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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완장 때문에 환장하지 말입니다

등록 2015-10-16 19:39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화요일이었습니다. 오렌지색 바탕에 흰색으로 ‘보도 PRESS’라고 쓰인 완장 31개가 종로경찰서 기자실에 당도했습니다. 완장 뒷면에는 “서울지방경찰청에서는 취재현장에서의 질서유지와 기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본 완장을 제작하였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에서 경찰한테 ‘헤드록’ 걸린 ‘덕’에 2주 만에 다시 ‘친절한 기자들’ 지면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게 된 사회부 24시팀 김규남입니다. 오늘은 집회 시위 현장에서의 ‘기자 잔혹사’와 ‘완장의 추억’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기자인지 몰랐다.” “기자임이 식별될 수 있도록 보도 완장을 착용 후 취재하도록 안내하는 등 현장 취재 지원을 강화하겠다.” ‘헤드록 사건’ 이후 경찰이 내놓은 사건의 원인과 대책이었습니다. 보도 완장이 서울경찰청에서 종로서로, 종로서에서 종로서 기자실로 흘러들어온 이유입니다. 이 물건들을 본 당시 종로서 출입기자들의 반응은 ‘어처구니없음’이었습니다. “이게 뭐냐. 이거 안 차고 나가면 경찰이 기자에게 헤드록을 걸어도 된다는 거냐”, “완장 차고 서장실 항의 방문 하고 싶다” 등 다소 격앙된 반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반응의 한 원인은 ‘기시감’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기자인지 몰라 폭행’. 1989년 4월13일 <동아일보> 사회면의 한 기사 제목입니다. 그해 2월26일 인천 중구 답동성당 앞에서 취재기자 집단폭행 사건으로 당시 박아무개 국장 등 인천경찰청 간부 5명이 인천지검에 고소돼 수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4월10일에 또다시 ‘현대중공업 폭력규탄대회’ 시위 현장을 취재하던 <경인일보>의 한 기자가 경찰한테 폭행당하자 검찰 수사를 받고 있던 박 국장이 “보도 완장도 착용하지 않았는데 경찰이 시위대인지 기자인지 어떻게 구별하느냐”고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천경찰청은 잇단 기자 폭행 사건의 대책으로 부랴부랴 보도 완장을 제작해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했습니다. 기자 폭행 사건에 대한 경찰의 원인 진단과 대책은, 1989년과 2015년 26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완벽하게 판박이입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촛불집회에서 경찰이 취재진을 무차별 폭행하고 취재 방해를 하는 등 크고 작은 집회에서 경찰의 폭행은 되풀이돼 왔습니다.

또 집회 대오 안에 몰래 들어온 경찰이 ‘기자 사칭’을 하며 무차별 채증활동을 벌이는 행태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 집회 시위 현장에서 경찰의 기자 폭행이 잇따르자 서울경찰청은 신변안전과 취재질서를 위한다며 보도 완장을 사진기자들에게 배포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1995년 9월20일 한국사진기자회는 이 보도 완장을 모두 폐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같은 달 1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5·18 관련자 처벌 특별법 제정을 위한 국민대회’ 현장에서 경찰이 스스로 기자들에게 배포한 보도 완장을 착용하고 사진기자로 위장해 채증활동을 벌인 데 대한 항의 표시였습니다. 2008년 촛불집회 이후 서울경찰청이 시위대와 취재진을 구분하기 위해 보도 완장을 제공했습니다. 2011년 노동절 행사에서 바로 이 보도 완장을 찬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 틈에서 채증을 하다 사진기자들에게 ‘딱 걸린’ 일도 있었습니다. 지난 1월에도 서울 구로구 쌍용차 구로정비사업소 앞에서 정리해고 폐기를 위한 오체투지단이 행진을 하는 과정에서 구로서 정보과 소속 경찰이 <오마이뉴스> 기자를 사칭하다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김규남 사회부 24시팀 기자
김규남 사회부 24시팀 기자
그러고 보니 기자 폭행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낡은 레코드판을 트는 것처럼 경찰이 완장 카드를 꺼내들었네요. 강신명 경찰청장은 13일 “취재진이 (집회 참가자들과) 식별할 수 있는 표지를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날 오렌지색 완장이 종로서로 배달된 것입니다. 매우 발빠른 조처였죠. 경찰은 그만큼 보도 완장을 통해 기자를 시위대와 구분하여 ‘관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이 ‘알 권리’의 상징인 언론을 관리하려는 것, 몹시 놀라운 발상입니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기자 잔혹사와 완장의 추억을 볼 때 경찰은 그런 말을 꺼낼 자격조차 없어 보입니다. 인천경찰청 기자 폭행 사건 때 사건 기자들은 “지금까지 행위자 처벌이 단 한번도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직접 폭행한 경찰관의 처벌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건 그때 그들만의 주장은 아닌 듯합니다. 보도 완장 같은 대증요법 말고, 좀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김규남 사회부 24시팀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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