예요. 애틋한 사람끼리 도우면 어떨까. 저한테 거리는 큰 의미가 없어요. 해결을 하면 되지. 지리적인 요건이 좋아서 유통을 한다? 그럼 그 조건이 사라지면 안 하는 거잖아요. 사람이 사랑을 하는데 무슨 조건을 따져서 하나요? 그냥 좋으니까 좋아하는 거지.”

-경영학이나 마케팅에서 얘기하는 공식하고는 전혀 다르네.

“저는 안 읽으니까요.”

-하하하….

“뭔 소린지 한 개도 모르겠고. 세상에 사람 사는 모양이 다 다른데 그런 말끔한 결론이 싫어요.”

서울 성동구 성수동 ‘소녀방앗간’ 인근 생생농업유통 직원들의 숙소로 인터뷰 장소를 옮겼다. 김가영 대표(오른쪽)가 경북 청송에서 채취한 뽕잎과 다래순을 우려낸 차를 내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 성동구 성수동 ‘소녀방앗간’ 인근 생생농업유통 직원들의 숙소로 인터뷰 장소를 옮겼다. 김가영 대표(오른쪽)가 경북 청송에서 채취한 뽕잎과 다래순을 우려낸 차를 내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농산물은 공공재, 밥 앞에선 평등해야

-처음부터 어느 산지와 연계해서 어떤 작물을 팔 것이냐, 그래서 이윤을 얼마나 남기느냐, 이런 거 계산해 보고 시작하는 거 아녜요?

“계산 안하죠. 청송에는 집성촌이 있어 그런지 정말 애향심 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고향을 지키려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서 간 건데, 특별히 경쟁력 있는 게 없었어요. 사과 빼고. 근데 사과 농민들은 비교적 부농이고 나머지 농민들은 그냥 빈농이고. 그나마 사과는 기후변화랑 한-중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경쟁력을 잃어갈 게 뻔한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사람들이 단점이라고 생각하거나 가치절하하고 있는 걸 찾자!’ 생각했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때를 못 만났을 뿐이지 가치가 없는 건 없다고 믿거든요. 그러고 봤더니, 주왕산 오지에서 자라는 산나물이 보였어요. 오지니까 깨끗하고 소박하고. 거기 사는 할머니들 닮았죠. 그래서 할머니들한테 어떻게든 산나물을 내시라고, 그럼 파는 건 내가 책임지고 팔겠다고 했죠. 못 팔면 내 돈으로라도 메워 주겠다고. 그래서 그간 번 돈 다 넣어서 여기 밥집을 연 거예요.”

-그럼 이제 유통업에서 요식업으로 방향을 바꾼 건가요?

“여전히 제 주업은 유통업이에요. 세상에 양쪽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산업이 별로 없는데 제가 볼 때 농산물 유통은 제가 나중에 죽을 때 가장 후회 없는 일이 될 것 같아요. (농촌)지역에 있는 사람들 조금 나아지게 하고, 서울에 있는 사람들 건강하게 하는 일. 두 가지를 충족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죠.”

-웰빙 열풍이 불면서 ‘산지에서 직접 운송해온 산채’는 상당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되어버렸어요. 병풍 두른 방에서 우아하게 먹는 음식! 좋은 국산 식자재로 음식을 해먹는 건 중산층 이상에서나 가능한 일 아닌가요?

“전, 좋은 농산물은 모두가 향유해야 하는 공공재라고 생각해요. 사실 의식주 중에서도 사람한테 꼭 필요한 건 밥이잖아요. 좋은 밥은 부자가 먹고 안 좋은 밥은 가난한 사람이 먹어야 된다고 하면 슬프죠. 최소한 밥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할머니들의 본심도, 제 가격을 받고 싶은 거지 비싼 가격을 받고 싶은 건 아니거든요.”

-다른 이들 같으면 “저렴한 가격대에 웰빙음식을 즐기려는 수요자들의 틈새시장을 공략했다”라든가 뭐 그런 답변을 내놓을 것 같은데, 잘나가는 기업가 대답치고는 별로 ‘비즈니스적’이지 않네요.(웃음)

“아뇨. 비즈니스적이죠. 사실 제가 제일 영악한 건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하는 비즈니스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잖아요. 마음을 얻는 건 세상을 다 얻는 거니까!”

김가영은 태생적으로 ‘스토리텔링’의 힘을 활용할 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활용하는 ‘스토리’는 경영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현장에서 할머니들과 부딪히며 몸으로 체득한 것이다.

농산물 유통은 나중에 죽을 때
가장 후회없는 일이 될 것 같아
농촌 사람들 조금 나아지게 하고
서울 사람들 건강하게 하는 일
두가지 충족되면 뭐든 할 수 있어

김가영의 목표는 원대하다
30가지 농산물 각각 100억 거래
최적가 안심 브랜드 챔피언 만들기
그 돈으로 농업기술력에 투자해
더 좋은 유통시스템을 만드는 것

헌 신발을 심으면 신발이 나나요?

