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집회 참가자 여러분, 지금 미신고 옥외집회를 하고 계시지만 공공질서에 대한 명백한 위험이 없는 한 여러분의 집회는 보장됩니다. 그러니 평화와 질서를 계속 유지해주십시오.” 지난달 23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가 해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경찰 기동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캡사이신을 무차별 난사하고 방패로 밀어붙여 강제해산을 시도하는 대신 이렇게 방송을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집회참가자와 경찰 간 충돌도 좀 줄어들지 않을까요. 허무맹랑해 보이신다고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대한민국 대법원 판례에 근거한 상상이기 때문입니다.
2012년 4월 대법원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회원들의 해산명령 불응죄에 대해 벌금형을 선고한 하급심의 판결을 파기 환송하면서 이렇게 판시했습니다. “옥외집회 또는 시위로 인하여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된 경우에 한하여 해산을 명할 수 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춘 해산명령에 불응하는 경우에만 집시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선고 2011도6294)
안녕하세요. 인사가 좀 늦었습니다. 이날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 경찰에게 ‘헤드록’을 당한 사회부 종로경찰서 출입기자 김규남입니다. 친기자 지면을 통해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날 이후 많은 분들이 공분해주셨습니다. 한 중앙일간지 경찰팀 기자는 “취재하는 기자한테까지 이럴 정도인데, 시민들한테는 얼마나 폭력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충격적”이라고 했습니다. 한 인권단체 활동가는 “경찰의 폭력에 몸도 마음도 상처가 클 텐데 오래가요. 제가 잘 알죠, 그 상처”라며 위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일선서의 한 과장(경정)은 저에게 전화로 “사태를 키우지 말고 잘 해결하자”고 했습니다. 시민·기자와 경찰 간에 이번 사태, 나아가 집회 현장에서의 인권을 바라보는 인식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입니다.
경찰의 대응은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었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 제1기동단장은 지난달 30일 말로는 사과한다면서 ‘헤드록’을 건 이유에 대해서는 “기자인 줄 몰랐고, 김 기자가 먼저 경찰을 폭행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적반하장이었습니다. 그런 사실 없다며 근거를 대라고 했더니 “현장 경찰 진술이 있었다”고 할 뿐 채증자료 등은 없다고 했습니다. 제 목을 꺾은 데 이어, 1년7개월 경찰기자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쌓아온 경찰에 대한 신뢰마저 꺾는 태도였습니다. 힘없는 집회 참가자들에게도 이런 식이었나 싶어 아찔해졌습니다.
종로서 관내에서는 대규모 집회시위가 많이 일어납니다. 종로서 출입기자단이 이번 일을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1일 오후 종로서 출입기자단과 종로서장, 서울경찰청 제1기동단장이 이 문제로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경찰은 이 자리에서 제 목을 꺾고 연행하려 했던 이유에 대해 “기자인 줄 몰랐고 해산명령에 불응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경찰이 한발 물러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대법원 판례에서 제시한 해산명령 요건인 명백한 위험이 존재하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해도 목을 꺾어가며 연행할 만한 일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경찰이 저를 왜 연행하려 했는지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종로서 기자단은 ‘재발방지 약속과 방안’을 요구했습니다. 경찰은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약속이 지켜질지 걱정은 쉽사리 가시지 않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 때도 경찰은 취재진을 무차별 폭행하고 취재를 방해한 바 있습니다. 당시 서울경찰청 출입기자단이 서울경찰청장에게 항의하고 사과를 받았지만 이후 집회 현장에서 기자들에 대한 폭행은 이어져왔습니다. 경찰 수뇌부가 기동대에 대해 교육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더구나 경찰청은 지난달 29일 ‘생활 속의 법치질서 확립 대책’을 마련했다며 집회시위 현장에서 ‘폴리스라인’을 넘기만 해도 검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사건 지휘라인의 최상층부에 있던 김재원 서울경찰청 기동본부장(경무관)은 지난달 30일 전북지방경찰청장(치안감)으로 승진 발령됐습니다. 대법원 판례를 존중하지 않는 경찰이 ‘법치 확립’을 외칠 자격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경찰은 제 목을 꺾은 이유와 함께 답해주세요.
김규남 사회부 24시팀 기자 3strings@hani.co.kr
김규남 사회부 24시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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