-외지인에다가, 여자에다가, 결혼 안 한 싱글이니, 보수적인 농촌 지역의 노인네들한테 신뢰를 얻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귀농하려고 내려간 사람들 중에도 텃세 때문에 지내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사실 까놓고 얘기하면 텃세가 있어야 맞죠. 전 텃세를 인정해요. 그 터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면 외지인 하나 들어온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거예요. 시간이 필요해요. 저 사람들이 나를 스캔할 시간. 연애할 때도 그렇잖아요. 마음이 있으면 썸도 타고 꽃놀이도 가고 서로 마음 확인도 하고 질투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니까.”

-할머니들이랑 고스톱도 잘 친다면서요?

“맨날 지죠. 옷벗기 고스톱 같은 거 치다가 빤스만 입고 다 벗은 적도 있어요.”

-할머니들이랑 옷벗기 고스톱을 해? 아가씨가?

“제가 이길 줄 알았죠. 처음에 내려갔을 땐, 나름 좋은 대학에 다닌다는 생각에 ‘그래도 내가 할머니들보다 더 배웠는데 고스톱을 지겠어?’ 하곤….”

-그러게. ‘이대 다니는 여자’인데.(웃음)

“할머니들은 고스톱만 전문으로 40년을 쳤는데, 나중에는요, ‘사쿠라!’ 그러면 진짜로 사쿠라가 떠요. 으아!”

-타짜들이시네!(웃음)

“그럼요. 그렇게 모여서 매일 치셨는데요. 내가 보는 프레임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분들도 어떤 측면에서 배워야 될 부분이 있는 ‘삶의 전문가’들인데 그걸 만만히 보면 안 되죠.”

-농사일도 할머니들한테 다 배운 거예요?

“스무살 이전엔 농사짓는 걸 구경도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대학교 1학년 첫 학기에 1.35를 받았어요. 수업 다 듣고 열심히 답안을 썼는데도…. 제 인생 최초의 좌절이었죠. 이러단 학교 잘리겠다 싶어서 휴학을 하고 전라도, 경상도 여행을 떠났어요. 떠돌고 있는데 선배들이 살살 꼬시는 거예요. 밥도 주고 술도 줄 테니 같이 가자고.”

-어딜?

“농활요. 완전 속았죠!(웃음) 힘들긴 되게 힘들고 벽에 기대지도 못하게 하고. 이게 뭔가 싶었는데, 할머니들이랑 같이 놀면서 일하는 건 정말 좋았어요. 딱 한정된 밭이라는 공간에서 다 같이 일하고 모두가 동지 같고 이런 느낌이…. 그 쭈글쭈글한 할머니들이 일하다가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할 때는, 무슨 마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힘이 나고. 도널드 덕 아저씨가 금화 속에서 수영할 때 같은 느낌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충격을 받은 게 그때 간 곳이 포도농사 짓는 천안 입장이었는데 ‘할머니, 포도는 어떻게 나?’ 물으니까 ‘포도 먹고 씨 심으면 포도 나지’ 그러시는 거예요. 나는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아니 요만한 포도씨에서 어떻게 이렇게 큰 포도가 나나?”

-하하하… 그게 그렇게 신기했어요?

“선생님, 지금 웃으시지만 생각해 보세요. 신발 신고 있다가 신발 떨어졌다고 심으면 신발 나냐고요? 공산품은 쓰면 버려지는데, 농사는 인간이 소비하고 남은 걸 심으면 더 많이 난다는 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때부터 농사를 짓겠다고 작정했다. 무작정 지리산 인월로 들어가 땅을 빌려 달라 하니, 농사 못 짓는 사람한테 빌려주면 밭 망친다고 아무도 땅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들 몰래 휴경지 한쪽에 도둑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빈 땅 한구석에서 당근과 옥수수가 자라나니 할머니들은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기겁을 했다. 결국 들켜서 혼쭐이 나면서도 법학 시간에 주워들은 풍월로 ‘나는 주거침입으로 잡혀가겠지만, 민법상 경작권은 내게 있으니 내가 심은 거 파내면 민사소송 하겠다’고 폼 잡고 대들었다가 욕만 억수로 들어먹었다.

서울에서 온 ‘낮도깨비’ 같은 여학생이 그래도 밉지는 않았는지 할머니 한 분이 자기 텃밭을 내줄 테니 농사를 지어보라고 했다. 소원은 풀었지만, 서울의 학교와 지리산을 오가며 농사일을 계속하기는 어려웠다. 그가 없는 새 할머니들이 그의 텃밭을 봐주면, 그는 할머니들이 지은 작물을 서울에 내다 팔기로 했다. 농업 생산과 유통의 역할분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했다. 농산물 가격 추이를 몇 년간 분석해보면서 김가영은 상추에 주목했다. 성수기와 비수기에 따라 근당 도맷값이 4천원에서 3만8천원까지 널뛰는데 몇 년간 가격이 절대로 떨어지지 않은 품목. 2008년, 김가영은 단일가로 일년 내내 상추를 공급하는 대신 안정적으로 수급을 받을 고정거래처를 뚫기 위해 상추 상자를 들고 무작정 강남과 홍대 앞 식당 문을 두드렸다. 아무 연고도 없이 다리품 팔기를 8개월 만에 홍대 앞 삼겹살집에 첫 거래를 텄다. 그때부터 변함없이 61개 식당에 그는 약속한 물량의 상추를 어김없이 공급하고 있다. 2011년 탄저병으로 고추값이 폭등하면서 2012년부터는 고추 직거래에도 손을 댔다. 고추는 손이 많이 가지만 환금성이 높아서 빈농이나 홀로 계신 할머니들도 크든 작든 키우는 작물이라는 점이 김가영의 마음을 끌었다. 지리산에 이어 전국 각지의 농산물을 직거래하기 위해 2011년 설립된 생생농업유통은 지역과 작물을 해마다 확대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김가영을 만든 시간들
김가영을 만든 시간들
친구들아, 니들 잘못이 아니야

-부모님은 말리지 않으셨나요? 이대 들어간 맏딸이 대학도 졸업하기 전 농촌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모르셨어요. 나중에 2008년에 신문에 나고 아셨죠.”

-어이쿠! 놀라셨겠네.

“어려서부터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으니까요. 우리 어머니는 ‘내가 뭘 먹고 널 낳았는지 모르겠다’ 그러시죠.(웃음)”

부모님은 김가영의 고집에 번번이 져주는 것으로 그를 지원했다. 중학교에서 전교 10등 내외로 성적이 좋았던 딸이 외고나 과학고는 싫다면서 특성화고등학교에 가겠다고 할 때도, 고교 재학 중에 창업을 해서 정신 팔려 있을 때나, 대학 재학 중에 상추·고추 장사를 하기로 했을 때도 부모는 딸을 만류했지만 끝까지 등을 돌리진 않았다.

어린 가영이가 도널드 덕 흉내를 내면서 “돈이 많으면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 딸에게 <대중참여경제론>(김대중 지음)을 사줬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아이엠에프(IMF)로 큰 실패를 맛봤지만, “너희들은 이런 실패를 반복하지 말라”면서 뼈아픈 실책을 어린 딸 앞에 낱낱이 고백했다. 하루는, 구두쇠로 소문난 아버지가 가영이를 백화점에 데려가서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을 모두 고르라고 호기를 부린 적이 있었다. 장난감을 움켜쥐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난 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가영아, 니 몸에 걸치고 먹고 사는 데 쓰는 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단다. 과시하고 싶은 욕심만 버리면 평생을 즐기다 살 수 있다.”

-그런 부모님이라서 이런 딸이 가능했겠군요.

“저희 아버지는 ‘깨벗는다’는 표현을 많이 쓰셨어요. ‘내가 너한테 물려줄 수 있는 건, 내 창피한 실수를 깨벗고 일러줘서 네가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도와주는 거다.’ 그게 부모로서 얼마나 엄청난 결심인 줄 어려선 몰랐죠.”

-그동안 돈은 많이 모았어요? 재테크 같은 건 하고 있어요?

“재테크, 안 해요. 훌륭한 기업가는 자기 회사를 제일 투자가치가 큰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왜 남에게 투자해요? 돈은 사람이 벌어야지, 돈이 돈을 버는 건 예쁘지 않고 불편해요.”

-사업은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가요?

“떼돈 버는 얘기들 좀 그만했음 좋겠어요. 유통업은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이익을 보장해 줄 것인가 고민해야 해요. 유통업자가 떼돈을 벌었다면 뭔가 잘못하는 거죠. 모든 리더는 공공의 이익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은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가영의 목표는 원대하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농산물 30가지로 작물당 100억원의 직거래를 성사시키는 것. 최적가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브랜드를 세우고 작목별 챔피언을 만드는 것. 그렇게 번 돈으로 다시 농업기술력에 투자하고 지역에 투자해서 천천히, 그러나 현존하는 그 누구도 출혈과 피해를 감수하지 않도록 더 좋은 농업 환경과 유통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함께 할 선의의 경쟁자들이 많아지기를 그는 소망한다. 독점은 유통을 좀먹는 독버섯이니까.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알바를 전전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 김가영은 희망을 주는 존재일까, 열패감을 주는 존재일까?

“아프겠죠.”

-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

“니들 잘못이 아니야. 지금 니가 어떤 상황이어도 기다릴 거고 난 좀 더 많은 친구들과 만나고 싶어…라고. 저한텐 세상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의 지평을 넓혀줄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맥줏집에서 알바를 하든 꽃꽂이를 하든, 이 친구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나중에 우리 일에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우린 이력서도 안 보고 뽑아요.”

-참, 미안하고 고마워요!

“우리 부모 세대는 대한민국을 만든 세대예요. 저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집이 다 지어져 있었고요. 저희 세대는 본질적으로 그 경험이 부족해요. 부족함을 인정하고 배울 건 배워야죠. 과거 386들이 가졌던 그 무모함, 그건 전에는 없던 거잖아요. 그래도 면죄부를 드리는 건 아녜요. 우리 세대의 한과 아픔을 간직한 채로, 그래도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이고, 부모님 세대는 지는 해인데, 뜨는 해가 지는 해를 뒤쫓아가면서 미워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게 우리를 더 강하고 믿을 만한 다음 세대로 키워줄 거예요.”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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